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남자의 아름다움은 형형색색으로 물들인 손끝에서부터 온다. 

단지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야심한 밤에 넷플릭스를 백색 소음 삼아 틀어놓고 알아서 잘도 자라나는 손톱을 또각또각 깎는데 불현듯, 느닷없이 ‘손톱에 색을 칠해도 좋겠는걸?’이라는 마음의 소리가 입밖까지 튀어나왔다. 대부분의 충동적 결심은 하룻밤 곯아떨어지고 나면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이번엔 달랐다. 출근하며 마주친 <얼루어>의 뷰티 에디터 김민지에게 네일 아티스트 몇 명의 연락처를 받아 챙겼다. 끌리는 곳으로 당일 예약까지 완료. 과정은 신속하고 대범하게 이뤄졌다. 퇴근 후 바람 부는 날의 압구정으로 내달리는데, 바람은 차디찼지만 낯선 세계에 첫발을 들이는 기분만으로 신이 났다. 매거진 에디터에게 시안이란 평생 함께해야 할 숙명이다. 젠더리스 패션의 선두주자 해리 스타일스와 에이셉 라키, 포스트 말론, 배드 버니, 릴 나스 엑스, 트로이시반 등 작은 손톱 위에 각자의 스타일로 색을 표현하는 남자들의 사진을 시안으로 잔뜩 뽑아 간판부터 힙한 압구정동 ‘힙노지 네일’의 네일 아티스트 김수지를 찾았다. “일부러 제일 늦은 시간에 예약을 잡아드렸어요. 저녁에는 여자 손님이 많거든요. 민망하고 불편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남자 혼자 와서 관리받는 경우는 진짜 드물어요. 여자 친구를 따라와서 큐티클 정리만 하거나 아주 가끔 모델이나 패션 쪽 일하는 분이 오는 것 말고는요.” 세심한 배려에 눈물이 다 날 뻔했지만, 여기가 무슨 사우나도 아니고 여자, 남자 따지며 내외할 필요가 있나? 하는 의문을 품으며 동시에 공손한 태도로 양손을 내밀었다. 

이어링은 타사키(Tasaki). 입술 피어싱은 큐밀리너리(Q_millinery). 블랙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네일 받는 남자에 관한 정확한 통계는 찾아볼 수 없지만, 지역마다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태원 해방촌에서 네일숍을 운영하는 네일 아티스트 우수민의 입장은 정반대다. “남자 손님도 많이 오세요. 되게 파격적인 도안을 직접 준비해서 오는 손님도 많아요. 동네의 특성이 그래서인지 남들 시선 의식하지 않고요. 남자가 네일 하는 게 뭐 이상하거나 특별한 건 아니잖아요.” 진작부터 남자의 네일이 확산한 해외의 경우는 어떨까? 릴 나스 엑스, 비요크, 빌리 아일리시, 킴 카다시안, 리한나 등 성별 구분 없이 다양한 셀러브리티의 손톱에 자기만의 색을 더하는 한국인 네일 아티스트 오소진은 남자 네일에 관한 질문 자체가 촌스럽다고 말한다. “패션과 뷰티 신에서 젠더 규범은 완벽하게 허물어졌어요. 이분법적 태도는 낡고 뒤처졌고 형편없다고 생각해요. 할리우드 남자 스타 대부분은 거리낌 없이 손톱에 색을 칠해요. LA나 뉴욕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친구 중 네일을 하지 않은 남자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고요. 케이팝 아이돌도 그렇게 하지 않나요?” 그도 그럴 것이 인스타그램에 #malepolish를 검색하면 네일 하는 남자의 사진이 2만여 개 이상 존재한다. 

그사이 내 두 손은 각질과 큐티클 관리에 돌입했는데, 난생 처음 보는 자그마한 전동드릴 같은 기계가 윙 하는 소리를 내며 손톱 사이사이를 부지런히 오갔다. 각질과 큐티클이 새하얀 눈보라처럼 흩날리는데 그야말로 장관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이걸 누가 보면 어쩌나 싶어 아무도 없는 숍 내부를 괜히 두리번거리며 경계할 정도. 거스러미까지 모두 제거하자 10년 묵은 때를 벗겨낸 것처럼 개운하다. 손의 무게가 가벼워진 것처럼 가뿐했다. “이게 중독성이 있어요.(웃음) 지금 느끼는 상쾌함이 자꾸 생각나서 또 오는 분이 많거든요. 근데 강도를 높이거나 너무 자주 하는 건 좋지 않아요. 손톱에 자극이 되니까요.” 

