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 숨어 영화를 본다. 쓸모 없을 뻔했던 영혼이 그제야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영화가 끝나면 커튼이 올라가며 바깥 풍경이 보이는 예술영화관 아트나인.

그땐 몰랐는데 지금은 안다. 어린 시절 아침마다 괴롭게 눈을 뜰 때마다 불과 어제의 나는 싹 다 사라지고 완전히 새로 태어나기를 바랐다. 살금살금 겨우 눈을 떠봤자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일 뿐 무슨 별난 짓을 해도 영영 그대로인 걸 어느 정도는 빨리 받아들인 편이다. 종종 “어떤 영화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을 받을 땐 열네 살에 폼 잡고 쓴 싸이월드 다이어리를 인스타그램에 실수로 공유한 것 같은 기분이 된다. 딱 그런 표정이라는 걸 새삼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고도 느낀다. 좋아하는 영화도 이만큼, 맹목적으로 비난하는 영화도 한 트럭이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극장에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고 스크린으로 광선 같은 빛이 마구 쏟아져 내릴 때, 모르는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 가보지 않은 세계의 무수한 삶과 죽음을 마주한 다음 털고 일어나 각자 갈 길을 갈 때면 이상하게도 외롭지 않았다. 대체로 그때뿐이었지만 썩 괜찮은 인간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방전된 배터리를 충전하듯 혼자 극장에 가고 극장에 가고 극장에 갔다. 영화를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어두운 극장으로의 도피와 단절, 기묘한 연대감을 원하는 건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지금은 자리를 옮겼지만 기형도가 자주 드나들었다는 종로 3가 어귀, 낙원상가 꼭대기에 서울아트시네마가 있었다. 종로의 뒷골목은 알 수 없는 어느 곳에서 몰려든 이들로 온종일 부산하거나 특유의 야릇한 기운이 넘실거리는데 악기 상가의 계단을 차곡차곡 올라 극장에 도착하면 지상의 소란은 온데간데없고 늘 제법 한적했다. 나는 아마 불안하고 근심 어린 낯빛으로 혹은 적잖이 상기된 표정과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극장 앞을 서성였을 것이다. 어쩌면 그 가운데 누군가는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이를 난생처음 마주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칸과 오스카를 휩쓴 저 유명한 감독들이 인사동이 내려다보이는 옥상 끝에서 담배를 피우며 시시덕거릴 땐 담배도 피울 줄 모르는 주제에 괜히 곁에 머물러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곤 했다. 지금 알고 있는 영화들, 사랑하고 들춰보는 영화들,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지만 어딘가에 무의식으로 남아 있을 이름들을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그 낡은 극장에서 다 배웠다. 이게 뭐 하자는 이야기인가 눈을 부릅뜨고 스크린을 째려보다가 최면에 걸린 듯 깊은 램 수면에 이르는 순간이 잦았지만 눈만 감았을 뿐 다 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장 뤽 고다르는 인지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가와세 나오미의 팬이다. 한파가 닥친 어느 해 겨울, 난방도 잘되지 않아 냉장고처럼 차가운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그 이름을 처음 알았다. 그는 너무 일찍 부모와 헤어졌다. 바람난 아버지는 떠나버렸고 어머니도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섰다. 외할머니는 남겨진 외손녀를 자신의 딸로 입양했다. 다 자랄 때까지 그는 늘 혼자였다. 각종 혼자 놀기를 섭렵한 다음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8mm 카메라를 만지작거리게 되었다. 스무 살이 좀 넘었을 때 카메라 하나 덜렁 들고 불현듯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그 기록은 <따뜻한 포옹>이라는 제목으로 남았는데 그야말로 엉성하고 유치한 구석이 차고 넘치는 영화다. 가와세 나오미는 개의치 않는다. 애초에 평론가니 관객이니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하여 만든 영화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쥔 가와세 나오미는 혼잣말을 하기 시작한다.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나는 왜 늘 슬픈 거지?” 짧은 여행을 끝내고 나라현의 집으로 돌아온 그는 용기를 내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건다. “저는 가와세 나오미입니다. 음, 그러니까 당신의 딸입니다.” 영화를 보다가 그토록 서럽게 펑펑 운 건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가와세 나오미에게 영화는 자신을 향한 하소연이자 서글픈 질문이다. 가와세 나오미는 그 후로 지금까지 영화를 통해 슬픔을 치유하고 저 스스로를 일으켜 세웠다. 몇 년 전, 엄마가 되어 훌쩍 자란 아들의 손을 잡고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를 찾은 그를 짧게 인터뷰한 일이 있다. 영화가 여전히 치유의 역할을 하는지, 혹시 또 다른 고통을 가져다주진 않는지 물었더니 그랬다. “영화를 찍으면서 전혀 몰랐던 사실을 알고, 모르는 사람을 만나고 익숙한 개념의 틀을 깹니다.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건 고통스럽기도 하죠. 그걸 극복하면 얻는 자극이 더 매력적이에요. 지금은 여러 사람의 힘을 모아 영화를 찍는 게 꼭 축제 같다고 생각해요.” <어느 가족>의 국내 개봉을 앞두고 몇 달간 영화사를 조르고 졸라 어렵게 주고받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편지에 그와 똑같은 바람이 적혀 있었다. 영화를 만드는 일이 축제 같기를. 며칠 전 개막한 칸국제영화제의 개막식에서 개막 선언을 위해 무대에 오른 봉준호 감독은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에서 기차가 달린 이후 영화제가 멈춘 적은 있지만 시네마가 멈춘 순간은 없다”라고 말했다. 한편, 지금 서울의 극장 아트나인에서는 배우 유태오의 아내이기 전에 정체성을 화두로 대담한 작업을 선보인 내 친구 니키 리의 다큐멘터리 <니키리라고도 알려진>을 상영한다. 10월에 개막하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가와세 나오미의 장편 데뷔작 <수자쿠>를 다시 볼 수 있다. 닫혔던 국경과 극장과 운집의 영화제가 다시 조심스럽게 문을 여는 듯하더니 다시 또 새로운 국면을 맞는 모양새다. 나는 다짜고짜 하노이를 걷다가 마주친 아름다운 이름의 낡은 극장 ‘8월’을 생각한다. 영화와 극장이 그리운 8월. 아무튼 그리운 게 있다는 건 좋은 징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