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이 된 후 줄곧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온 제니퍼 애니스톤의 인기에는 항상 대중의 눈총이 동반됐다. 53세가 된 지금, 애니스톤은 숨겨왔던 개인적인 후회와 상처에 대해 솔직하게 고백한다.

구찌 스프링 1997 로고 G-string은 엘 시세르 빈티지에서 제공. 스커트는 생로랑(Saint Laurent).

드레스는 에이슬링 캠프스(Aisling Camps).

‘친근한 옆집 소녀’를 만나기 위해 웨스턴 로스앤젤레스 언덕에 우뚝 솟은 집으로 향했다. ‘Girl Next Door’는 제니퍼 애니스톤을 평생 따라다니던 수식어다. 1990년대부터 관용적으로 사용된 이 표현은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편안하고 친근한 이미지의 여배우에게 주어지는 수식어였다. 하지만 수식어가 무색하게 제니퍼가 사는 동네는 뚫을 수 없는 철문과 무성한 울타리에 둘러싸인 요새 같아 감히 접근하기 쉽지 않아 보였다.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게이트 문이 서서히 열리면서 자동차 전시장 버금가는 화려한 차고가 나타났다. 물이 흘러내리는 분수와 잘 다듬어진 나무, 500피트나 되는 높은 현관 입구를 둘러보는데 갑자기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곧바로 개를 꾸짖는 익숙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며 현관문이 열린다. 찢어진 청바지, 탱크톱 차림에 맨발로 마중을 나온 애니스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대저택의 주인이 아니라 여행을 와 며칠 신세를 지게 된 천진난만한 친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하게 맞이해주는 그녀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차분한 느낌의 아트 갤러리 같았고 치자 꽃향기로 가득했다. “제가 지금 좀 정신이 없어서 죄송해요”라며 그녀는 차분하게 부엌으로 향한다. “막 골치 아픈 일이 생겨서요.”  현재 그녀는 <더 모닝쇼> 시즌 3을 촬영 중이다. “중요한 인터뷰 신이 있는데 외워야 할 대사 분량이 꽤 남아 있다는 걸 좀 전에 알게 됐거든요.”

나는 “그럼 이 인터뷰는 일종의 드라이 리허설이라고 생각하시죠”라고 제안했다.
“네, 드라이 리허설, 맞아요. 일종의 드라이 리허설이네요.” 한번 한 말을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은 애니스톤만의 특이한 버릇이다. 혼잣말을 곱씹어보는 그를 보고 있자니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교수님 같기도, 음흉한 계획을 세우는 친구 같기도 하다.
이내 생각을 떨쳐내고 다시 밝은 어투로 돌아온 그녀가 말한다. “셰이크 드실래요? 저는 한잔 마시려고요.” 제니퍼 애니스톤이 직접 만들어주는 홈메이드 셰이크를 언제 먹어보겠나 싶어 냉큼 고맙다고 대답했다.
“좋아요. 셰이크 두 잔 곧 대령합니다. 한번 만들어볼까요”라며 그는 부엌 아일랜드에 기대 각종 재료를 꺼낸다. 냉장고와 수납장을 왔다 갔다 하며, 각종 파우더, 견과류, 바나나 등을 꺼내는 동안 초콜릿 셰이크가 괜찮은지 묻는다. “네 괜찮아요, 하지만 저는 베지테리언이라 베이컨만 빼주세요.”
“하! 베이컨은 그럼 뺄게요. 베이컨은 빼야지. 베이컨은 빼야지”라며 그가 다시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믹서에 갈게요. 잠시만요” 하며 재료를 믹서 넣고 돌리자 그의 반려견이 소리에 놀라 다시 짖기 시작한다. 높은 잔에 스무디를 가득 채우며 “단 걸 좋아하는지 모르겠네요”라고 말한다. “치어스!” 건배를 한다.
잔을 들고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벽에 걸린 아트피스와 천장까지 이어지는 높은 창문은 그녀의 세련된 취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하지만 한편에는 반려견 침대, 슬립 커버로 덮어놓은 대형 소파가 있어 캐주얼한 분위기도 공존한다. 제니퍼는 컵받침 없이 잔을 들고 캐주얼하게 바닥에 그대로 앉는다.