그 무렵 드디어 손톱 위로 색이 올라가고 있었다. 나의 요청 사항은 이랬다. “블랙이 메인 컬러였으면 좋겠고요. 불꽃 문양도 귀엽더라고요. 과한 건 상관없는데 느끼한 건 싫어요. 정답처럼 너무 매끈한 것도 싫고 엉성한 듯 거친 느낌이 나면 좋겠어요. 커트 코베인이나 데이비드 보위처럼요. 그냥 자유롭게 해주셔도 돼요.” 순간 네일 아티스트 김수지의 동공이 흔들렸다. “오랜만에 아주 까다로운 손님을 만났네요.” 총 한 시간 남짓 엄지손가락에는 아주 가는 세필로 정밀하게 불꽃 문양을 그려 넣고, 검지손가락에는 그래피티 같은 낙서를, 중지에는 검정 베이스에 빨간색 문자로 포인트를 줬다. 열 손가락 전부 다른 네일에 관한 반응은 생각보다 빨리 예상치 못한 곳에서 체감할 수 있었다. 네일을 받은 직후 2월호 화보 촬영을 위해 밤하늘의 별을 세느라 바쁜 래퍼 비오와 떠오르는 신예 배우 남윤수를 만났다. 콘셉트나 시안을 비롯한 촬영 전후 그 누구에게도 제안하거나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두 사람 모두 자발적으로 손톱에 색을 올리고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이 이어졌다. 에디터님이 한 걸 보니까 그냥 한번 해보고 싶었다는 말과 함께. 그날의 결과물은 <얼루어> 홈페이지에서 비오와 남윤수를 검색하면 확인할 수 있다. <Nail Men> 화보를 촬영한 날도 비슷한 상황이 이어졌다. 모델 유고의 얼굴 위로 네일 받은 남자의 손이 차곡차곡 올려진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는데 모델과 내 손으로는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다급히 현장에 있던 남자 스태프 박정환, 황모세가 즉석에서 네일을 하고 손 모델로 참여했다. 그들은 모두 네일을 한 상태로 귀가했는데 그날 밤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네일 받은 손을 자신의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찍어 올렸다. 마치 새로운 타투나 피어싱, 액세서리를 자랑하는 듯 아무런 거리낌 없이. 

네일 아티스트 우수민은 성공적인 남자 네일의 가장 중요한 점은 귀여움과 자연스러움이라고 말한다. “한 끗 차이로 과해 보일 수 있어요. 블랙 컬러가 제일 무난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주는 건 당연하죠. 빨간색처럼 강렬한 색에 도전하고 싶다면 한두 손가락에만 포인트를 주는 게 안전해요. 올봄에는 산뜻한 파스텔톤의 컬러감에 주목해도 귀여울 거예요. 솜사탕 같은 색 있잖아요. 네일에 도전하고 싶은데 주저하게 된다면 해리 스타일스와 에이셉 라키의 네일을 참고하세요. 그게 딱 적정한 남자 네일의 교본이라고 생각해요.”
바람 부는 압구정에서 네일을 받은 지 이제 한 달이 좀 지났다. 손톱이 자란 만큼 기존 네일을 받은 부분에 여백이 생겼다. 지워질 건 지워지고 떨어져 나갈 건 떨어져 나갔는데 그런지한 지금의 느낌이 좋다. 남자 네일의 핵심은 네일숍에서 지금 막 케어를 끝낸 듯 매끈한 것보다는 어떤 의미에선 엉성할수록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네일숍을 해우소이자 리트리트라고 하던데 지난 한 달간 컬러풀한 손톱이 언뜻언뜻 눈에 들 때마다 잔뜩 쌓인 스트레스가 풀리면서 꽤 좋은 기분이 된다. 긴 마감이 끝 나면 새로운 색으로 물들일 작정이다. 그러니까 이 좋은 걸 왜 이제야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