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네덜란드 로테르담은 산산이 조각났다. 시간이 흐른 후 오늘날 로테르담은 기후변화에 대응하며 스스로 ‘미래의 도시’라는 새로운 생명을 부여했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베이나(Weena)에 그려진 벽화. 도시 중심부에서 살짝 비껴간 복합 공간인 베일더(Weelde)에 위치한 더쥐러봄(De Zure Bom) 레스토랑. 스타츠하번 브라우에레이 내부. 베일더의 스케이트 공원.

지금 로테르담에는 네덜란드 특유의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성인이 된 후 인생의 일부를 이곳에서 보낸 내게는 너무도 익숙한 느낌이다. 우중충하고 때 묻은 창고 뒤를 발끝으로 사뿐히 걷는 내 눈앞에는 커다란 해골이 놓여 있다. 분필처럼 새하얗고 네모난 턱에 얇은 비강을 가진 이 해골은 바닥에서 튀어나와 우뚝 솟았다. 하지만 일반적인 두개골과 달리 눈구멍에서는 사우나 증기를 내뿜고, 목 안쪽은 욕조로 사용되도록 만들어졌다. 파이버글라스와 나무로 제작한 커다란 작품은 건축가 유프 판 리스하우트(Joep van Lieshout)가 디자인한 조각 공원의 일부로 로테르담 서부 외곽의 메르버-피르하번스(Merwe-Vierhavens, 이하 M4H) 지구에 자리하고 있다. 판 리스하우트의 기이한 작품의 존재는 노쇠한 업계의 자취를 백팔십도로 바꾸었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큰 과일 출항구였던 M4H 지구는 1990년대 냉장 선박 컨테이너의 등장과 함께 급작스러운 하락세를 겪는다. 이곳의 냉장 저장 창고는 쓸모없어졌고 버려진 기중기와 황량한 주차 공간만 쓸쓸히 남게 된 것이다. 20세기 후반, 로테르담 대부분은 M4H처럼 침체된 분위기에 잠겨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아닐지 몰라도 사람들의 심리 상태는 그랬다. 암스테르담, 위트레흐트 그리고 헤이그가 예술과 문화의 부유함을 누릴 동안 로테르담은 볼 것 없는 노동자의 도시로 치부됐으니까. “10년 전만 해도 제대로 된 베이글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죠.” 판 리스하우트가 그 시절을 회상하며 말했다. “커피는 아주 독하고 진했고요.” 그가 덧붙인다. 

오늘날 로테르담은 네덜란드의 다른 도시와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성장했으며, 잘 계획된 도시 재생 산업의 선구자로 거듭났다. 진화의 시작은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테르담은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세계 주요 도시 96개의 네트워크 C40 시티즈(C40 Cities)에 가입했다. 이들은 탄소 중립(Net-Zero) 빌딩을 짓거나 도시의 그린 구간을 늘리는(후자는 보행자에게 우호적인 정책 도입이나 무공해 버스 구입 같은) 방식으로 환경오염을 배제한 강력한 대응책에 주력했다. 나아가 2019년 로테르담은 환경보호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할 것을 결의하며, 탄소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29년까지 반으로 줄이겠다는 기후협약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목표 달성을 위해 로테르담은 여러 혁신 정책을 도입했다. 녹색 공간에 투자하고 스마트 디자인을 장려하며 M4H처럼 버려진 공간에서는 가치를 창출하려는 데 매진했다. 

 

스히블록 빌딩과 과거 호프플레인 철도역으로 사용하던 공간을 연결하는 보행자 육교 뤼흐칭얼.

M4H 공원은 판 리스하우트가 야심 차게 계획한 문화 놀이터의 일부다. 기획 단계부터 예술인 커뮤니티를 염두에 두고 조성한 지역 브뤼튀스(Brutus) 역시 마찬가지다. 판 리스하우트는 내게 자신의 현재 작업실 위와 옆으로 자리하게 될 거주용 건물 3곳의 축소 모델을 보여주었다. 합리적인 가격에 임대할 수 있는 스튜디오와 탁 트인 옥외 극장을 비롯해 야외 공간을 적극 활용한 장소가 될 것이다. 그는 이 프로젝트가 이미 큰 관심을 끌고 있으며 자신의 스튜디오를 통해 다른 도시와 연계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추진 중이라고 귀띔했다. 2025년 완공 예정인 이 공간은 마커르스 디스트릭트(Makers District)의 중심이 될 것으로 모든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마커르스 디스트릭트는 3D 프린팅 작가, 가구 디자이너, 그리고 이곳에 자리 잡을 수많은 크리에이터를 칭하는 단어다. 2015년에는 로테르담 혁신 지구로 인정받아 과거 조선소였던 버려진 공간을 되살려 산업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이곳에서는 에너지, 건설을 비롯한 다양한 영역에서 지속가능할 수 있는 해법을 탐구한다. 

