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모어>와 모어, 모지민이 말한다. “나는 그저 아름다운 인간이고 싶다”.

모어는 모어고, 모지민이다. 쇼를 하고 춤을 추고 글을 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구태의 이분법적 사고로 규정하기를 거절한다. 하염없이 아름답고 끼가 넘치게 살아가고 싶을 따름이다. 그 인생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압도적인 문장이 난무하는 에세이집 <털 난 물고기 모어>와 세상 아름다운 쇼가 담긴 다큐멘터리 영화 <모어>를 찾아보면 될 일이다. 

주말 밤마다 이태원 클럽 트랜스에서 모어의 쇼를 보며 울고 웃고 환호하던 지난날을 생각했어요. 훤한 대낮에 이렇게도 만나는군요.
그러게, 우리는 만나도 진작 만나야 했는데 이제 보네요. 지금이라도 함께하니 다행이지 뭐야. 딱 적당한 때에 잘 만난 것 같아요. 

처음 연락을 나누던 날 대뜸 “다 지겹고 지쳤다”고 했죠. 모어 식의 안부 인사라고 할 수 있나요?
맞아요. 그것은 그냥 나의 부정적인 습관일 뿐이고, 나에 관한 책과 영화가 나온 지금, 사실은 하루하루가 하염없이 찬란하답니다. 행복이라는 것이 아주 날 두들겨 패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됐어요. 이 양가적인 감정. 정말 아름답지 않아요? 인생의 숙제를 마친 것 같아요. 뭔가를 해냈다. 비로소 어딘가에 도달했다는 안도와 스스로를 향한 애잔한 마음이 동시에 들어요. 

행복과 피투성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나란히 놓는군요. 그게 모어, 모지민이죠?
언제나. 우리는 그렇잖아요. 지금 바로 뒤돌아서면 비극이 기다리고 있어요. 어쩌겠어요? 죽을 때까지 함께 가는 수밖에.

또한 인터뷰에 대해 날 선 경계와 분노의 감정을 토로했죠. 지금 좋은데요?
영화 홍보 때문에 너무나 많은 인터뷰를 하고 있어요. 여자 배우의 삶이 이런 걸까? 세상에, 누가 인터뷰하는 게 좋다고 그랬을까? 난 너무 끔찍하던데 정말. 전부를 싸잡는 건 아니지만 질문 대부분이 거의 같아요. 영화와 책의 내용이 뭔지, 영화를 만들고 책을 쓴 계기는 뭐고, 드래그 퀸이 된 이유 같은 거요. 거짓말처럼 다 똑같아. 무슨 몰래카메라인 줄 알았잖아요. 로봇처럼 같은 대답을 수백 번은 한 것 같아요. 하염없이. 계기? 이유? 내가 어떤 사람인지? 1분만 검색하면 다 나와요. 책을 사보고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면 되고요. 인터뷰이와 인터뷰어 간에 존중과 케미가 있다면 뭔가 정말 아름다운 작업이 될 수 있을 텐데, 아무튼 고통스러웠어요. 

모어, 모지민을 이야기할 때 앞서 언급한 이태원의 클럽 트랜스를 빼놓을 수는 없어요.
잘 알다시피 어릴 적부터 발레를 했어요. 시골에서 자랐는데 유년 시절부터 각종 혐오와 차별, 폭력을 겪으면서 자랐어요. 서울은 다를 거라는 기대를 품고 올라왔는데, 더 하면 더 했지 다르지 않더라고요. 소수자의 안식처라고 하는 이태원을 발견했고, 쥐구멍 속으로 숨어들 듯이 피신하게 됐어요. 처음 높은 힐과 가발을 쓰고 덩실덩실 춤을 출 때는 행복했죠. 행복한 줄로만 알았는데 그 세계도 결국 폭력과 혐오가 만연한 사회일 뿐이더라고요. 내 쇼를 좋아해줘서 고맙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았어요. 20여 년 동안 쇼를 하면서 단 하루도 행복한 적이 없어요. 이제 더는 쇼를 하지도 않고요.

