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색의 힘
알록달록한 옷을 즐겨 입는 박서보는 회화의 기존 질서와 법칙을 전복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특히 색의 사용에 있어서 분류하기를 즐기는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당차게 도전하며 대상이 전하는 뉘앙스까지 포괄하는 자기만의 고유한 색을 표현해왔다. 평생 자신이 처한 시대상을 검은색, 오방색, 흰색 등 각기 다른 색을 통해 표현해온 박서보는 2000년 이후 무슨 마음이라도 먹은 듯 강렬하고 선명한 색감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시도는 아날로그 방식에서 디지털 문명으로의 대대적인 전환이라는 시대적 격변 속에서 회화의 역할을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찾은 돌파구라고 할 수 있다. 국내에서 꽤 오랜만에 열리는 그의 개인전 <Park Seo- Bo>에서는 그의 후기 묘법 내지는 색채 묘법으로 알려진 2000년대 이후 작업 16점을 소개하고 자연과 도시 경관의 색감이 어우러진 치유의 공간을 조성한다. 그는 의도된 경험을 강요하거나 메시지를 던지는 대신 화면에 정적인 고요함과 리듬감 있는 활력만을 남겨 현대를 사는 관객들의 불안과 아픔, 스트레스와 혼란 등 저마다의 어려운 마음을 흡인하는 장을 만든다. 박서보와 그의 색이 우리를 빨아들이거나 끌어당기는 시간. 9월 15일부터 10월 31일까지. 국제갤러리 K1.
구름 사이의 햇살
서울의 베리어스 스몰 파이어스(VSF)와 LA의 나이트 갤러리가 함께 준비한 협업 전시 <Sunburst>는 나이트 갤러리 소속 작가 안드레아 마리 브레이링, 미라 댄시, 사마라 골든, 로버트 나바의 신작을 모아 선보인다. 순수한 추상과 구성 회화가 공존하는 색채를 에너지의 원천이자 감정의 채널로 사용해 환상 세계를 구축하며 현실을 관찰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만화경 렌즈를 만든다. 신화 속 인물의 생생한 장면을 기하학적으로 표현하거나 신화와 공상 과학에서 추출한 혼성체와 야생동물을 복잡하게 나열하는 등 지각의 힘, 신체에 저장되어 있는 느낌, 상상력의 힘을 드러내는 정신적 선언을 제시한다.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내고자 하는 새로운 활력과 인간의 인내심을 요구한다. 9월 11일까지. 베이어스 스몰 파이어스 서울.
달빛 왕관의 눈물
이수경은 내내 바리데기 신화에 관심을 가져왔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공주가 병든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사후 세계까지 갔다가 돌아온 후 왕국의 절반을 상속받는 대신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무당이 된 이야기. 전시 <달빛 왕관>을 통해 작가는 마치 바리데기 공주의 금빛 눈물이 용암처럼 흘러내리는 것 같은 조각을 선보인다. 신라의 금관과 백제의 금동대향로의 형태에서 영감을 받아 권력의 상징인 왕관을 머리 위가 아닌 받침대로 두고, 이로부터 사물이자 신체인 작업을 뽑아 올린다. 가까이 다가서면 철, 놋쇠, 유리, 진주, 자개, 원석, 거울 파편 등 다양한 수동적 재료가 얽혀서 작품의 표면을 촘촘히 덮고 있으며, 천사, 기도하는 손, 십자가, 용, 식물, 만화 주인공과 요술봉 등 다양한 상징의 무늬와 형상이 드러난다. 재료들이 모여 생겨난 형태는 파편들의 모자이크로부터 출발해 점차 불꽃에 융해된 듯 녹아내리는 형상으로 나아간다. 파편들이 엉겨붙어 새로운 형태를 보이게 된 왕관은 죽음, 두려움, 좌절의 상황을 넘어 언젠가 예술적 성물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한다. 9월 26일까지. 아트선재센터.
최신기사
- 에디터
- 최지웅
- 포토그래퍼
- COURTESY OF KUKJEGALLERY, VSF, ARTSONJE, PARK SEO 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