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에 가기 위해 미싱을 타던 평화시장 여성 노동자의 목소리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미싱 타는 여자들>의 김정영, 이혁래 감독이 바라본 여자들.

봉준호 감독이 꼽은 2021년 최고의 영화 중 하나. ‘폭격이라도 맞은 듯 오열했다’는 박찬욱 감독의 소감이 잔잔하지만 힘있게 퍼지고 있다. 어떤가?
이혁래 신기한 경험이다. 봉준호, 박찬욱 같은 감독이 우리가 만든 영화를 찾아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기쁘기도 하고 얼떨떨하기도 하다. 그들이 <미싱 타는 여자들>의 어떤 면을 좋게 봤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정영 봉준호 감독이라는 든든한 서포터가 생겨버렸다. 규모가 작은 영화이다 보니 적극적으로 홍보하기가 어려웠는데 국내 언론은 물론이고 해외 언론에서도 영화 소개와 인터뷰 요
청이 이어지고 있다. 박찬욱 감독님이 울먹이는 리뷰 영상 때문에 울보 캐릭터가 추가된 것 같아 마음이 좀 그렇지만 ‘박찬욱의 오열’이 마케팅적으로 큰 힘이 되었다.(웃음) 지난 몇 년 영화계와 영화인이 많이 힘든 상태다. 영향력 있는 선배 영화인들의 응원과 지지, 연대의 마음 덕분에 힘을 낼 수 있었다. 

1977년 9월. 180여 명의 청계피복 노동조합 조합원들의 투쟁을 이야기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김정영 이음피움 봉제역사관에서 진행한 아카이브 프로젝트 때문에 당시의 봉제 노동자들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그 시절 대부분 10대 소녀였던 분들이다. 자기 집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어린 나이에 학교 대신 공장에서 일해야 했던 사람들.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된 게 그때 이분들이 제일 하고 싶은 게 공부였다. 학교에 다닐 형편이 안 되니까 조합원들끼리 만든 게 노동교실이다. 그분들에겐 그게 학교였던 거다. 일 끝나면 공부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친구들도 사귀던 노동교실이 강제로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소녀들은 투사가 된다. 교실문을 걸어 잠그고 격렬하게 투쟁한다. 소중한 것을 지켜내기 위해서. 실패한 사건으로 남았고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충분히 드라마틱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전태일이라는 이름에 가려진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영화를 통해 그 이름을 호명해간다는 점이 의미 있게 다가왔다.
이혁래 전태일이라는 커다란 프리즘을 통해 보면 어떤 선입견이 생길 수 있다. 우리와 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인 것 같은 느낌. <미싱 타는 여자들>은 1970년대 평화시장의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주목한 건 비극적인 사건 그 자체라기 보다는 그때 그 시절을 지나온 소녀들의 이야기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그래서인지 다큐멘터리지만, 성장 영화의 정서를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가?
이혁래 넷플릭스 시리즈 <기묘한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기묘한 이야기>의 평온한 일상 밑에 뒤집힌 세상이 있다면 <미싱 타는 여자들>은 뒤집힌 세계 밑에 일상이 있다. 우리 선생님들은 노동교실을 통해서 그 일상을 찾아낸 거다. 결국 패배한 형국이 되었지만 그 경험을 통해 성장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성장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증언자들의 입에서 가장 자주 등장한 단어가 ‘노동교실’이다.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이혁래 <톰 소여의 모험>이나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 나오는 나무 위의 집 같은 존재가 아닐까. 우리들만의 아지트 같은 것 말이다. 배우지 못한 아쉬움을 해소하는 공간이었지만 나중에는 목숨 걸고 지키고 싶은 소중한 공동체였을 거다. 살면서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아늑한 내 방 같은 공간. 

