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경계심도 없이 개인적인 이야기를 술술 내뱉고, 그의 말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부모님도 친구도 의사도 아닌 역술가 앞에서는 그 어떤 이야기도 가능하다.

 

나는 신을 믿는다. 예수님, 부처님, 알라신이든 뭐든, 어딘가에 신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하지만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실망했던 일이 잦아서인지 신은 믿지만, 신을 믿는 사람들을 믿지 않게 됐다. 그래서 종교와 학문의 중간쯤에 존재하는 듯한 사주, 별자리 같은 것들을 좋아한다. 맹목적인 믿음이라기엔 통계에 가까운 철학인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과학처럼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경계에 있어 믿거나 말거나 알게 뭐야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시간을 되돌려 사주를 처음 봤을 때로 돌아가본다. 압구정 로데오의 사주카페에서 용하다는 역술가가 대뜸 나를 보고 카메라 플래시가 보인다고 했다. 잡지사의 어시스턴트를 하고 있던 시절이라, 촬영장을 뻔질나게 드나들던 시기였으니 그 말에 소름이 돋을 수밖에. 기억이 오래돼 그 밖의 것들은 거의 잊었지만, 오직 그거 하나만은 기억이 선명하다.

사주는 사람을 하나의 집으로 비유한 것이라고 한다. 생년, 생월, 생일, 생시를 운명을 지탱하는 기둥이고, 네 개의 기둥이 모여 집을 이루고 사주가 된다. 어디든 점을 보러 가면 이 네 가지를 꼭 묻는 것이 여기서 비롯된 것일 테다. 보통 목(나무), 화(불), 토(땅), 금(쇠), 수(물), 이 다섯 가지로 사람의 성향을 판단하는데 나는 그중에서도 목, 나무의 성향을 지녔다. 싹이 막 움트기 시작하는 3월, 봄에 태어났기 때문인지 여러 나무 중에서도 봄날의 우거진 수풀에 속한단다. 만약 나를 집으로 표현한다면 초록 잎과 가지로 엮은 나무 집이 되지 않을까? 지금까지 만났던 역술가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나는 물이 없어서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금이 없어 거절을 못하는 성향을 지녔다고 한다. 보통 나무 사주라고 하면 물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때가 되면 가지치기를 하듯, 우거진 풀에 불을 붙여 쳐내거나 금으로 다듬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 정도 알았으면 되지않았냐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아직도 궁금한 것이 많다. 그리고 고백하자면 나는 근 3년 동안 사주, 별자리, 신점과 같은 것들에 거의 홀린 듯이 빠져들었다. 뭐가 그렇게 불안하고 궁금했는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용하다는 곳을 찾아 다니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전화로 상담을 받기도 했다. 작년 겨울, 이제 다신 남들이 해석해주는 운명 따위엔 의지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지난 주말 나는 신촌의 이름 모를 오피스텔에 앉아 내 이름과 생년, 월시를 줄줄이 읊어대는 일을 또 저지르고 말았다. 사주를 믿지 않는 사람도 그곳에선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고 나온다는 학교 선배의 말에 홀라당 넘어가버렸다. 한 시간가량 대화를 나눈 결과(사실 그분의 일방적인 조언에 가까웠지만), 나는 100년 인생을 통틀어 내년에 가장 힘든 해를 보낼 것이라고 했다. 특히 사람 때문에 힘들 거니 기대하지 말고, 쉽게 마음 주지 말고, 남과 나를 분리해서 생각하라는 해결책도 곁들였다. 몇 가지의 질문과 답이 오가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흘렀고 넋이 나간 채 후다닥 그곳을 빠져나왔다. 좋은 말만을 듣기 위해 가는 건 아니지만 도대체 얼마나 힘들길래 저렇게까지 말하는 건지 두려움이 엄습했다. 하지만 곱씹어 생각해보니 20대에 힘들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이미 알고 있던 일이니 타격이 덜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돼 있고 수많은 장애물을 어떻게 잘 넘어갈지 궁리하면 될 일이라고 다독였다.

나에게 사주를 보러 가는 것이 왜 리트리트냐 묻는다면 가장 큰 이유는 시간에 휩쓸려 사느라 잊었던 내 모습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여려 보이지만 속에는 남자가 들어 있다’, ‘하고 싶은 건 꼭 하고 살아야 한다’ 등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다시금 깨닫고, 원하는 모습과 방향으로 나를 다시 정의해보기도 한다. 그렇게 나는 또 내 마음을 당최 알 수가 없을 때, 형체 없는 불안이 나를 집어삼켜 괴로워지면 사주를 보러 간다. 괴롭고 힘든 상황을 운명의 탓이라고 치부해버리는 일은 어떤 심리상담보다 나를 치유하는 힘이 되지 않는가. 또 모든 이유를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것만큼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일은 없으니까 말이다. 눈앞에 닥친 행운도 불행도 그저 운명의 뜻이라고 여기면 한동안 시끄러웠던 고민들의 볼륨을 잠시 낮출 수 있다.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이었다고 여기며 마음의 중심을 잡는 것이다. 역술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도, 진짜 운명대로 삶이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나도 안다. 모든 결과는 내 선택의 과정인 것을. 누군가는 ‘그런 말은 나도 해줄 수 있어.’, ‘그 돈 나한테 주면 내가 상담해줄게’라고 말하지만 나는 고민이 생기고 마음이 불안하면 용하다는 역술가를 또 찾아갈 거다. 나에게 복비는 누군가의 헌금이자 공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