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계적 일상 회복과 함께 작년보다는 조금 더 나은 2021년이 되었다. 그럼에도 답답하고 불안한 일상 속에서 우리에게 기쁨을 준 것 역시 문화였다.

 

 

원더풀 윤여정!

봉준호 감독이 통역사 샤론 최와 함께 감독상의 시상자로 나서고 <미나리>의 윤여정이 한국 배우 최초로 여우조연상을 받아 든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을 눈으로 보다니! <미나리>는 여우조연상을 포함해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음악상, 남우주연상 등 총 6개 부문의 후보에 올랐다. <미나리>의 제작자이기도 한 브래드 피트의 호명으로 무대에 오른 윤여정은 “원더풀 미나리 패밀리에게 감사합니다. 스티븐 연, 아이작 정, 한예리, 조엘과 앨런. 우린 가족이 됐습니다”라는 영어 수상 소감을 이어갔다. 그의 수상은 우연한 해프닝이나 이벤트가 아니다.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아카데미가 지난 몇 년간 다양성과 포용성 확장을 위해 얼마나 의식하고 노력했는지 확인하는 자리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미나리는 어디에 있어도 알아서 잘 자라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건강하게 해준다’는 영화 속 대사를 생각한다.

 

세계관의 시작

프랭크 허버트의 대작 <듄>은 누구나 탐내면서도 막대한 분량과 제작비로 늘 좌초된 프로젝트였다. 우여곡절 끝에 드니 빌뇌브의 손으로 완성된 <듄>은 전체 이야기의 일부분을 다루지만 압도적인 영상미와 한스 짐머의 사운드, 거대한 세계관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특히 IMAX에 인증받은 카메라 Arri Alexa LF로 촬영된 1.43:1 비율의 풀화면이 포함되어 ‘용아맥(용산아이맥스)’ 예약이 더없이 치열했다. <듄> 이후의 이야기는 <듄: 파트2>에서 이어지며 내년 촬영을 시작할 예정이다. 모래행성 아라키스에 떨어진 우리의 ‘폴’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원작이 있는 만큼 운명은 정해져 있지만, 역시 어떻게 구현되느냐가 문제다.

 

FASHION & MOVIE

디즈니 애니메이션 <101마리 달마시안>의 스핀오프 격 실사 영화인 <크루엘라>는 크루엘라의 젊은 시절을 창조해냈다. 매 장면 정교한 오트 쿠튀르를 입고 나타나는 크루엘라의 패션은 크루엘라 그 자체다. 1970년대와 1960년대, 18세기 스타일이 공존한다. 흥행에 힘입어 <크루엘라 2> 제작 확정! 개봉 예정인 <하우스 오브 구찌>는 100주년을 맞은 브랜드 구찌를 창시한 구찌 가문의 비극적인 사건을 다룬다. 리들리 스콧의 연출에 레이디 가가, 아담 드라이버, 알 파치노, 제레미 아이언스, 자레드 레토 등 호화 캐스팅을 자랑한다. 마우리치오와 파트리치아의 결혼식, 살인 사건이 발생하는 클럽 장면 등 구찌의 역사와 당대를 호령하는 화려한 구찌 스타일을 감상할 수 있다.

 

2021 BOX OFFICE
2021 영화 전체 흥행 순위

 모가디슈 361

블랙 위도우 296

분노의 질주 : 더 얼티메이트 229

이터널스 227

싱크홀 219

 

2021 한국 영화 흥행 순위

모가디슈 361
싱크홀 219
인질 163
보이스 142
발신제한 95

2021 외화 흥행 순위

블랙 위도우 296
분노의 질주 : 더 얼티메이트 229
이터널스 227
극장판 귀멸의 칼날 : 무한열차편 215
베놈2 : 렛 데어 비 카니지 210

⁎출처 한국영화진흥위원회(2021년 11월 14일 기준)

 

영화인, 세계 속으로


봉준호
올해도 어김없이 전 세계 영화제에 봉준호 감독이 등장했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감독상을 시상했고, 칸국제영화제 개막식 무대에 올라 개막 선언을 외쳤다. 베니스국제영화제는 그를 한국인 최초로 심사위원장으로 위촉했다. “나는 영화인으로서 영화의 역사가 이렇게 쉽게 멈출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금세 코로나19가 지나갈 것이고 영화는 계속될 겁니다.” 봉준호의 말이다.

 

마동석
우리들의 ‘마블리’ 마동석이 한국 배우 최초로 마블의 슈퍼히어로가 되어 돌아왔고 안젤리나 졸리와 호흡을 맞췄다. <이터널스>의 길가메시는 맨손으로 빌런을 해치우는 괴력의 소유자. 좀비든 사람이든 빌런이든 일단 때려잡고 보는 마동석이 맨주먹을 날린다.