애니스톤 집을 방문하기 앞서 다른 에디터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었다. 오늘 제니퍼 애니스톤과 인터뷰가 잡혀 있는데 무슨 말을 할지 조언을 구하자 이렇게 답장이 왔다. “애니스톤만큼 유명한 사람은 이제 나오기 힘들 거야. 당대 최고의 인기 스타로 이렇게 오랫동안 뜨거운 인기를 누리는 건 요즘 세상에서는 불가능하지. 틱톡으로 반짝 인기를 얻는 요즘 세대와는 차원이 다른 영화배우라고 보면 돼.”
내가 받은 문자를 그녀에게 읽어주자 “갑자기 소름이 돋네요.”라고 답한다. “갑자기 울컥하는 감정이 들어요. 예전의 화려했던 시대가 저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무비스타’가 점차 사라지는 것 같고 영화계의 화려함도 시들어가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오스카 시상식 파티도 정말 재밌었는데…”라며 그녀는 잠시 상념에 잠긴다.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눈에 들어오는 게 하나 있다. 제니퍼 애니스톤이 점차 스크린에서 모습을 감추면 (당장은 건재한 그에게는 아주 먼 미래가 될 것이다. 현재 두 편의 영화가 개봉 예정이고 <더 모닝쇼>도 시즌3까지 제작 중이니까) 그의 영향력도 줄어들 수 있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그의 머리카락만큼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을 것 같다. 제니퍼 애니스톤의 작품만큼 유명한 건 그녀의 전매특허 머리색이기 때문이다. <프렌즈> 드라마를 떠올리면 곧바로 애니스톤의 머리카락이 생각날 정도니까. 고개를 돌릴 때 빛을 받아 황금빛을 띠는 그녀의 오묘한 머리색이 시선을 붙잡는다. 일 년 전쯤 애니스톤은 롤라비(LolaVie) 헤어 케어 라인을 출시하며, 단순하지만 야심 찬 목표를 밝혔다. 그의 목표는 “환경친화적이면서 동시에 머릿결에도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 해로운 화학물질은 배제한 채 성능은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코트는 마그다 부트림(Magda Butrym). 보디슈트는 갈반(Galvan). 메이크업은 볼루미너스 느와르 밤 워셔블 마스카라와 글로우 파라다이스 립&칙 틴트 핑크 세레니티, 인펄리블 8HR 프로 립 글로스 인 블러시 제품을 사용해 연출했다. 모두 로레알 파리(L’Oreal Paris) 제품.

“저는 소셜미디어가 싫어요.” 갑작스럽게 그가 고백한다.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니 “제가 SNS에는 소질이 없어요”라고 덧붙인다. 모두 알다시피 애니스톤은 약 3년 전 인스타그램에 가입했다. 그가 아이디를 만들고 <프렌즈> 출연진과 찍은 사진 한 장을 올리자마자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순식간에 팔로어가 급증해 인스타가 먹통이 된 적이 있다. 플랫폼 자체를 마비시킬 능력을 가지고도 ‘소질이 없다’는 건 지나친 겸손 아닌가.

“인스타그램을 운영하는 건 고역이었어요. 제 계정을 오픈한 유일한 이유는 제가 출시한 헤어 케어 라인을 홍보하기 위해서였죠. 출시를 앞두고 팬데믹이 터져서 계획이 무산됐어요. 제품 출시는 취소됐는데. 인스타그램만 살아 있게 된 거죠. 저는 소셜미디어에 익숙하지 않아요.”
애니스톤은 청소년기와 20대를 소셜미디어 없이 보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낀다고 한다. “인터넷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죠. 사람들이 서로 더 쉽게 연결되고 네트워킹을 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하지만 어린 소녀들은 타인과 비교하면서 깊은 좌절감을 느끼잖아요. 저는 20대, 30대, 40대 중반 때보다 지금 저 자신이 더 만족스러워요. 스스로를 비난하고 자책하는 건 그만두어야 해요.” 그녀가 덧붙인 이 말은 마치 미래의 자신에게 미리 당부하는 듯하다. 그의 목소리 톤에서 한 단계 더 깊은 인생에 대한 통찰이 엿보인다.

“30~40대 후반에 접어들었을 때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많았어요. 하지만 그런 일을 겪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겪은 힘든 일도 내적 성장에 도움이 되는 감사한 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말한다. 만약 일련의 사건이 없다면 아직도 상대가 누구인지 확실히 모른 채 초조함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애니스톤은 스무디의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며 반려견을 쓰다듬는다. “이제는 다 상관없어요”라는 그의 말에서 결연함이 느껴진다. 수수께끼 같은 애니스톤의 말에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내 마음을 읽은 듯 그는 꽁꽁 숨겨둔 속사정을 얘기한다.
“임신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아이를 낳는 일은 제게 정말 힘든 여정이었죠”라며 몇 년 전 일을 어렵게 고백한다. 뜻밖의 고백에 할 말을 찾다가 이렇게 말해버렸다. “전혀 몰랐네요.”