판 리스하우트는 나를 자전거에 태워 투어를 시작했다. 덕분에 아파트 건물만큼 커다란 배에서 알록달록한 망고와 파파야를 궤짝째 내리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세계에서 최초의 시도일 것이라는 농장, 플로팅 팜(Floating Farm)이다. 플로팅 팜은 농업을 위한 땅이 부족한 지역을 위해 고안한 공간 절약 해법이다. 이곳에 도착하자 소 40마리가 하이테크로 관리하는 물 위의 농장에서 풀을 뜯고 있는 진풍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소들은 근처 축구장에서 나온 잔디와 100년 넘은 과일 창고를 맥주 양조장으로 개조한 스타츠하번 브라우에레이(Stadshaven Brouwerij)에서 나온 맥아 찌꺼기로 만든 사료를 먹고 자란다. 판 리스하우트가 매만진 건물터는 모두 아틀리에, 아파트 그리고 코워킹 허브가 될 것이다. “5년 후면 지금 모습을 전혀 알아보지 못할 거예요.” 판 리스하우트가 앞으로 탄생할 스카이라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난해 11월에 개장한 데포 보이만스 판 뵈닝언(Depot Boijmans van Beuningen). 세계에서 최초로 대중에게 문을 연 아트 수장고(Art Storage) 시설이다. 고전 페인팅부터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의 조각품까지 방대한 예술 작품을 아우른다.

로테르담은 변화에 익숙하다. 도시 전체를 잿더미로 만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로테르담은 꾸준히 변화를 거듭해왔다. 마스강(Maas River)을 건너면 다다르는 빌헬미나카더(Wilhelminakade) 지구 역시 마찬가지다. 이곳은 20세기 유럽 노동자들이 홀랜드 아메리카 라인(Holland America Line) 증기선을 타고 미국의 푸르른 땅으로 떠난 역사적인 장소다. 비행기가 대중화하면서 선박은 과거의 영광을 잃었고, 마지막 배를 뉴욕으로 보낸 1971년을 끝으로 운항을 멈췄다. 2000년대 초반까지 이곳을 방문하거나 정착하려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 알바루 시자(Alvaro Siza), 로테르담 출신 렘 콜하스(Rem Koolhaas) 같은 건축가들이 디자인한 고층 빌딩이 들어서며 가장 비싼 거주 지역으로 신분 상승했다. 이곳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해상 사무 공간도 자리 잡고 있다. 지난해부터 운영한 이 건축물은 해수면이 상승해도 물에 가라앉지 않고 함께 떠오른다. 

로테르담은 혁신을 이어가려고 도시의 어떤 공간도 버려지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예전에 종종 방문했던 유리 돔을 씌운 워터 파크는 이제 지속가능한 스타트업을 위한 인큐베이터 ‘블루시티(BlueCity)’라고 불린다. 젊은 사업가들은 블루시티에서 빗물로 맥주를 양조하거나 과일 껍질을 활용해 인조가죽을 만든다. 낡은 미끄럼틀 아래에서는 줌 미팅을 하고, 과거 탈의실로 사용한 공간에서는 커피 찌꺼기를 활용해 버섯 키우기에 한창이다. 몇 블록만 걸으면 전쟁 직후 산업 시설로 쓰였지만, 이제는 여러 PR 에이전시와 건축 사무소가 모여 있는 헷 인뒤스트리헤바우(Het Industriegebouw)가 나온다. 조경 건축 사무소인 LOLA의 공동 설립자 케이스 판 데르 페이컨(Cees van der Veeken)은 도시의 거주성과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탄력 회복성을 강화하기 위해 공원 7곳을 설립할 계획을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사무실을 운영한 지난 15년간 우리는 실현 가능한 계획에 대해 공부해왔죠. 이제 드디어 프로젝트가 현실화하고 있어요!”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펑키한 느낌을 주는 슬라크 로테르담(Slaak Rotterdam)의 로비. M4H 디스트릭트의 스트리트 아트. 맥주를 따르는 카프서 마리아(Kaapse Maria)의 바텐더. 블라크(Blaak) 전철역 근처에 자리한 큐브 하우스의 그래픽한 모습.