 

송강호
칸국제영화제는 경쟁 부문 심사위원으로 배우 송강호를 위촉했다. 심사위원장인 스파이크 리를 주축으로 아홉 명의 세계적인 영화인과 함께 경쟁 부문에 오른 24편의 영화를 심사했다. 그는 신상옥 감독, 이창동 감독, 배우 전도연, 박찬욱 감독에 이어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이 된 다섯 번째 한국 영화인이다.

 

전종서
배우 전종서의 첫 할리우드 진출작인 <모나리자 앤 더 블러드 문>은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초능력을 지닌 소녀가 정신병원에서 도망쳐 나온 뒤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이 독특한 판타지 드라마에서 전종서는 물 만난 듯 특유의 기묘한 에너지를 마구 뽐낸다.

 

박서준
<캡틴 마블>의 후속작 <더 마블스>에 캐스팅된 박서준. 정확하게 알려진 사실은 딱 여기까지다. 그가 어떤 역할을 맡을지는 이러쿵저러쿵 여전히 소문만 무성한 상태.

 

저스틴 전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에릭 역으로 잘 알려진 한국계 미국인 배우 겸 감독 저스틴 전의 <푸른 호수>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삶을 그린다. 동양인의 얼굴에 서양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 각본과 연출, 주인공까지 맡았다.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받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정정훈
박찬욱 영화의 촬영을 담당한, 이미 몇 편의 할리우드 영화의 이미지를 책임진 정정훈 촬영 감독이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프리퀄인 영화 <웡카>의 촬영을 맡았다. 티모시 샬라메가 젊은 시절의 윌리 웡카를 연기하는 그 영화다.

 

여성의 역사

여성 감독이 영화제를 접수했다는 표현은 어떨까?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은 줄리아 뒤쿠르노 감독의 <티탄>이 받았다. 여성 감독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건 1993년 제인 캠피온의 <피아노> 이후 28년 만이다. 탕이 감독의 <세상의 모든 까마귀들>이 단편 황금종려상을, 키라 코발렌코 감독의 <움켜쥐었던 주먹 펴기>가 주목할 만한 시선 그랑프리를, 안토네타 알라맛 쿠시야노비치 감독의 <무리나>가 황금 카메라상을 받는 등 각 부문에서 여성 감독의 활약이 돋보였다. 아니 눈부셨다.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클로이 자오 감독의 <노매드랜드>는 올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여우주연상을 다 가져갔다. 베니스국제영화제는 올해 황금사자상으로 다시 여성 감독인 오드리 디완의 <레벤느망>의 손을 들었다. 영화는 1963년 프랑스에 사는 한 여성의 원치 않는 임신 이후 낙태 결심까지의 갈등을 그렸다.

 

안녕, 서울극장

1978년 시작된 종로 서울극장이 올해 8월 31일 문을 닫았다. 총 11개관으로 스크린을 늘려나가며 국내 최초의 멀티플렉스로 자리매김했던 서울극장은 종로 시대를 연 주역이었고, 이후에는 예술 영화관으로서 관객을 만났다. 마지막 3주간은 무료 상영회인 ‘고맙습니다 상영회’를 열어 영화팬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극장에서 만나요 

주말 밤, 일찍 잠들기는 싫고 바깥 공기를 쐬고 싶을 때 심야 영화만큼 좋은 선택은 없다. 꽤 오래 그 재미를 잊고 살았지만, 단계적 일상 회복의 일환으로 다중 이용 시설 영업시간 제한이 해제되면서 다시 심야 영화를 볼 수 있게 됐다. 코로나19 백신 접종 완료자는 좌석을 띄어 앉지 않아도 되고, 팝콘과 음료를 먹을 수 있다. 일부 극장은 접종 완료자만 입장 가능한 상영관, 이른바 ‘백신패스관’을 운영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티모시 샬라메는 자신이 출연한 <듄>의 인터뷰 자리에서 말한다. “이 영화는 꼭 극장에서 봐야 해요. 극장을 위한 영화니까요. 아이맥스 촬영도 그렇고, 한스 짐머의 음악은 극장을 진짜 흔들어버린다니까요!” OTT의 시대, 극장이 존재하는 이유다.

 

박스오피스 1위

코로나19 4차 대유행으로 영화 제작과 개봉을 미루거나 취소하거나 주저하는 동안 류승완 감독의 <모가디슈>는 더는 물러날 수 없다는 듯 7월 28일 올해 국내 첫 텐트폴 영화의 포문을 열었다. 일종의 승부수를 띄운 셈이다. 오프닝 스코어는 12만 명. 순식간에 입소문을 타 일주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총 누적 관객 361만 명. <모가디슈>에 이어 8월 11일 개봉, 218만 관객을 동원해 한국 영화 흥행 성적 2위를 차지한 <싱크홀>은 재난 소재와 코미디를 결합하여 웃음이 필요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개봉 첫날 14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올해 한국 영화 최고의 오프닝 기록을 세웠다.