“네, 아무도 몰라요”라며 다행히도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이어간다. “수년간 제 임신을 둘러싸고 각종 추측성 기사가 난무했죠…. 너무 힘들었어요. 시험관 시술은 물론, 임신에 좋다는 중국차는 모조리 마셔봤어요.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죠. 누군가가 제게 “난자를 얼려. 나중에 훨씬 수월해”라고 말했다면 그렇게 했을 거예요. 하지만 과거의 저는 그런 생각을 못했죠.”

“후회는 하지 않아요”라고 그가 말했다. “‘혹시 내가?’ ‘만약에?’ ‘어쩌면?’ 이런 생각이 완전히 없어졌기 때문에 약간의 안도감을 느끼기도 해요. 이제는 이 문제에 관해서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과거 애니스톤 임신을 둘러싸고 미디어는 소란스러웠다. 그가 아이를 갖지 않을 것이라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장식한 기사는 무수히 많았다. 2세에 전혀 관심이 없거나 스타로 남기 위해서 등등 여러 추측을 제멋대로 나열한 기사가 수없이 재생산됐다. 그가 ‘이기적’이라는 미디어의 시선은 난임이라는 개인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었다. “커리어에 목숨을 걸었다는 말, 성공한 여자에게 아이 부양은 당치 않다는 시선, 그리고 남편이 저를 떠나고 제 결혼 생활이 파탄이 난 이유가 제가 아이를 낳아주지 않아서라는 추측 모두 거짓말이에요. 이제는 숨길 필요도 없어요.”

애니스톤의 얘기를 듣고 갑자기 가판대에 진열되어 있던 타블로이드 잡지가 뇌리를 스친다. ‘배가 불룩해진 제니퍼 애니스톤’ 등 자극적인 제목을 크게 프린트한 잡지 표지(<얼루어>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 모두 마치 그의 자궁에서 일어나는 세포분열에 대해 알 권리가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우리가 심심풀이로 소비한 이 사안은 당사자에게는 큰 문제였음에도 조금의 죄책감도 가지지 않았다.
“너무 화가 났어요. 그래서 2016년에는 <허핑턴포스트>에 여성의 임신을 둘러싼 미디어의 광기 어린 집착과 여성에 대한 부조리한 태도를 지적하기 위해 사설을 기고하기도 했죠. 제 임신 여부를 둘러싸고 미디어가 보이는 광적인 태도를 꼬집고 싶었어요. 저도 이런 일로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인간이니까요”라고 그가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톱과 스커트는 켈라 델 마르(Calle Del Mar). 귀고리는 제니 버드(Jenny Bird), 반지는 MAM. 반지는 타바예르(Tabayer). 메이크업은 롱웨어 크림 아이 펜슬 느와르, 사우스바운드 틴티드 모이스처라이저 블러쉬, 하이드레이팅 립밤을 사용해 연출했다. 모두 로라 메르시에(Laura Mercier) 제품.

브라톱은 이사 볼더(Isa Boulder), 하의는 발망(Balmain). 반지는 그레이스 리(Grace Lee), 디올 스프링 2003 로고 벨트는 엘 시세르 빈티지에서 제공.

어린 시절에 대해 물어보려던 찰나 애니스톤이 먼저 “이혼이 엄마를 완전히 망가뜨렸어요”라며 얘기를 꺼낸다. “엄마가 젊었을 때는 ‘상담을 받아보는 건 어때?’ ‘누군가에게 얘기해보는 건 어때?’ ‘정신과 약을 소량만 복용해보는 건 어때?’ 등의 조언이 흔하지 않았죠. 타인의 도움 없이 눈물을 머금고 아이의 손을 잡은 채 꿋꿋하게 아무 일도 없는 척 견뎌야 했어요.”
“엄마는 이미 용서했어요”라고 애니스톤은 가정사에 대한 말을 이어간다. “아버지도 용서했어요. 제 가족을 모두 용서했어요.” (그는 오랫동안 어머니와 연을 끊었다.)
가족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용서를 해본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나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 자신에게 거짓말하는 건 아닌지 돌아보자.
“용서하는 건 중요해요. 누군가에 대해 적대감, 분노를 갖는 건 나 자신에게 해로워요. 지나간 일을 놓지 못하는 엄마를 지켜보면서 깨달았죠. 그 당시에 엄마에게 이렇게 말한 게 생각나네요. ‘내가 절대 되면 안 되는 모습을 보여줘서 감사해요’라고 했죠. 인생의 어두운 순간, 행복하지 않은 순간도 배움의 순간으로 소중히 여겨야 해요.”

