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치코트의 두 얼굴
실용적이면서 멋스럽기까지 해 가을 아이템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는 트렌치코트.
한 세기를 훌쩍 넘는 동안 꾸준히 사랑받는 패션 아이템을 열거하자면 자연히 클래식한 아이템을 꼽을 수밖에 없다. 그중 트렌치코트는 제1차 세계대전 중 군인용 외투에서 유래한 것과 달리 오늘날 우아한 시티 룩의 대명사가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어딘가 쓸쓸한 느낌을 풍기는 코트 자락은 봄보다 가을에 더 잘 어울리는 듯하다. 어릴 적 엄마의 옷장 안에서 ‘바바리 코트’를 꺼내 입고 전신 거울 앞에서 폼 좀 잡던 시절도 대부분 서늘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었다.
엄마의 옷장 안에는 트렌치코트가 여러 벌 걸려 있었다. 모델명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현재 버버리 미드 켄징턴과 유사한 가장 클래식한 디자인의 것과 안감이 체크 패턴으로 돼 있던 개버딘 소재의 낙낙한 트렌치코트를 자주 입었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트렌치코트를 입었을 때 엄마의 모습이다. 엄마는 트렌치코트를 입을 때면 항상 벨트를 질끈 동여맸다(그것부터가 시크!). 대부분 9cm 힐의 펌프스를 신었고, 어느 날은 목에 실키한 스카프를 두르고 또 다른 날에는 니트를 어깨에 둘러 레이어드했다. 레트로한 선글라스까지 머리 위로 걸치고 외출하는 날에는 엄마가 영화에 나오는 여배우처럼 멋있어 보여 오래도록 쳐다보고는 했다. 자연히 몸집이 커지고 엄마 옷을 뺏어 입게 된 순간부터 가장 먼저 입은 것도 트렌치코트다. 성인이 된 후 트렌치코트는 엄마의 필수템을 넘어 내가 애정하는 스타일 아이콘의 가을철 원픽 아이템으로 알았다. 그리고 이 클래식한 아이템이 스타일링에 따라 얼마나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지, 또 소재나 디테일에 따라 어떤 변주가 가능한지도 이때 경험했다.
트렌치코트도 펑키하게 소화하는 케이트 모스, 프렌치 시크에 더한 샤를로트 갱스부르, 그 밖에 커스틴 던스트, 클로에 세비니, 알렉사 청 등. 이를 밑천 삼아 패션 에디터 생활을 하는 동안 트렌치코트를 주제로 참 많은 칼럼을 다뤘다. 그러나 예전부터 지금껏 이번 시즌만큼 트렌치코트가 다양한 변주를 보인 적도 드물다. 견장과 덮개부터 허리 벨트와 소매 벨트를 모두 갖춘 더블 버튼 트렌치코트는 물론, 날렵한 칼라 아래로 일자로 뻗은 싱글 버튼, 그리고 소재와 디테일, 커팅 등을 변형해 보다 다채로워진 디자인까지, 런웨이와 리얼웨이를 막론하고 어느 때보다 다양한 스타일이 포진해 있다.
먼저, 버버리는 트렌치코트의 종주국(?)답게 트렌치코트의 아이덴티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다양한 변주를 시도했다. 트렌치코트 전체에 굵은 메탈 고리를 장식하거나, 견장과 버튼 등 트렌치코트의 특징을 패턴처럼 프린트하고, 코트 전체를 플리츠 주름 장식으로 마무리하는 식이다. 급기야 칼라와 소매를 떼어내고 튜브 톱 드레스를 만들기도 했는데, 벨트와 더블 버튼 등 디테일을 그대로 차용해 트렌치코트의 정신을 잃지 않는 최고의 변신으로 호평받았다. 디올은 여성이 지닌 내밀한 파워와 열정을 트렌치코트에 담았다. 같은 소재로 제작한 뷔스티에를 더한 트렌치코트, 한쪽에 새와 나무를 그려 넣은 트렌치코트는 우아함을 절대 권력으로 여기는 이들의 선택을 받는다.
트렌치코트의 패턴을 해체해 새로운 소재를 조합한 컬렉션은 아크네 스튜디오와 디온 리, 록산다, 토즈 등이다. 허리 부분을 컷아웃한 코페르니와 칼라 부분을 제거하고 오프숄더로 재구성한 메트르 피에르, 칼라 부분을 머리 위로 뒤집어쓴 연출 방식이 독특한 리차드 퀸 등도 과감한 선택으로 시선을 모은다. 통가죽으로 트렌치코트를 완성한 프라다, 니트와 가죽으로 제작한 토즈, 워싱한 데님 소재로 그런지한 트렌치코트를 소개한 디젤 등도 트렌치코트의 입체적 매력을 펼쳐 보인 컬렉션들. 기본에 충실한 트렌치코트의 멋은 긴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스트라이프 패턴의 톱과 맥시스커트에 매치한 알투자라의 트렌치코트, 블랙 톱과 팬츠 위에 무심하게 걸친 지방시의 오버사이즈 트렌치코트, 허리춤에 블랙 니트를 레이어드한 프로엔자 스쿨러의 더블 버튼 트렌치코트 등은 대물림해 입어도 좋을 진정한 클래식 아이템이다. 이렇듯 어느 때보다 선택의 폭이 넓어진 트렌치코트가 갖가지 매력으로 진한 인사를 건넨다. 가을은 짧다. 고민이 길어지면 트렌치코트를 손에 넣기 전에 금세 겨울이 고개를 내밀지도 모른다.
- 에디터
- 김지은
- 포토그래퍼
- COURTESY OF GORUNW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