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같은 날이면 / 류경수
막연하게 생각했던 그 어떤 날들이 지금 그에게 왔다. <지옥>에서 비로소 날개를 단 배우 류경수.
오늘이 12월 1일인 거 알아요?
진짜 벌써 그렇게 됐네요. 비가 오더니 갑자기 추워졌고요.
12월에는 기분이 어때요?
제가 올해 서른인데요. 스물아홉 이맘땐 진짜 기분이 이상했어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서른이라는 숫자가 주는 그런 거. 그때 주변에서 말하길 서른한 살이 진짜라고 했거든요. 깎지도 못하는 진짜 삼십대가 되면 그제야 우울해진다고요. 막상 지금은 별 느낌이 없는 편이에요. 스물아홉이든 서른이든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뭐 대단히 큰 변화가 생기지 않았어요. 작년과 다름없이 일하면서 보냈고요. 그러다 보니 어느덧 12월이 왔네요.
지금 막 무슨 생각을 했어요?
그냥 내년에는 뭐하지, 내년에는 뭘 하면서 어떻게 더 재미있게 살지. 그런 생각 했어요.
<지옥>의 흥행 이후 처음 경험하는 것도 많은 해였죠?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레드카펫 행사도 처음 경험해봤어요. 많은 사람의 관심도 받게 됐고요. 그러고 보니까 처음인 게 많네요.
그런 관심은 어때요?
막연하게 생각하고 바라온 순간인데요. 막상 때가 오니까 오히려 담담한 것 같아요. 기분에 취하기보다는 앞으로의 시간을 바라보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냥 더 잘하고 싶다는, 잘해야 한다는 마음뿐이에요.
진짜 바라던 순간이 내 것이 되면 오히려 차분해지기도 하고 그렇죠.
맞아요. 위축되는 것 같기도 해요. 더 새롭고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드니까요. 오히려 냉정해졌어요.
부담감과 책임감이 동시에 커진 것 같아요?
이 일을 한다는 건 언제나 늘 부담감과 책임감이 함께 갈 수밖에 없어요. 놀러 가기 전날 밤 쉽게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그런 느낌인 것 같기도 하고요.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섞인 채 그렇게요.
그래도 긍정적인 얼굴이네요. 그래 보여요.
이게 사실은 스트레스잖아요. 일반적으로 스트레스는 안 좋은 거지만 제가 지금 느끼는 스트레스는 좋은 스트레스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견딜 수 있는 거겠죠. 멈추거나 그만두지 않고 계속할 수 있는 이유일 수도 있고요.
<지옥>의 ‘유지사제’가 <이태원 클라쓰>의 ‘최승권’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채지 못했어요. 얼굴과 이미지를 휙휙 잘도 바꾼다고 생각했죠.
그런 말을 많이 들었는데요. 저는 좋게 생각해요. 아주 고마운 칭찬이죠. 류경수라는 배우보다 캐릭터가 먼저, 더 크게 보인다는 말이잖아요.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각각 인상적인 인상을 남기고 싶어요. 제가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해요.
처음부터 <지옥>을 원했다고 들었어요.
원작 웹툰을 너무 재미있게 봤어요. 리얼리즘을 기반으로 하는 작품 혹은 연기가 있는가 하면 <지옥>처럼 어떻게 보면 비현실적인 세계의 판타지를 표현해야 하는 경우가 있어요.
<지옥>의 세계 안에 들어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어요. 흥미로운 자극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연상호 감독님의 작품을 좋아해서 꼭 함께 작업해보고 싶기도 했고요.
유지사제는 내내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잖아요. 그 인물을 그리면서 맨 먼저 생각한 건 뭐예요?
믿음이요. 제가 그 인물을 온전히 믿는 믿음이요. 그게 제일 중요한 거 같아요. 제가 믿어야 관객들도 믿거든요. 유지사제는 극의 중반에 불쑥 등장하는데 표정이나 행동, 말투를 통해서 감정을 읽어내기 어려운 인물이에요. 모든 게 다 절제되어 있으니까요. 관객이 그 인물을 믿게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어요.
그렇다면 당신이 바라본, 믿게 된 그는 어떤 사람이던가요?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상상을 많이 했어요. 아마 새진리회라는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기 전까진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을 거예요. 벼랑 끝에 몰린 사람이지 않았을까요? 그곳이 아니면 안 되는 그런 사람. 결국 그 이상한 세계가 곧 자기 자신이 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떤 의미에선 연민의 감정을 느끼기도 했나요?
안쓰러운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그 인물을 연기한 배우의 입장에서 볼 땐 그래요.
연상호 감독이 당신을 두고 ‘박정민의 맨 처음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했죠. 연상호 감독과는 차기작인 <정이>를 함께 작업하게 됐고요.
감사할 따름이죠.(웃음) 박정민 배우는 제가 진짜 좋아하는 배우였거든요. <지옥>에 함께 출연하긴 했지만, 같이 붙는 장면이 많지 않았어요. 친해지지 못해서 아쉬워요. 저는 아직도 신기해요. 평소에 좋아하던 감독님과 배우분들과 이렇게 작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요.
당신이 바라본 연상호 감독은 어때요? 워낙 자기 세계가 명확한 창작자잖아요.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이 올라가실 것 같아요. 어떤 의미냐면요, 그냥 너무 좋은 사람이에요. 작품의 내용이나 연출의 능력과 상관없이 현장에 있는 내내 ‘이 감독님과 또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그게 그렇게 흔한 마음은 아니거든요. 연상호 감독님은 그런 분이세요.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에요. 아주 스마트한 개그 감각으로 현장을 지배하는데 그게 너무 좋아요. 너무 웃기고요.(웃음)
며칠 전 사석에서 우연히 류덕환 배우를 만났어요. 배우로서 아주 진지한 고민과 생각을 말하는데 그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죠. 당신과 각별한 사이라는 걸 그땐 몰랐어요.
신기한 우연이네요. 제가 너무 좋아하는 학교 선배예요. 저는 이제 막 신입생이었고 형은 <천하장사 마돈나>와 연극 <에쿠스> 같은 작품에 출연한 아주 큰 배우였어요. 제가 류덕환이라는 배우를 많이 동경했죠. 여전히 그렇고요. 형을 많이 쫓아다녔어요.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어떤 모습 중 되게 많은 부분이 형의 영향을 받은 거예요. 여러모로 그래요.
류덕환 배우 덕분에 칸국제영화제에 다녀온 일도 있다면서요?
단편 영화를 찍고 칸국제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출품한 적이 있어요. 그때 형이 무조건 영화제에 가라고, 그 땅을 꼭 밟으라면서 비행기 티켓을 사줬어요. 덕분에 칸국제영화제 현장도 둘러보고 내친김에 파리에도 며칠 있었어요. 형이 아니었으면 지금까지 프랑스에 가보지 못했을 거예요.
모든 영화인에게 칸국제영화제는 유난히 특별한 곳이잖아요. 어땠어요?
어린 마음에 되게 많은 걸 느꼈어요. 며칠 넋이 나가 있을 정도로 황홀했는데 나중에 꼭 경쟁 부문에 초청돼서 다시 오고 말겠다는 그런 다짐을 했어요. 그 마음은 지금도 선명해요.
연상호 감독이 뭘 찍기만 하면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죠? 꿈의 날이 머지않았는지도 모르겠군요.
하하. 뭐 운이 좋다면, 기회가 온다면 그런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 전체 인터뷰와 화보는 <얼루어 코리아> 2022년 1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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