부모님의 이혼은 그가 집을 떠나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집에 있는 게 즐겁지 않았죠”라고 그는 회상하면서 뉴욕에 있던 아파트를 떠났을 때 “굉장히 설렜어요”라고 말했다. 뉴욕 라구아디아 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애니스톤은 어퍼 웨스트사이드에 있던 잭슨 홀 다이너에서 서빙을 하고 링컨 센터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도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당시에는 남은 아이스크림이 있으면 셰이크로 만들어 먹고는 했다고. “버리면 아깝잖아요. 당시에는 지금보다 통통했어요.” 그 후 캘리포니아로 이사한 그녀는 1989년 여름에 처음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날이 바로 엊그제 같다고 회상한다. “로렐 캐니언에서 열린 파티에 우연히 참석했어요.” 한 여자가 자기들이 운영하는 서클 모임에 함께 가길 권유했고, 속으로 ‘서클? 그게 뭔데?’ 하고 반신반의하며 따라 나섰다고. 모임 장소 입구에서 여자들은 애니스톤에게 세이지로 축복을 내렸다. 그리고 깃털이 달린 토킹 스틱도 건네주었단다. 사방에 여자들이 둘러싸고 있을 때 처음에 ‘도대체 여긴 어디지? 나 컬트에 들어온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지만 몇 시간 후 수수께끼 같던 모임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차례로 돌아가며 자신의 두려움, 걱정, 생각 등을 솔직하게 공유하는 여성 모임이었다. “여성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될 수 있는지 그때 느꼈어요. 그 후로 이 세계에 완전히 빠져들었죠. 제게는 큰 힘이 됐어요.”

그 당시 서클에 참석한 친구들은 아직까지 애니스톤의 절친들로 남아 있다. 그날 밤 미래에 프로듀싱 파트너가 될 친구를 운명적으로 만났다고 한다. 그의 집 안 곳곳에는 이 여성 친구들과 함께한 사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이킹, 여행을 떠나 밝게 웃으며 찍은 사진을 보면 서로 얼마나 친밀하게 일상을 공유하는지 알 수 있다. <프렌즈>의 팬(팬이 아니더라도 <프렌즈>가 당대 얼마나 큰 문화적 파급력이 있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작년에 방영한 <프렌즈 리유니언>의 화제성을 기억하는지?)이라면 드라마는 친구들과 가족처럼 지내던 시절을 배경 삼고 있음을 알 것이다. 아직도 친구들을 가족으로 생각하는 애니스톤의 경우 삶이 예술을 모방하는지도 모른다.

“고등학생 때 체호프 연극을 한 적이 있어요. 극 내용 자체는 전혀 웃기지 않았는데, 제가 연기를 하니까 유머러스한 연극이 됐죠. 그때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DNA’에 개그 본능이 있는 것 같은데 코미디 쪽으로 진출하는 건 어떠니?’ 그 당시에는 ‘감히? 난 진중한 배우라고!’라는 생각에 선생님의 말에 짜증이 났죠. 하지만 그 후로 코미디가 내 인생을 구했죠. 사람들을 웃게 만들 수 있는 건 제게 큰 위로가 됐어요. <프렌즈>를 보고 암 투병을 견뎌냈다는 시청자의 말을 들으면 이렇게 작은 드라마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힘을 주는지 느끼면서 감사하게 돼요”라고 말하는 애니스톤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다. “그 당시에는 출연자들이 서로를 애정 어린 마음으로 챙긴 것 같아요. 그때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어요. 당시에는 아이폰도 없었기 때문에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얘기를 많이 했죠. 요즘은 사람들이 얼굴 보며 얘기하는 게 흔하지 않죠.”

 

구찌 스프링 1997 로고 G-string은 엘 시세르 빈티지에서 제공. 스커트는 생로랑(Saint Laurent).

집에 돌아와 ‘힘든 하루였어’라며 안길 수 있는 연인이 있다면 행복할 것 같아요.
“다시 결혼할 생각은 있나요?”라는 질문에 “절대 안 된다고 호언장담하기는 어렵지만, 현재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저는 관계에 푹 빠지는 걸 좋아해요. 제 미래가 어떻게 될지 누가 아나요? 때로는 몸을 말고 연인의 품속에 쏙 들어가 ‘지금 위로가 필요해’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도 있어요. 집에 돌아와 ‘힘든 하루였어’라며 안길 수 있는 연인이 있다면 행복할 것 같아요.”

