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의 인사이트와 소비 트렌드를 전달하는 <트렌드 코리아> 2023년 버전에서 패션 키워드와의 접점을 찾았다. ‘래빗 점프’로 귀결되는 키워드 속 소비, 문화, 관계, 그리고 패션.

Redistribution of the Average | 평균 실종

최근 패션 트렌드의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다. 특히 경기 침체 속에서 소득 불평등으로 인한 빈부격차가 심해지면서 소비 양극화 현상은 더 뚜렷해졌다. 이왕 살 거라면 가치 있는 명품에 투자하겠다는 소비 전략을 내세우는 사람이 많아졌고, 해마다 해외여행을 떠나던 사람들이 팬데믹으로 발이 묶이자 명품 매장에서 보복 쇼핑을 즐기기도 했다. 이와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들은 합리적인 가격으로 마음에 만족을 주는 소비 형태를 추구한다. H&M이나 자라 같은 SPA 브랜드를 이용하거나, 인스타그램에 감성적인 사진과 함께 노출된 아이템을 보고 즉시 구입하기도 한다.

Arrival of a New Office Culture | 오피스 빅뱅

코로나 탓에 재택근무를 실시해온 많은 기업이 최근 엔데믹 시대로 접어든 듯한 양상을 보이자 오피스 업무로의 복귀를 서두르고 있다. 그 때문에 지난 3년간 불티나게 팔리던 스포츠웨어와 라운지웨어 등 원마일웨어에 대한 관심은 다소 잦아들 듯하다. 그 대신 코로나를 관통하며 억눌린 마음을 보상받을 수 있는 새로운 쇼핑의 탈출구가 나와줄 것으로 기대한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원마일웨어를 오피스 룩으로 활용하는 믹스매치 스타일은 애프터 코로나 시대를 대하는 바람직한 자세다.

Born Picky, Cherrysumer | 체리슈머

체리슈머는 체리피커(Cherry Picker)와 소비자(Consumer)의 합성어로, ‘한정된 자원 속에서 전략적인 소비를 함으로써 최대한 만족을 이끌어내는 실속형 소비자’를 일컫는다. 브랜드 공식 홈페이지보다 공동구매로 비용을 줄인 플랫폼을 이용하고, 교환이나 환불이 보장되는 아이템을 구입하며, 작은 명품 머리핀 하나에 비싼 명품 가방을 산 것 같은 만족감을 얻는 소비 형태. 기업에서는 체리슈머를 공략하려고 다양한 마케팅 전략을 내세운다. 패션계에서 스몰 럭셔리보다 더 작은 단위인 타이니 럭셔리 상품을 소개하고, 뷰티업계에서 샘플이나 트라이얼 키트의 판매를 높여 고객의 이탈을 막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경기 불황이 계속되는 지금이야말로 기업과 소비자 간 진정으로 상생을 꾀할 때. ‘무지출 챌린지’처럼 과도한 행동만 자제한다면, 불황 관리형 매너 소비로 지난한 경기 침체를 견딜 수 있을 것.

 

Irresistible! | 뉴디맨드 전략

뉴디맨드 전략은 ‘사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대체 불가능한 상품을 개발해 수요를 창출하는 방법’이다. 비슷비슷한 제품이 쏟아져 나와 선택을 어렵게 하는 ‘상품 과잉의 시대’에 소비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즐거움을 주는 제품이어야 지갑을 연다는 것. 대표적으로 유일무이한 아이코닉 신발 메종 마르지엘라의 타비 슈즈나 올림피아 르탱에서만 볼 수 있는 예술적인 자수 장식의 북 백, 최근에 인스타그램을 강타한 패션 디자이너 피펜코의 털북숭이 선글라스처럼 말이다.

Buddies with a Purpose | 인덱스 관계

SNS를 비롯해 새로운 관계를 맺어준 온라인은 셧다운 기간 중 유일하게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창구였다. 내가 원할 때 관계를 맺고 끊을 수 있는 구조로 모든 관계가 자기중심성을 띠지만, 그렇기에 서로 부담 없는 선에서 관계를 깔끔하게 관리할 수 있다. 이들은 메신저의 오픈 채팅을 통해 취향이 같은 사람을 모으고 정보를 공유하며 랜덤으로 만남을 즐기기도 한다. 실제로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에 ‘패션’이라는 키워드를 입력하면, ‘스트리트 룩 마니아’ ‘웜톤 스타일 모여라’ ‘빈티지 정보 공유방’ 등 다양한 정보와 만남을 안내하는 채팅방이 즐비하다.