 

어쩌면 당신이 놓친 영화

<프라이싱 영우먼>
드라마 <킬링 이브> 시즌2의 작가이자 총괄 프로듀서,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 카밀라 파커볼스를 연기하는 등 배우로도 활동해온 에메랄드 펜넬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에 동갑내기 배우 캐리 멀리건이 함께했다. 영화는 제목과 달리 사회의 기대를 배반하는 강간 복수극이다. 파괴와 분노로 가득 찬, 미투 시대를 낱낱이 고발하는 리벤지 무비. 올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각본상, 편집상 후보에 오르며 오스카의 복병으로 불리기도 했다. <미나리>를 제치고 각본상을 받았다.

 

<최선의 삶>
더 나아지기 위해서 더 나빠졌던 열여덟 살 강이, 아람, 소영은 눈빛만으로 서로의 마음을 꿰뚫는 단짝 친구들이다. 자라온 환경도 꿈도 성격도 다른 세 친구는 다만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닿고 싶어 한다. 영화의 원작은 제4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인 임솔아 작가의 동명 소설이다. 작가가 써 내려간 인물들의 안간힘은 영화에서도 먹먹하게 재현된다. 이우정 감독의 사려 깊은 연출도 인상적이지만 세 명의 젊은 배우가 최선을 다해 선보이는 연기는 살아 있는 듯 꿈틀댄다.

 

<퍼스트 카우> 
켈리 레이카트 감독은 미니멀리스트이자 리얼리스트이고, 여성주의와 자연주의적인 시선으로 영화를 만들어온 자랑스러운 이름이다. <퍼스트 카우>는 서부 개척 시대 마을에 도착한 첫 번째 소이자 유일한 소가 등장하면서 뜻밖의 스릴을 자아내는 범죄영화의 외형을 취한다. 스토리를 더 설명하는 건 어렵다. 이야기보다 중요한 것은 풍경과 감각이고, 대사보다 중요한 것은 행동이다. 단지 땅속에 나란히 묻힌 두 구의 해골을 가만히 비추는 카메라로부터 미국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관객에게 묻는다.

 

<쁘띠 마망>
여덟 살 소녀의 눈에 할머니는 보이지 않고, 말없는 엄마의 뒷모습은 슬퍼 보인다. 소녀는 숲속에서 엄마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또래의 소녀와 친구가 된다. 2019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이후 쏟아진 각종 요란한 환대와 기대에 셀린 시아마는 물살에 휩쓸리지 않았다. <쁘띠 마망>은 스펙터클한 ‘시네마’는 자신의 관심사가 아니라고 발언하는 것 같다. 혈연과 우정으로 맺어진 여성들의 관계는 소박한 듯 단조로워 보이지만, 모자람 없다. 오로지 영화만이 가능한 방식으로 장면과 장면을 늘어놓고 이어 붙일 뿐.

 

<다 함께 여름!>
일상 속 감정과 욕망, 사랑과 충동을 섬세하게 포착해온 기욤 브락 감독이 여름 영화를 들고 왔다. 인종과 사회적 배경 등 서로 다른 청춘들의 만남을 휴양지를 배경으로 그려낸다. <다 함께 여름!> 속 청춘들의 만남은 계속 어긋나고 실패한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이들의 미래는 여전히 불안하고, 고민은 해결되지 않을 것만 같다. 내일은 더 씁쓸할 수도 있다.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내세우지 않지만, 현실의 미묘한 균열과 멜랑콜리를 코미디 장르 속에 녹여내는 것, 기욤 블락의 영화다.

 

돌아온 영화제 

LA 할리우드의 돌비 극장에서 개최해온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은 사회적 거리 두기 등 방역 수칙에 따라 4월 돌비 극장과 기차역인 유니언 스테이션 두 곳에서 최소한의 인원만 참석한 채 열렸다. 베를린국제영화제는 3월 온라인 영화제에 이어 6월 ‘베를린국제영화제 서머 스페셜’이라는 이벤트로 오프라인 상영을 진행했다. 16곳의 야외 상영으로 흩어져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7월로 개최를 미룬 칸국제영화제는 백신 접종이라는 새로운 국면과 함께 레드 카펫과 대규모 극장 상영 등을 진행하며 영화제는 계속된다는 사실을 알렸다. 지난해 코로나19 상황 속에서도 오프라인 영화제를 감행한 베니스국제영화제는 올해도 11일간의 영화제를 개최했다. 국내는 방역과 안전을 맨 앞에 둔 모양새. 전주국제영화제, 부천판타스틱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등이 다시 관객을 만났지만, 좌석 띄어 앉기와 상영관 내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했고, 온라인과 오프라인 상영을 함께 진행하며 영화는 즐기되 운집하지 않는 절충의 방식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