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순간 이 순간
만물이 무르익는 나날, 시선과 마음과 감각을 풍요로 물들이는 전시.
기술과 예술
파이프를 연상시키는 원기둥 구조를 조형 언어로 선택한 이승조의 회화는 현대문명을 상징하는 동시에 평면성과 입체성, 추상과 구상을 넘나들며 마치 눈앞에 없는 것이 있는 것 같은 환영을 불러일으키는 듯하다. 그렇게 익숙한 시각성에 본질적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을 구축하는 데 자신의 삶을 걸었다. 개인전 <LEE SEUNG JIO>는 작품 30여 점을 통해 그 언어를 새롭게 조망하고 모색한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아폴로 우주선 발사로 새롭게 우주의 공간 의식에 눈뜬 다음 시작한 이 작업이 내가 살고 있는 시대를 표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것 같다.” 화가인 그는 기술을 살피고 탐구했다. 과학기술과의 연관 속에서 예술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운 수순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승조는 그 사실을 기차 여행 중 내다본 창밖 풍경의 속도를 느끼며 지각했다.
10월 30일까지, 국제갤러리.
해독된 풍경
푸른 숲과 파란 바다를 그리는 김보희의 그림이 주는 치유와 환기의 힘을 아는 사람은 이미 안다. 자연과 일상의 순간을 섬세한 붓으로 표현해온 그의 개인전 <the Days>는 제주의 바다와 정원, 꽃과 나무, 열매와 씨앗, 제주에 서식하는 다양한 동식물과 구불구불한 산책길 등 담담하지만 강력한 풍경을 담아낸다. 그는 눈앞의 풍경을 단순히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일상에 대한 깊은 관심을 바탕으로 풍경과 눈을 맞추고 가까이 다가가 관찰하고 살피고 이해한다. 그의 그림은 단순한 풍경화와 좀 다른 길을 간다. 귀한 생명력과 나 아닌 다른 존재에게 선뜻 곁을 내어주는 포용과 조화의 태도이자 그날들이 간직한 기억이다.
10월 30일까지, 제주현대미술관.
의식 저 너머
줄을 맞춘 그리드의 덩어리를 다른 색으로 칠해서 질서 정연하게 배치해놓았다. 이 그리드는 그리드(Grid)라기보다는 셰이프(Shape)에 가깝다. 형태와 또 다른 형태, 또 다른 형태, 또 다른 형태가 함께 존재한다. 미국 시카고를 기반으로 추상 개념을 탐구해온 맥아서 비니언은 그 형태야말로 우리 삶에서 필수 불가결하다고 믿는 듯하다. 맥아서 비니언은 자신의 개인전 <DNA:Study/(Visual:Ear)>에서 시각적·청각적 표현 방식의 결합을 시도한다. 미묘한 청각적 리듬과 생동하는 시각적 기호를 통해 개념주의와 미니멀리즘의 새로운 전략과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는 곧 현대의 모더니즘에 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10월 22일까지, 리만머핀 서울.
만추
괜스레 시 한 줄을 짓거나 아니면 읊고 싶은 계절. 독일 화가 안젤름 키퍼는 개인전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을 통해 흘러가는 시간의 황폐함과 삶의 덧없음을 사유하고 환기한다. 그 모든 시작과 결말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다. 전시는 릴케를 향한 순수한 고백이자 오마주다. 가을을 주제로 변화와 덧없음, 부패와 쇠퇴를 노래하는 릴케의 시에서 비롯한 안젤름 키퍼의 작업은 어스름한 나무의 윤곽과 갈색으로 물든 나뭇잎, 나아가 속절없이 떨어지는 낙엽, 차가운 회색을 머금은 겨울나무의 풍경으로 이어진다. 작가는 릴케의 시 ‘가을날’의 한 구절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를 보란 듯 작품에 새겨 넣기도 한다. 경의의 방식이 꽤 직접적이어서 도리어 신선하다. 10월 22일까지, 타데우스 로팍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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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최지웅
- 포토그래퍼
- COURTESY OF KUKJE GALLERY, LEHMANN MAUPIN, JOMCA, THADDAEUS ROP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