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만이 움직이는 걸까? 때로는 우정도 그렇다. 영원할 것 같았던 친구에게. 

우정은 사랑만큼이나 우리에게 너무 소중하기에, 당대의 작가와 철학자는 우정에 대한 아름다운 아포리즘을 많이 남겼다. 그중에서도 몽테뉴의 글은 마음을 울린다. 그에게는 작가이자 법률가인 에티엔 드 라보에티라는 친구가 있었다. 라보에티가 페스트에 걸려 사망할 때까지 둘은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몽테뉴는 이렇게 말했다. “흔히 친구나 우정이라는 것들은 우연 혹은 유사함으로 연결되는 친밀한 관계나 면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관계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은 서로를 격려한다. 하지만 나는 영혼들이 서로 한데 어울리며 녹아버려 두 영혼을 결합한 솔기마저 눈에 보이지 않는 우정에 대해 말하고 싶다.” 영혼이 한데 어울리며 녹았다니, 어떤 우정이었을까. 온더락스에 쓰는 두 개의 동그란 얼음이 녹아 물이 되었다는 걸까? 아니면 실수로 화목 난로에 넣어 한데 녹아버린 레고 조각 같은 것일까. 몽테뉴의 우정은, 다시 말해 다시는 뗄 수 없는 불멸의 것이다. 우정은 그렇게 영원할 수도 있다.

빨간 머리 앤과 다이애나의 우정은 영원했지만, 현실의 우정에는 다양한 결말이 있다. 어린 시절, 엄마는 자주 말했다. “친구가 너의 전부가 아냐.” 또래 집단이 더없이 소중한 그때에, 부모의 그런 말은 기성세대를 미워하게 하는 말이었다. 엄마는, 아빠는 아무것도 몰라. 난 친구만 있으면 된단 말이야. 그렇게 소녀들은 자신의 꿈, 소망, 사랑, 절망과 슬픔을 공유하며 더없이 완벽한 세계를 만들어갔다. 친구라면 모든 걸 할 수 있었다. 그랬다. 그런데 그런 시절에서 10여 년이 흐른 지금, 우정의 얼굴은 어떨까? 여성들이 마음을 토로하는 글을 보면 예전의 기성세대와 다르지 않다. “우정이 참 허무하네요.” “동네 엄마들(아이 엄마들) 우정은 아무것도 아니었을까요?” 왜 우리의 뜨거운 우정은 시간이 지나며 쓸쓸함이 되었을까. 상황이 변해서일까? 

내게도 청춘을 함께한 친구들이 있다. 우린 같은 교복을 입었고, 같은 날 수능을 보고 대학에 갔고, 서로의 남자친구들과 함께 만났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윽고 친구들은 하나씩 부케를 던지기 시작했고, 나는 그 부케를 다 받았다. 그때는 친구들은 결혼을 하고, 나는 안 했다는 게 큰 변화를 가져올 줄 미처 몰랐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각자의 생일마다 모여, 자정이 넘도록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는데 결혼을 한 친구들은 밤 9시도 늦었다는 듯 밥을 먹은 뒤 서둘러 자리를 떴다. 이제 모든 게 달라질 것이었다. 친구들은 대부분 아이를 낳았다. 어린 시절, 우리에겐 각자의 꿈이 있었고 그 꿈이 전업주부였던 친구는 없었지만 많은 친구들이 전업을 선택했다. 우리가 근 20년간 가져왔던 루틴이자 전통은 사라져 저녁 식사는커녕 다신 내 생일에 친구들을 만날 수조차 없게 됐다. 아이를 낳은 여성의 삶은 변한다. 동창인 남자들은 결혼을 해도 농구하고 술 마시고 게임만 잘만 하던데, 내 친구들은 집 밖에 나오는 것조차 쉽지 않다. 아빠들은 자정에 와도, 어린 자녀가 있는 엄마는 한낮에 차 한잔 마시는 것도 안 된다는 분위기를 그때 알았다. 친구들이 보고 싶으면 그들의 집으로 가야 했다. 친구들의 집에서 아기들이 얼마나 자주 먹고, 얼마나 자주 싸고, 얼마나 자주 우는지 알게 되었다. 친구들의 아들딸은 죄다 ‘등에 센서’가 있다고 했다. 하루 종일 끼니도 거른 채 서서 아이를 달래는 친구의 입에 숟가락으로 밥을 먹여주었다. 아기들이 어린이가 된 후에는 릴리펏과 같은 키즈카페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그래야 우리가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었으니까. 지금은 어떠냐고? 마감 후 휴가를 내고 몇 달에 한 번 친구들과 브런치 모임을 하는데, 오후 1시에서 3시 사이면 각종 학원 라이드를 위해 테이블을 떠난다. 우리 사이에 공통된 주제는 얼마나 있을까? 서로에 대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나는 ‘조리원 동기’만큼도, 아이 친구의 엄마만큼도 내 친구들의 삶을 모르고, 내 친구들 역시 멋진 연예인을 만나고 해외 출장을 다니는 나를 부럽다고 하지만 회사에서 차장, 부장으로 일하면서 느끼는 부담감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후배들이 종종 말한다. “결혼한 친구들과 말이 잘 안 통해요. 제가 결혼을 안 하면 친구가 없어지는 걸까요?” 기혼과 비혼으로 다른 삶을 살게된 우리는 어쩌면 같은 고민을 할지도 모른다. 후배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정도 노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우정은 계속 변화하며, 그 틈에 새로운 우정도 생겨난다고. 아무리 좋은 시절도 영원할 수 없고, 각자의 인생 속에서 새로운 상황이 펼쳐진다고. 그러니 우정이 소중하다면, 그 간극까지 힘껏 붙잡고 있어야만 한다고. 동질감으로 시작된 우정이지만 늘 같진 않다고. 어느 순간 너무나 이질적인 존재가 된 서로까지 껴안아야만 한다고. 

