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실거리는 머리카락에 담긴 나의 혹은 당신의 이야기.

 

프린트 톱은 티크(teak).

나는 실용적인 면을 꽤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오로지 내 기분만을 위한 소비는 잘 하지 않는다. 돈을 쓸 때는 비록 나만 알아차릴 수 있더라도 티가 나길 바란다. 나는 그래야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다. 내게 ‘리트리트’란 자신을 대접하는 행위인 동시에 내게 필요한 것이어야 하며 또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어야 한다. 사실 나에게 주는 최고의 대접, 휴식은 마사지를 받는 것이다. 하지만 에스테티션과의 궁합에 따라 받고 난 후 되레 컨디션이 악화되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눈에 보이는 효과가 없으니 탈락! 그래서 나에게 최적화된 리트리트 장소는 ‘헤어숍’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염색하지 않은 검은색 긴 머리를 고집하다 보니 미용실에서는 가끔 펌 시술을 하는 정도가 전부다.

모발이 두꺼워 펌도 오래간다. 이러니 미용실에 가는 건 내게 시즌 행사 같은 일이다. 고작 일년에 두세 번 방문하는 곳인 만큼 이왕이면 아티스트의 실력, 분위기, 인지도 등을 두루 갖춘 숍으로 고른다. 자기 합리화지만 남들보다 드물게 방문하기에 비용은 좀 들여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감 후 지친 나를 이끌고 리트리트를 위해 찾는 헤어숍은 도산공원 근처에 위치한 차홍 아르더 본점이다. <얼루어> 사무실과 가깝다는 것도 또 하나의 실용적인 이유다. 언제나 많은 사람이 찾는 유명한 미용실이지만, 북적이거나 소란스럽진 않다. 숨막히는 일상 중 들르면 잠시 시간을 멈춘 듯 평온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큰 매력이다.

외관부터 대기실의 의자, 화장실에 놓인 타월 등 사소한 모든 것들이 단정함을 유지하고 있으며, 사람을 위하는 마음이 구석구석에서 묻어나는 곳. 불편한 신발을 신은 고객을 위한 실내용 슬리퍼, 얇은 가운 주머니에 넣어도 걸리적거리지 않는 패브릭 로커 열쇠고리, 샴푸 중에도 마스크 착용이 필수인 요즘 시국을 반영한 얼굴에 붙이는 마스크 등. 고객이 조금 더 편하게 머물다 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준비한 소품들과 스태프의 다정한 한마디, 한마디가 모여 힐링 공간이 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뷰티 시술이 그렇듯 여기서도 어느 정도 고통은 따른다. “예뻐지려면 참아야 한다”고들 하지 않는가. 바로 기다림이라는 고통.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만 있었는데 피로가 쌓이는 기분, 펌이나 염색 시술을 해본 사람이라면 모두 공감할 것이다. 한적한 시간대를 선호하기에 첫 예약 타임인 10시에 서둘러 도착했지만 어느덧 시간은 오후 1시, 보통은 3시간이면 충분하지만, 이번엔 모발 케어 프로그램까지 받기로 한지라 한 시간 이상을 더 앉은 채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아침도 못 먹고 급하게 미용실로 향한 터라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르고(많은 헤어숍이 코로나 이후 실내에서의 음료 섭취를 제한하고 있다. 원하면 테라스에서 마시고 올 수 있다) 좀이 쑤신다. 그럼에도 쉽게 찾아오지 않는 육체가 한가한 이 시간을 최대한 즐겼다.

이렇게 반강제적으로 손발이 묶이는 상황은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게 온전한 휴식을 선사한다. 놀 거리는 휴대폰 하나면 충분했다. 먼저 그간 볼 짬이 없어 미뤄둔 웹툰을 보고, 최근 입을 만한 여름 팬츠가 없었기에 모바일 쇼핑에 나섰다. 열정적인 쇼핑으로 눈이 좀 피곤해지자, 테이블 위에 놓인 잡지를 펼쳐 볼까 했지만, 직업이 에디터인지라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일의 연장선이 될 수도 있으니까. 테라스 쪽으로 눈을 돌리니 마침 이 미용실의 마스코트 고양이 짜짜가 등장! 담당 헤어 아티스트인 김주연 수석 실장이 들려줬던 대로 날렵한 몸매를 자랑하는 검은 고양이였다. ‘냥이 맞아?’ 싶은 애교 많은 짜짜의 몸짓을 감상하며 피식거리다 보니 어느새 펌제 중화의 시간이 다가왔다.

“자주 안 오셔서 오히려 펌이 잘 나와요.” 시술 마무리를 하던 헤어 아티스트가 이번 시술도 성공적이라고 기뻐했다. 과정이 아무리 좋아도 결과가 나쁘면 다신 찾지 않을 수 있는데, 이곳의 펌은 언제나 나의 취향을 저격한다. 구불구불하지만 인위적이지 않은, 내가 꾸준히 추구해온 이포트리스 시크 스타일이다. 그리고 미용실에 들르는 모두가 그렇듯 의자에 앉은 나를 중심으로 담당 아티스트와 그의 어시스턴트가 오밀조밀 모여 요즘 여자들의 관심사를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친한 친구에게 하는 속깊은 이야기까지는 아니지만,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작은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곳, 친분이 아닌 필요에 의한 발걸음이지만, 만나면 반가운 사람도 있으며 기다림이라는 명분으로 한껏 여유로울 수 있는 곳. 그렇게 또 한 번 마음과 헤어스타일에 편안한 에너지가 더해졌다. 마음에 드는 펌 시술을 받고 나면 샴푸 후 머리만 잘 말려도 스타일링이 끝난다. 이 또한 내가 선택한 리트리트의 순기능이자 가장 바랐던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