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서 어슐러 K. 르 귄과 마가렛 애트우드의 신간이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을 봤을 때에는, 이 위대한 작가들의 책을 나란히 두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들은 여성 작가가 보다 차별받던 시대에 태어나(<어스시 시리즈>를 쓴 르 귄은 1929년, <시녀 이야기>를 쓴 애트우드는 1939년에 태어났다) 시대를 앞서가는 글을 썼고, SF로 불리는 장르 소설을 썼으며, 페미니스트를 자처했다. 어슐러 K. 르 귄의 <세상 끝에서 춤추다: 언어, 여자, 장소에 대한 사색>과 <나는 왜 SF를 쓰는가: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 사이에서>는 스스로 자신의 작품과 삶에 대해 써 내려간 글이라는 점에서 작가에게 한발짝 더 다가서는 기회를 제공한다. 르 귄의 <세상 끝에서 춤추다>는 강연용 원고, 에세이, 서평을 정리한 것으로 서평을 제외한 각각의 글은 여성, 세계, 문학, 여행의 네 가지 기호로 분류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여성, 즉 페미니즘에 관련한 글이다. 10년을 두고 한 칼럼을 현재 시점으로 고치기도 하는 등 페미니스트로서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여성과 논바이너리 학생을 위한 학교인 밀스 칼리지의 1983년 졸업 연설을 옮긴 ‘왼손잡이를 위한 졸업식 연설’은 마치 현대 여성을 위한 선언 같고, 1986년에 쓰인 ‘글쓰기에서 여자들의 전망’은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한결같은 출판계의 모습이라 웃음이 나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딸과 손녀딸들은 우리처럼 0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대목에서는 그만 웃음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여자들의 말, 여자들의 작품을 힘 있게 지켜야 한다는 당부가 오래 남는다.

동시대에 활동한 이들에게는 사건이 있었는데, 오랫동안 자신의 작품이 SF라고 생각하지 않은 애트우드와 르 귄과의 갈등이었다. 르 귄이 2009년 <가디언>지를 통해 ‘그러나 애트우드는 자신의 그 어떤 작품도 SF라고 불리기를 원치 않는다’고 시작하는 우아한 문장으로 애트우드가 더 문학적이기 위해 SF라는 꼬리표를 거부한다고 비평했고, 이 사건은 애트우드가 스스로의 작품 세계를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결국 두 사람은 2010년 포틀랜드에서 공개 토론을 하기까지 이른다. ‘무엇이 SF인가’라는 것에서 르 귄과 애트우드의 시각은 달랐지만, 애트우드는 용어의 유연성과 문학 장르 간의 교환과 왕래가 SF 세계의 현상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며 모두가 ‘놀라운 이야기라는 커다란 하나의 우산 아래에 놓여 있다’고 깨닫는다. 애트우드의 책 <나는 왜 SF를 쓰는가>는 바로 거기에서 시작한다. 때문에 이 책의 첫 머리는 다음과 같다. ‘어슐러 K. 르 귄에게.’

 

편집자의 모든 것

SNS를 통한 이른바 ‘브랜딩’과 ‘홍보 마케팅’, 다양한 ‘콘텐츠’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출판사 편집자에 대한 관심이 높다. 하지만 세상에 드러난 일은 편집자가 하는 일의 극히 일부이며, 좋은 편집자에 대한 생각도 정답은 없다. 민음사 사람들의 기록을 모은 <책 만드는 일>에서는 편집자의 고민을 엿본다. 김수영 탄생 100주년을 맞아 <김수영 전집>의 3판의 편집자를 맡은 박혜진은 지난 두 편집자들의 시간까지 아우르며 편집자는 ‘편집은 영원의 다리를 놓는 일이며, 편집자는 불멸의 메신저’라고 말한다. 고정기의 <편집자의 세계>는 전설적 편집자를 조망한다. 헤밍웨이의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 <뉴요커>의 해롤드 로스 등의 역할과 일화를 간단히 적었다. 영미에서는 모두 ‘에디터’라는 명칭을 사용하기에 출판사 편집자와 매거진의 편집장이 혼재되어 있지만 대부분이 제각기 완벽주의자였다고 소개된다. 책을 만드는 일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