다음 날 아침, 나는 호박 넝쿨과 블랙베리 덩굴이 우거진 도심의 한 농장을 방문했다. 발 주변에서는 닭들이 음식물을 쪼고 있었고, 나무로 만든 벌집에서는 꿀벌들이 윙윙거렸다.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만 아니었다면 내가 어린 시절 자란 전원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자칭 ‘로테르담의 옥상 여신’으로 통하는 옥상 산책로 안내자 에스터르 비네서(Esther Wienese)가 스히블록(Schieblock) 꼭대기 층에 위치한 도시 농장으로 나를 이끌었다. 비네서는 도시의 지반만이 발전을 이루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내게 보여주고 싶어 했다. 전쟁 후 급격하게 진행된 재건 사업은 로테르담에 1860만 m²(약 2억 ft²)의 편평한 옥상 공간을 남겼다. 이 지붕은 심한 폭우를 감당할 수 없었고, 여름에는 열섬 현상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물과 열을 흡수하고 도시의 생물 다양성을 증가시키는 그린 옥상은 이 난제에 대한 해답이었다. 비네서의 설명에 따르면 그린 옥상의 이로움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그는 정신적 웰빙, 대기오염 감소 같은 효과에 대해서도 열변을 토했다. 나아가 도시의 사회적 공간 역할까지 소화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앞으로 10년 안에 셋 중 둘은 도시에서 생활하게 될 거라는 최근의 유엔 보고서를 떠올리면 아주 중요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비네서는 앞으로 M4H 지구 내 전자 기기 공장 위에 건립할 조립식 주택 마을의 예상 도면도 보여줬다. 

우리는 스히블록 빌딩과 과거 호프플레인(Hofplein) 철도역 건물을 연결하는 보행자 육교 뤼흐칭얼(Luchtsingel)을 따라 걸었다. 젠지와 은퇴한 사람들이 옥상 과수원에서 관목류와 사과나무를 돌보고 있었다. 비네서는 이 자원봉사 자리를 얻으려고 몇 달씩 대기한다고 알려줬다. 1.6km를 훌쩍 넘는 과수원에서 튀어나온 고가 다리는 아직 아스팔트에 뒤덮여 있지만, 곧 뉴욕의 하이라인 파크처럼 변모해 빗물 저장고 겸 도시 동물의 안식처 기능을 할 것이다. 골목골목을 돌 때마다 나는 로테르담 재생 사업의 근간이 된 “Niet lullen maar poetsen”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대강 번역하자면 “그만 떠벌리고 청소해라”, 즉 말보다 행동이라는 의미다. 진보적이면서 솔직한 이 도시는 단순히 사는 곳이 아니라 살면서 지켜야 할 철학을 품고 있다. 


WHERE TO EAT

HEROINE RESTAURANT&BAR
헷 인뒤스트리헤바우 1층에 위치한 레스토랑&바. 임스 와이어 체어와 네덜란드의 예술 그룹 로트한전(Rotganzen)이 만든 녹은 디스코 볼로 장식한 1970년대 분위기를 풍기는 공간이다. 타이바질과 그릴에 구운 복숭아, 노란 비트를 곁들인 호로호로새 요리 등 채소 중심의 식단을 체험할 수 있다.
2인 저녁 식사 $136 정도. www.restaurantheroine.nl 

MECCA
크루아상, 초콜릿 타히니 바브카, 플랏 화이트, 카슈미르 차이를 맛볼 수 있다. 골목 구석에 위치한 이 카페는 요즘 가장 핫한 노르트(Noord) 지역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점심 메뉴는 팔라펠 피타, 후무스 딥, 파투시 샐러드를 비롯한 중동 음식 위주로 구성되었는데, 노르트를 찾는 젊은 층과 동네 거주 이민자의 입맛을 모두 만족시키기 위함이다.
2인 점심 식사 $20 정도. www.meccarotterdam.nl

BITTER
M4H 지구에 자리한 이 식당은 놀랍게도 한때 사창가였다. 이곳에서는 ‘컨퓨전 퀴진(Confusion Cuisine)’이라는 알쏭달쏭한 메뉴를 선보이는데, 셀러리악으로 만든 관자와 토마토를 곁들인 비트 타르트, 올리브 캐러멜 등으로 구성된 요리다. 저녁 식사 시간이 마감되면 일렉트로 나이트클럽 BIT로 변신한다.
2인 저녁 식사 $75 정도. www.bit-ter.nl

KAAPSE MARIA
로테르담은 원래 탭하우스와 인디 브루어리로 가득하지만, 로컬 크래프트 브루어리인 카프서 브라우어르스(Kaapse Brouwers)의 두 번째 매장인 카프서 마리아는 그중 최고로 꼽힌다. 24 IPA, 스타우트, 필스너 등을 탭에서 바로 받아 신선하게 마실 수 있다. 수제 맥주가 취향이 아니라고? 이곳의 내추럴 와인 리스트 역시 훌륭하기로 유명하니 걱정하지 말자.
www.kaapsebrouwers.n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