우리의 대화는 더 깊은 주제로 이어졌다. 그가 “어둡고 힘든 시기에서 벗어나 다시 빛을 향해 가는 느낌이 들어요. 오랫동안 미루던 개인적인 숙제를 풀었다고 생각해요. 어릴 때 생긴 아물지 않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었죠. 저는 독립심이 강한 사람이에요. 친밀감은 항상 조금 떨어져 있었죠”라며 그 거리감을 표현하기 위해 팔을 내미는 애니스톤은 “제가 깨달은 건 항상 해결해야 할 숙제는 시간이 지나도 있을 것이란 점이에요. 제 인생은 그런 점에서 항상 진행 중인 과제죠. 정말 다행이에요. 우리 모두 일찍이 삶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면 삶이 얼마나 지루하겠어요.” 어둠의 반대편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그의 비유에 따르면 ‘작은 타일 조각으로 이뤄진 모자이크’다. “삶의 파편이 작은 타일 조각처럼 때로 떨어지고 부서지지만 다시 남은 부분을 붙이면 아름다운 모자이크 작품이 되는 거죠.”

애니스톤을 둘러싼 가십, 수근거림, 쏟아지는 잡지의 자극적인 기사들, 클릭 베이트 등을 떠올려 보았다. 수년간 세상은 그를 향해 돌을 던졌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아름다운 모자이크’를 찾을 수 있는 그가 놀라웠다. 애니스톤의 심리 상담가는 상당한 실력가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모두 때로 무너진다. 하지만 우주의 자비로운 손길로 다시 부서진 날카로운 파편, 결점의 조각을 모아 삶을 예술로 승화할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20대보다 40대에 들어서면 더 강인해지는지도 모르겠다. 우주가 내 모자이크 조각을 붙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니까.
“제게 주어진 이 숙제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연인을 사귀고픈 마음은 없어요. 그건 옳지 않아요”라고 애니스톤이 말한다. “벽이 갖춰지지 않은 집에 들어가기는 싫어요”라는 그의 말에 “지금까지는 벽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나요?”라고 물으니 “네, 끔찍했어요”라고 대답했다.

애니스톤과 함께 집 밖으로 나왔다. 그의 뒷마당은 올리브나무가 무성하게 자란 작은 식물원 같다. 흙길을 따라가면 닭장이 있고 완전히 사생활이 보장되는 곳이다. 본관에서 조금 걸어 나오면 벽면의 90%를 유리로 지은 작은 별장이 있다. “저만의 동굴에 오신 걸 환영해요.” 원래 이 별장은 전남편 저스틴의 사무실이었다(애니스톤과 저스틴 서룩스는 2017년에 이혼했다). “전 남편은 검은색 같은 어두운색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그가 나가고 난 후 “저는 이곳을 더 밝은 공간으로 바꾸기 위해 별장을 발가벗겼어요. 한 번은 전남편이 별장을 보고 ‘도대체 별장에 무슨 짓을 한 거야?’라고 묻더군요. 그래서 제가 ‘다시 빛이 들어올 수 있게 바꿨어, 이 양반아’라고 대답했죠.”

창문 너머로 펼쳐지는 풍경, 아늑한 가구, 공간의 고요한 분위기 덕에 이 별채에 있으면 글을 쓰기 위한 영감이 마구 떠오를 것 같았다. “언젠가는 글을 쓸 거예요”라며 애니스톤이 다짐한다. “’나는 글쓰기는 못해’ 같은 말은 이제 그만하려고 해요.” 별채를 나와 다시 정원으로 향하는 길에 그가 말한다. “지금까지 수년간 시험관 시술을 비밀로 하려고 애썼어요. 제 일상은 거의 항상 노출돼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만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정말 조심했죠. 온전히 저만의 비밀로 남길 수 있는 일이 몇 가지 없거든요. 그런데 세상은 사실이 아닌 스토리를 허구로 만들기도 하니까 내가 차라리 진실을 밝히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죠. 이제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더 이상 숨길 것이 없어요.”

“만약 자신의 인생에 대한 얘기를 적는다면 이 장의 소제목은 어떻게 지을 것 같나요?”라는 물음에 “이 장의 소제목요?”라고 되물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우린 함께 늦은 오후, 뿌연 안개가 낀 로스앤젤레스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대답이 떠오른 듯 애니스톤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날아오르는 불사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