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한 꿈을 꾸게 하는 환상적인 발레코어 트렌드.

ISSEY MIYAKE

LVMH에서 출자한 패션 검색 엔진 ‘리스트(Lyst)’는 유저 2억여 명이 1년 동안 사용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해를 결산하는 리포트를 공개한다. 리스트가 선정한 2022년 최고의 브랜드는 전년 대비 검색량이 34% 증가한 미우미우. 특히 발레 플랫은 세대 불문 머스트해브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사람들은 예쁜 새틴 슈즈에 어울리는 아이템을 찾았고, 자연스럽게 발레 의상까지 관심이 확장됐다. 유행에 민감한 젠지의 코어(Core) 트렌드로, 키워드 ‘발레코어’는 틱톡에서 조회수 2300만 이상을 기록하며 현재도 상승세를 이어가는 중이다. 발레 토슈즈에 도톰한 캐시미어 삭스를 신은 발을 밀어넣고 시어한 드레스를 매치한 틱토커를 보고 있자니 마음속 꼭꼭 숨겨온 소녀가 기다렸다는 듯 욕망을 풀어낸다. 불현듯 19년 전 친구들과 삼삼오오 러시아 벨라루스 국립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 내한 공연을 보러 간 날이 떠오른다.

2시간가량 열린 환상적인 공연이 금세 끝나고 진눈깨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들뜬 소녀들은 저마다의 황홀감을 재잘재잘 내놓았더랬다. 돌이켜보면 미래가 캄캄하던 그 시절, 무심코 내던진 감상평이 오늘날의 복선이 되지 않았나 싶다. 촉촉한 눈망울로 러브 스토리에 찬사를 늘어놓던 친구는 사랑받는 와이프가 됐고, 무대 장치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던 친구는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발레단에 뛰어들어 함께 춤추고 싶다던 친구는 무용수가, 튀튀의 눈부심에 정신을 놓았던 난 패션 에디터가 된 걸로 보아. 수많은 이들의 ‘피땀 눈물’이 고스란히 맺힌 무대는 관중의 꿈에 심폐 소생술을, 발레리나의 몸짓은 경이로운 쾌감과 자유를 선사한다. 발레가 환상을 좇는 패션 디자이너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어온 까닭. 이제 발레코어, 새로운 세대를 사로잡은 패션 트렌드로 소개한다.

 

공연은 시대와 분야를 불문하고 벅찬 감정을 선사한다. 그래서 과거 러시아 극장가엔 발레토마니아가, 오늘날엔 아이돌 팬덤 군단이 생겼다. 미우미우 플랫이 발레코어 트렌드 시발점이라면 스타일링 지침서가 된 인물이 블랙핑크 제니다. 지난 연말 <BORN PINK> 월드 투어에서 그의 솔로 ‘유앤미’ 무대는 블링이들뿐 아니라 외신에서 뜨겁게 회자됐다. 전 세계를 오가며 발레코어 룩 수십 벌을 끊임없이 선보인 이유다. 발레리나처럼 머리를 올려 묶고 빈티지 코르셋 톱, 마이크로 러플 스커트, 애슬레저 브리프, 레그 워머를 매치한 제니는 달빛 아래 춤추는 요정처럼 등장한다. 케이팝 공연에 발레의 요소를 가미한 의상이 찰떡궁합을 이뤄 글로벌 팬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몸의 움직임을 최상으로 보여주고자 고안한 무용복 변천사와 귀결된다. 여기서 잠깐, 14세기 후반 이탈리아의 궁정 연회에서 첫 등장한 발레복은 발이 보이지 않도록 길고 무용수는 모두 남성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여성의 역할까지 남성 무용수가 연기했기에 자연스레 화려한 가발과 장신구가 필요했다. 1718년에 이르러서야 직업적 예술로 발전하며 테크니컬한 동작에 방해되는 장식을 걷어내고 둥근 테를 넣어 활짝 펼친 스커트, 페니어가 등장했다. 하지만 당시 생경하고 기묘한 실루엣 탓에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고. 오늘날 발레 의상은 포인트 기법인 ‘쉬르 레 푸엥트(Sur Les Pointes)’ 동작을 주로 선보이던 18세기 프랑스의 여성 무용수 마리 카마르고에 의해 완성체가 된다. 낭만 발레의 고난도 테크닉을 완성하기 위해 가슴과 목을 드러내며 몸에 꼭 끼는 보디스와 굽이 높은 하이힐 대신 뒷굽이 낮은 토슈즈를 고안했다. 또 오늘날 클래식 튀튀의 원형인 짧은 스커트에 연분홍색 발레 타이츠를 착용하며 부드러운 움직임을 표현했다.

이렇듯 발레 의상은 테크닉이 발전함에 따라 함께 진화했다. 의상이 몸의 일부가 되어야 각 동작이 최대한 부각되는 효과를 발휘하니까. 가볍고 편안하며 최상의 착용감을 선사하는 발레복, 무대 위 아티스트의 온듀티(On-duty) 스타일로만 감상하기 아깝지 않은가. 직접 즐길 차례다. 릴리로즈 뎁, 클로이 모레츠, 헤일리 비버 등 전 세계 셀러브리티의 오프듀티(Off-duty) 룩을 살펴보자. 민낯에 부스스한 머리지만 부드럽고 탄탄한 보디에 착 붙는 레오타드를 입고 무심한 듯 니트 카디건을 허리에 맨 그들은 세상 누구보다 멋지다. 스포츠 삭스에 발레리나 슈즈를 신거나 폭신한 레그 워머에 스포츠 스니커즈를 신거나 각자 취향대로 하면 된다. 마치 달달한 사탕 물에 빠진 1970년대 디스코 에어로빅 룩 같기도 하다. 남보다 앞서 유행을 시행하는 이가 동안 소리를 듣는 것처럼, 발레를 만난 애슬레저 룩도 ‘쎈 언니’에서 여리여리한 소녀로 역주행하는 건지도. ‘연핑크 랩 스웨터를 살까? 데이트용 튤 스커트를 먼저 살까? 날이 추우니 캐시미어 니트 레깅스부터, 아! 레오타드랑 워머도 사야지.’ 기분 좋은 쇼핑 계획을 세우다 힌트를 얻으러 이세이 미야케 2023 봄/여름 패션쇼를 돌려 본다. 지난해 8월 세상을 떠난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에게 헌정하는 추모 공연이 이어지는 그 장면을. 하우스 특유의 입체적인 질감을 선사하는 살색 드레스를 입은 무용수들이 등장해 그가 생전에 좋아하던 춤을 춘다. 핫초코로 당을 채우며 사무실에 갇힌 마감 중 에디터에게 그들의 몸짓은 모니터 앞자리도 천국으로 만든다. 예술은 이토록 마법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