모어의 쇼에서 느낄 수 있는 충만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싶은데, 돌아서니 비극이 있었네요.
쇼라는 건 엔터테인먼트잖아요. 내가 아무리 죽고 싶고 힘들어도 무대에 서면 입을 찢어야(웃어야)해요. 보통 찢어서 되느냐? 아니, 최선을 다해서 맥스(Max)로 찢어야 하니 그 짓이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겠어요. 어린 나이의 철없는 선택, 그것이 운명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고, 내 의지는 아니지만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거죠. 그래도 지나고 나서 보니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꼭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런 스토리가 없었다면 나를 드러내고 보여주는 책과 영화도 나올 수 없었을 테니까. 보상받았어요. 이제 억울하지 않은 거지. 고통스럽지도 않고. 하염없이.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모어>를 봤어요. 아름다운 이야기죠.
난 꿈이 없어요. 이제 와서 갑자기 무슨 배우가 되려고 나선 것도 아니고요. 다만 지난 시간 성실하게 버텼더니 좋은 기회가 찾아왔고, 고생 고생 개고생하며 찍기는 했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었어요. 덕분에 유수의 영화제에도 초청받으면서 많은 사람의 찬사를 받게 되었답니다. 다들 아주 온몸으로 좋다고 아우성. 알죠? 이 영화는 퀴어도 정체성도 그 무엇도 아닌 인간 모지민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일 뿐이에요. 성장 영화이자 사랑에 관한 이야기고요. 그렇게 봐주시면 좋겠어요. 

모지민의 첫 에세이 <털 난 물고기 모어>는 필력이 기가 막혔어요. 황인찬 시인의 감상을 옮겨보죠. “내가 본 것 가운데 가장 파격적이고 아름다운 글쓰기로 나는 모어의 글을 꼽고 싶다”.
4년 전쯤일 거예요. 처음 내 글을 본 황인찬이 질투가 난다고도 했어요. 뭘 또 아는 거지.(웃음) 나는 그냥 춤추듯이 휘갈기는 건데. 역작이죠, 사실상. 주옥같다고 할까? 알죠? 그 누구의 도움 없이 완전히 혼자 쓴 거예요. 내 글은 교열이나 수정이 불가능해요. 그럼 전혀 다른 말이 되거든요. 그리하여 오타도, 비문도 많답니다. 처음엔 부끄러워서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누가 그러대요. 그마저 예술이라고. 그래서 그냥 두려고. 

춤추듯이 휘갈긴다는 표현이 아주 적합하게 들리네요.
지하철에서 핸드폰 메모장에 하염없이 쓴답니다. 세로 비율인 핸드폰 화면이 주는 그 바이브가 좋아요. 나랑 잘 맞아. 그러니 하염없이 쓰는 거죠. 책도 그렇고 영화에 나오는 내레이션까지 90% 이상이 그렇게 쓴 거예요. 심지어 영화에 흐르는 내레이션은 친구인 아티스트 이랑이랑 장난처럼 녹음한 걸 그대로 가져다 썼어요. 나는 어디서 글을 배운 사람도 아니고, 오로지 나만의 감각으로 그렇게 쓰는 거예요. 무슨 척을 하거나 폼을 잡거나 거대한 걸 말하지 않아요. 역겹잖아요. 

모어에게 아름다움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다움을 향한 열망이 강해서 그 끈을 놓지 못하는 삶이죠.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움과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에는 늘 이만큼 간격이 있어요. 평생 그랬어요. 쇼를 할 때도 그 간극 때문에 힘들었어요. 전에 에디터님이 알렉산더 맥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추천한 거 기억나요? 맥퀸이 그러더라고요. “나는 기이하고 이상한 데서 극강의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나도 그래요. 케이트 부시, 비요크 같은 사람들을 보면 너무 아름답죠. 핑크 플라밍고, 추앙하고요. 뭐랄까? 난 그런 과격한 것들과 마주할 때 아름다움을 느껴요. 

오늘 우리가 찍은 사진은 어때요?
난 더 확 뒤집어지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데 아주 딱 통제를 하시더군요.(웃음) 뭔가 하다가 만 기분이 들기도 하는데 이럴 때도 있어야죠. 누군가는 무섭다고 할 거고 누군가는 아름답다고 하겠죠. 신경 안 써요. 어쩔 수가 없어. 나는 그냥 이렇게 살다가 갈 운명.

심의상 쓸 수 없는 말이 더 많은 인터뷰는 여기까지 하죠. 작가 모지민의 문장을 끝으로 내밀어볼까 해요. “나는 살아도 구더기이고 죽어도 구더기이다.”
‘털 난 물고기 모어.’ 처음 모어라는 이름을 지었을 때 신박하다고 했어요. 낯설고 이질적이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내 존재를 잘 대변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마저 스스로를 미화한 것 같더라고요. 피상적이고요. 나는 직관적인 말을 좋아하거든. 구더기는 시체가 썩어야 등장하는 존재예요. 내가 꼭 구더기 같더라고. 구더기 말고는 그 시림과 고통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는 살아 있어요. 결국 지금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고요. 그래요. 하염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