투쟁의 날, 노동교실을 지키다가 누군가는 건물에서 뛰어내렸고 누군가는 유리 조각으로 자기 몸을 그었다는 차마 헤아리기 힘든 증언이 담담하게 이어진다.
김정영 고통스러운 기억을 선생님들은 웃는 얼굴로 들려주셨다. 그날 상황은 그렇게 전해 들은 게 전부다. 넷플릭스에 올라온 <지금 우리 학교는>을 보고 있는데 어쩌면 당시 상황이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더라. 좀비 떼에게 쫓기면서 숨바꼭질하듯 교실에 숨어들거나 책상으로 바리케이드를 치는 모습이 증언자들의 말과 놀랍도록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기묘한 이야기>와 <지금 우리 학교는>의 언급이 흥미롭다.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와 무거운 사건을 대하는 일반적인 태도나 관점과 좀 다른 것 같은데?
김정영 드라마도 그렇고, 작품을 준비하면서 어릴 때 즐겨 보던 일본 만화를 자주 상상했다. 임미경 선생님이 노동교실에서 헤어진 친구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고다 요시이에의 <자학의 시> 2권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제목이 ‘재회’다. 오래전에 헤어진 친구를 지하철역에서 다시 만났는데 서로 막 울면서 끝이 난다. 무겁고 아픈 과거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 태도와 관점마저 지나치게 무거울 필요는 없다. 유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가는 게 더 중요하다.
이혁래 후루야 미노루의 <이나중 탁구부>의 영향을 받은 장면도 있다. 어린 시절의 내가 어른이 된 내 앞에 나타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을 유독 좋아했다.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짐 중 하나가 과거의 나와 화해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것 아닐까? 우리 영화의 출연진들도 그렇고. 9·9사건을 이렇게 꺼내서 이야기하는 건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선생님들이 그날을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과정을 통해 과거의 자신과 마주 앉아 서로 바라보고 화해하기를 바랐다. 실제로 그런 상황과 장면을 연출한 이유다. 

자신의 과거 사진을 바라보며 말을 건네는 장면이나 다 함께 모여 ‘흔들리지 않게’를 합창하는 마지막 장면의 장치나 연출 방식은 예능적이라고 생각했다. 어떤가?
이혁래 예능이야말로 다큐멘터리의 최전선일지도 모른다. 기본적인 세팅 안에서 인물의 반응을 포착하는 예능에 각본이 있긴 하지만, 어느 순간 출연자의 진실한 반응이 나오기 마련이다. 연기와 실제가 모호하게 겹쳐지는 경우가 발생한다. <무한도전> 클립이 지금까지 돌고 돌면서 많은 사람에게 보이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자신의 사진 앞에서 대화를 나눈다거나, 그 시절 친구들과 떠난 강릉 바닷가에 다시 가본다거나 하는 장치는 예능적이다. 그 상황 안에서의 반응은 다 그분들의 것이다. 우리는 반응을 담아냈을 뿐이다. 

다큐멘터리의 힘은 뭐라고 생각하나?
이혁래 사실감을 잡아내는 장르라는 점. 그게 진정한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포착하고 싶었던 사실감은 반응의 생생함이었다. 주로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되는 다큐멘터리이므로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을 하는 이의 얼굴과 반응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미싱 타는 여자들>의 스펙터클은 그분들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내 이야기를 하는 얼굴,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얼굴, 눈물과 떨림이 담긴 얼굴. 언젠가 용산 아이맥스관을 빌려서 우리 영화를 상영하고 싶다. 거대한 스크린에 가득 찬 선생님들의 얼굴은 정말 대단할 것 같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선 관객이 어떤 마음이길 바라나?
김정영 편지지를 꺼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다. 보고 싶은 사람에게 편지를 쓰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다.
이혁래 특정 시대의 비극적인 역사를 잊지 않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우리의 미싱 타는 여자들 이숙희, 신순애, 임미경 선생 등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공감하기를 바란다. 노동교실이 빼앗기면서 임미경은 소중한 친구와 헤어졌다. 신순애와 이숙희는 함께했던 어린 동료들과 인연이 끊어졌다. 그 당사자들이 이 영화를 꼭 보게 되기를 바란다. 영화를 통해 그들이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임미경이 친구를 그리워하는 장면에서 많이 울었다. 사소하지만 거대하고 거대하지만 사소한 그 마음이야말로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이혁래 9·9사건으로 헤어진 어린 시절 친구들이 4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만나 화해하고 오해를 풀고 인사를 나누고 서로 위로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미싱 타는 여자들>이 만들어진 목적이자 영화의 주제다. 

3월 8일은 여성 노동자들이 근로 여건 개선과 참정권을 요구한 날을 기념한 세계 여성의 날이다. 미싱 타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감독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이혁래 영화를 만든 다음 나름대로 여성이 느끼는 아픔과 고통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개봉 후 관객들의 반응을 살피는데 남자인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는 장면에서 많은 여성 관객이 눈물을 흘린다는 걸 알게 됐다. 여전히 그 지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남자인 내 한계인 것 같다.(웃음) 앞으로 많은 여성 관객의 이야기를 듣고 공부하면서 더 공감하고 이해해 나가고 싶다.
김정영 그냥, 젊은 여성들이 용감해지길 바란다.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 어느 날 밤에 출연자 선생님 중 한 분이 전화를 주셨다.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영화를 처음 볼 땐 놀랐고 두 번째로 볼 땐 슬펐고 세 번째 볼 땐 가슴이 아팠다고 하더라. “내 딸은 꼭 자유롭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씀도 하셨다. 용감하고 자유롭게, 싸워야 할 땐 맹렬히 싸우기도 하면서. 그때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