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바지에 스민 그림자
닉 도일의 국내 첫 개인전 제목은 <Everything is Fine>이다. 그는 데님의 아름다운 푸른빛과 일상의 사물들을 통해 쓸모없이 거대한 남성성의 탐욕에 이의를 제기한다.
페로탕 갤러리와 아트 파리에서 당신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나?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내 아파트의 가죽 소파에 앉아 시아(Sia)의 노래를 듣고 있다. 너무 덥지 않은 적당한 기온에 시원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온다. 다 그렇겠지만 팬데믹이라는 어려운 나날 속에 서울과 파리라는 국제적인 무대에서 내 작품을 선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고맙게 생각한다. 운이 참 좋은 것 같다.
10월 1일까지 서울에서 열리는 개인전 <Everything Is Fine>에는 데님을 소재로 미국의 남성성을 표현한 작품이 주를 이룬다. 데님, 미국, 남자로 이어지는 코드를 선택한 계기는?
2016년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순간 나는 미국에 대한, 미국 역사가 가지고 있는 모순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미국이 도덕적인 나라임을 믿고 있지만 동시에 아주 어둡고, 인종차별주의적이며, 편견으로 가득한 땅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환금 작물이 바로 인디고다. 목화가 뒤를 이었고 이를 계기로 청바지가 탄생했다. 나는 지나친 남성성의 과시가 남성의 치부를 은폐하는 데 사용된다고 생각한다. 청바지는 미국의 어두운 역사와 그로 인해 우리에게 남아 있는 비극적이고 부도덕한 수치심을 은폐하는 데 동원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주체는 당연히 가부장적인 백인 사회다.
‘미국의 남성성’이 가지는 또 다른 특수성이 있다면?
미국의 남성성은 개인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미국의 이상적인 남성상은 마치 자치적인 섬과 같다. 그는 누구에게 어떤 답도 주지 않는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친구나 가족, 지역사회에 끼치는 악영향 같은 건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정신적, 육체적, 영적으로 유일한 존재여야 한다. 나는 많은 미국 남성이 가지고 있는 이 말도 안 되는 허상이 그 자신을 구제할 수 없는 깊은 외로움에 빠트린다고 생각한다.
전시 제목과 동명의 작품인 ‘Everything Is Fine’이 특히 인상적이다. 8개의 세면도구를 늘어놓은 이미지는 지극히 미국적이다. 미디어를 통해 학습된 이미지일 수 있겠다. 거울 위에 놓인 2개의 암페타민은 의외다. 암페타민을 비롯한 약물이 현대의 미국을 상징한다는 뜻인가?
미국의 약물 문제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확산하고 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잠을 줄여서 더 오래 일해야 한다. 어두운 이야기이지만 일부 제약회사들이 그들에게 환각효과가 있는 약물을 팔아 엄청난 수익을 내고 있는 게 현실이다. 마약도 문제지만 불법으로 유통되고 있는 약물 문제가 시급하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이미 주변의 많은 친구들이 약물에 중독된 상태였다. 나는 약물이 사람을 어떻게 망가트리는지 곁에서 직접 보고 겪었다. 지금 미국의 현실이다.
당신의 작품이 걸린 갤러리에 어느 정도 머물렀다. 쿨하고 세련된 느낌이 먼저였고, 센슈얼함과 원인 모를 파괴성이 이어졌다. 단지 개인적인 감상일까?
그 감상을 정확히 이해한다. 가죽은 센슈얼한 존재다. 최근 나는 ‘수어사이드 벨트’에 매료되었다. 그곳은 카우보이의 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흥미로운 점은 그곳이 미국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인구 통계학적으로 거기 사는 사람은 주로 35~65세 사이의 백인 남성이다. 대부분 혼자 살고, 쉽게 총을 구할 수도 있다. 그들의 죽음과 고통, 지나친 남성성이 연관 있지 않을까? 가죽으로 말의 안장을 만드는 비디오를 본 이후 작업에 가죽을 사용하게 됐다. 문득 윌리 넬슨과 웨일런 제닝스가 부른 컨트리 음악의 가사를 전하고 싶다. “어머니 당신의 아이들이 커서 카우보이가 되도록 두지 마세요. 왜냐면 그들은 평생 집을 떠나 언제나 혼자일 테니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럴 거예요.”
존 포드의 서부극과 범죄 현장을 기록한 사진가 위지, 파격과 아름다움을 오간 사진가 로버트 메이플소프가 떠오르기도 했다. 할리우드 B급 호러 무비도.
나는 미국의 팝 문화 속에서 뭔가 비정상적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극악무도한 폭력과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연결해서 매력적인 욕망을 생성하는 식으로. 그 방식은 포르노그래피와 B급 영화, 초기 서부 영화 속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로버트 메이플소프 역시 흥미로운 주제다. 그의 사진이 미국의 대중에게 안긴 충격은 에로틱함이나 변태적인 요소 때문이 아니다. 부드럽고 엘레강스한 남성의 아름다움을 통해 기존의 억압적인 남성성을 반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LA에서 나고 자란 것으로 안다. 멀리서 보면 그저 아름답지만, 알 수 없는 기이함과 뒤틀린 욕망이 마구 섞여 있는 도시 아닌가?
LA에 관한 당신의 감상이 꽤 흥미롭다. 한쪽에는 할리우드, 디즈니, 워너 브러더스, 넷플릭스, 훌루를 중심으로 거대하고 매끈한 미디어 산업이 자리 잡고 있다. 시선을 돌리면 더 밸리(San Fernando Valley)를 중심으로 한 포르노그래피 산업도 존재한다. 최근에는 비디오 게임을 만드는 제작사도 많아졌다. 장르와 규모를 망라한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상상할 수 없는 불특정 다수의 욕망을 자극하고 조종하고 있다. 내 어머니는 텔레비전 미디어에 관한 글을 쓰는 작가였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영화나 드라마 세트장에 갈 기회가 있었다. 어떤 기술과 전략으로 미디어가 만들어지는지 그 과정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그들이 미디어를 통해 개인의 생각을 어떻게 바꾸는지, 머릿속에 영원히 남게 하는지, 그게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 일인지.
전시 제목 <Everything Is Fine>의 의미를 묻고자 한다. 진정한 위로의 메시지인지, 아니면 어떤 트릭인지.
아주 어두운 농담에 가깝다. 당신이 아주 심한 우울증을 안고 있는데 당신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처럼. 그 사실을 당신의 주변 사람들이 먼저 알게 된 거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잘못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순순히 인정하지 않는 태도 같은 것 말이다. 어떤가, 그냥 딱 미국인 백인 남자가 할 법한 생각 아닌가?
미국인 백인 남성의 반성이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편협하게 나뉜 남성성과 여성성의 잣대를 비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나는 내가 남성적인지 여성적인지 판단하고 구분 짓는 일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늘 알 수 없는 압박감을 품고 살았던 것 같다. 아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낄 거라고 생각한다. 단숨에 바뀌지는 않을 문제다. 더 많은 세대를 거쳐야 한다. 우리는 인식을 바꾸기 위한 노력과 질문을 멈춰선 안 된다.
- 에디터
- 최지웅
- 포토그래퍼
- CHARLES BENTON, COU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