조금 별난 존재일지도 모르는 나를, 친구들 역시 여전히 안아주고 있다. 한편, 내게는 여전히 결혼하지 않은 또 다른 어린 시절의 친구들이 남아 있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여행을 떠날 수 있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서로의 집을 방문할 수 있다. 또 내게는 에디터로, 디렉터로 일하며 생긴 수많은 업계 친구들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까다롭지만,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이들은 역시 결혼 생각이 크게 없거나 상당히 늦게 결혼하기 때문에 나의 좋은 친구가 되어준다. 그러므로 아이 엄마인 친구들과 공유할 수 없는 이야기를 이들과 나누고, 어쩌면 내가 자존심 때문에, 약해 보일까 봐 두려워서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또 나의 오랜 친구들과 나눌 수 있다. 우정은 다소 느슨해졌지만 여전히 이어져 있다. 

그럼에도 노력이 부족해서였을까? 내가 뭔가를 잘못했을까? 지금은 곁에 없는 친구도 있다. 나는 누구와도 대놓고 절교하지 않는 사람이다. 먼저 친구하자고 손을 내밀지도 못하지만(같이 놀자고 하기엔 내가 너무 소심하기 때문에) 먼저 절교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그 친구와 나는 서서히 멀어졌다. 그와 나는 중학생 시절 하굣길에서, 서로 읽은 문학책을 이야기하면서 친해졌다. 우리는 반에서 유일하게 문학에 심취한 소녀였고, 헤세와 아멜리 노통브와 신경숙과 김영하와 박완서의 소설과 강경옥과 유시진의 만화를 모두 섭렵하는 사람이었다. 다음 날부터 우린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우리는 읽은 책을 나눴고, 교환 일기를 썼다. 나는 어느새 내 글씨가 그의 글씨와 닮는다고 느꼈다. 

똑똑하고 박식한 그는 대학생 시절은 물론 30대 초반까진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였다. 차를 먼저 장만한 후에는 회사 근처에 오면 같이 퇴근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보니 내 옆에 그가 없었다. 연락을 안 한 건 그였을까, 나였을까? 서로 연락 안 한 지 꽤 시간이 지났음을 깨달은 무렵 나는 대상포진에 혹독하게 걸려 세상을 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지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무겁게 느껴질 때였다. 예전 같으면 전화해서 혹시 내가 섭섭하게 한 건 아닌지 물었을 테지만 나는 그냥 기다렸다. 서로 너무 속속들이 알았고, 때로 그게 서로에게 피로감을 준 것도 알았다. 시간이 지나면 연락하겠지? 연락 안 한다면, 그 친구가 더 이상 내가 필요치 않은 것이니 존중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렇게 5분 거리에 사는 우리가 못 본 지 몇 년이 됐다. 가끔 동네에서 친구의 어머니를 마주친다. “내가 항상 말해. 어린 시절의 친구들이 얼마나 소중한데…”라며 넌지시 화해를 권고하신다. 나는 친구에게 할 수 없는 말을 그의 어머니에게 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좋은 친구가 못 되어준 것 같다고. 나는 어렸고, 미완성이었고, 때로는 충동적이었고 실수도 많이 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고맙고, 그래서 미안하다고. 보지 않는다고 해서 우정이 지워지는 게 아니었다고. 그 시절 속에 우정은 존재하고, 함께한 시간을 여전히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더 좋은 친구가 되겠다고. 종종 곁에 없는 친구에게 말을 건다. 좋아하던 벚꽃이 피었고, 너의 생일도 다가오는구나,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