Thorough Enjoyment | 디깅 모멘텀

디깅은 관심 있는 분야에 깊게 파고들어 몰입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XX에 진심인 사람’이라는 표현이나 ‘과몰입러’라는 단어는 프로 디깅러에게 훈장처럼 주어지는 애칭이다. 가장 흔한 몰입 대상으로는 가수나 아이돌 같은 인물이기도 하고, 디즈니나 어벤저스 등과 같이 캐릭터이기도 하며, 이른바 힙하다는 브랜드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패션 브랜드가 앞다투어 컬래버레이션을 선보이는 것도 디깅하는 덕후를 브랜드의 고객으로 유치하기 위함이다. 최근에는 아더에러와 컨버스가 협업한 신발이 오픈런으로 이어졌으며, 지방시와 디즈니, 왁과 키티, 듀베티카와 아바타 등 컬래버레이션이 디깅러를 열광시켰다.

 

Jumbly Alpha Generation | 알파세대가 온다

알파세대는 2010년부터 2024년 사이 출생자로, 태어나면서부터 디지털 기기와 함께 생활하는 진정한 의미의 디지털 원주민을 뜻한다. 이들은 Z세대 이후의 세대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종족이라고 정의되는데, 온라인 쇼핑에 매우 익숙하고, 가상 세계에도 친숙해 줌이나 로블록스 등을 통해 물리적 거리의 한계를 극복한다. 또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나’라는 가치관과 저출산으로 인한 자기중심적 성향이 강해 모두가 열광하는 트렌드를 좇기보다는 자신에게 정확하게 들어맞는 키워드를 찾으려는 욕구가 강하다. 이런 세대를 타깃으로 발전의 속도를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다음에 소개할 선제적 대응 기술이다.

Unveiling Proactive Technology | 선제적 대응 기술

고객 데이터를 AI로 분석해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필요한 서비스를 먼저 제공하는 선제적 대응 기술은 패션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내 패션 취향을 분석해 쇼핑 리스트를 제공하는 플랫폼이 바로 그것. 대표적으로 인스타그램은 평소 유저가 하트를 누른 품목을 구분해 쇼핑 숍 카테고리에 모아주는데, 구매를 원할 때는 바로 구매 가능 사이트로 연동돼 편리하게 쇼핑할 수 있다. 또 지난해 네이버가 투자해 화제가 된 온더룩은 이용자 취향을 분석해 적합한 패션 크리에이터를 추천하는 모바일 플랫폼으로, 네이버 스마트스토어와 온더룩 서비스를 연동, 패션 콘텐츠를 감상하고 관련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

 

Magic of Real Spaces | 공간력

사람을 모으고 머물게 하는 공간의 힘을 일컬어 ‘공간력’이라고 한다. 이는 브랜드의 가치를 알리고 고객과 소통하는 미디어로서의 역할을 하는데, 요즘은 그 임무를 상당 부분 메타버스 속 가상 세계에서 담당한다. 구찌는 가장 먼저 메타버스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브랜드로 알려졌다. 제페토 월드맵에서 운영한 스토어가 흥행한 데 이어 최근에는 구찌 코스모고니 버추얼 팝업 스토어를 개최해 특별한 게임 요소와 함께 다양한 셀렉션을 만나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H&M은 로블록스와 협력해 플레이어가 게임 중간에 스타일링 수업에 참가하고 다양한 패션 소재를 수집해 패션 아이템을 제작하도록 하는 서비스를 제공해 알파세대의 흥미를 이끌어냈다. 또 나이키는 ‘이런 곳에 스토어 오픈이 가능할까’ 싶은 독특한 장소에 팝업을 열어 관심을 모았다. 에베레스트산 정상에 오픈한 하얀 큐브 모양 스토어, 자크뮈스와 함께 꾸흑슈벨 지역에 오픈한 곡선형 스토어가 그것. 이는 모두 AI가 구현한 가상 공간인데, 실내 디자인도 디테일하게 만들어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을 들게 한다. 불가능이 없는 나이키의 ‘Just Do It’ 정신을 다시 한번 일깨우는 공간이기도 하다.

The Neverland Syndrome | 네버랜드 신드롬

뮤지션 해리 스타일스는 키치한 주얼리 애호가다. 컬러풀한 원석으로 만든 목걸이며 팔찌를 주렁주렁 걸치고 동심을 불러일으키는 키치한 패션을 즐긴다. 이는 온통 핑크로 장식한 지미추 콘셉트 카페에서 인형이 된 듯 핑크를 향유하는 어른과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다. 젊은 취향을 공유하고 자신만의 방식대로 행복을 추구하며 틀에 갇힌 어른이기를 거부하는 요즘 사람들. 동안 외모를 지니기 위해 자기 관리를 하고, 키치한 아이템을 컬렉팅하며, 골프도 명랑하게 아이들처럼 재미있게 노는 현상, 네버랜드 신드롬. 모두가 젊어지고 싶어 하는 이 현상은 나이가 따로 없는 패션과 함께 지속적으로 진화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