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을 졸여 잼을 만드는 것은 오늘의 귀한 시간을 살균한 유리병 속에 멈추게끔 한다. 좋은 기억만 간직한 채 두고두고 꺼내 먹을 수 있도록.

 

사워체리잼의 향기

스위스의 식물학자 디칸돌의 연구에 의하면 체리의 고향은 이란 북부에서 흑해 연안 지방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이란 출신의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체리 향기>를 생각한다. 한 남자가 자동차를 몰고 황량한 벌판을 달린다. 까만 밤이 오자 수면제를 털어먹는다. “난 오늘 자살을 하려고 집을 나섰지만, 체리를 보고 마음이 바뀌었어요.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 보여요. 모든 걸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어때요? 떠오르는 첫 태양을 마주한 순간, 맑은 샘물로 세수를 할 때의 상쾌함, 보름달이 크게 뜬 밤하늘, 혀끝에 감도는 체리 향기를 생각해봐요.” 사워체리잼은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시큼한 타트체리로 만든다. 빵에 발라 먹어도 산뜻하고, 따뜻한 물에 한 숟갈 풀어 체리차로 마셔도 좋다. 탄산수에 섞어 에이드로 마셔도 그럴 듯한 맛이 된다. 이태원의 터키쉬 베이커리 주인 에네스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이나 곱게 간 얼음을 추천한다. 사워체리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 바닐라 아이스크림의 풍미를, 사워체리 셔벗의 상쾌함을 맛본다면 영영 살고 싶어질 거라나.

 

블루베리잼이 자라면

폴리 호배스의 소설 <블루베리잼을 만드는 계절>은 블루베리가 익는 시간과 잼을 졸이는 시간을 통해 성장을 말한다. 잼을 만들 듯 각자의 사연과 상처, 비밀과 지혜 같은 좋거나 혹은 나쁜 모든 기운이 용암처럼 끓어 넘쳐 하나로 섞이는 순간 나쁜 균은 다 죽어 다신 곪거나 썩지 않게 될까. 블루베리잼을 만들기에 적합한 계절은 언제인지 궁금해졌다. 전 세계 블루베리의 90% 정도를 생산하는 북미에서는 본격 수확 철인 7월을 ‘블루베리의 달’로 부른다니 지금이 적기다. 잼도 잼이지만 생과를 죠리퐁 대하듯 한 주먹씩 왕창 집어 먹어도 당당할 수 있는 계절. “통영의 지역특산물입니다. 안토시아닌 아시죠? 보라색. 눈에 좋은 거. 노화 예방, 다이어트에도 좋고요. 다 좋아요. 수입산보다 쪼매 비싸지만 싱싱하니까요. 영 달라요.” 통영시 농업기술센터 농업기술과의 문영훈 주무관은 평생 블루베리잼을 만들어보지도, 먹어본 일도 없다고 했다. 오븐에서 갓 나온 오월의 종 캉파뉴를 특송 택배로 통영의 그에게 선물로 보낸다면.

 

레몬, 라임 마멀레이드의 밤

레몬과 라임은 비슷하다. 하지만 꽤 분명한 차이도 있다. 레몬을 떠올리면 대번 마티스의 레몬이라는 잘 익은 컬러가 따라붙지만 라임의 초록은 그에 비해 미숙하다. 레몬은 새콤함과 단맛을 동시에 품고 있지만, 라임은 씁쓸한 맛이 먼저 강하게 치고 든다. 라임의 쌉싸름한 향은 레몬의 달콤함에 풍미를 더한다. 상호 보완의 관계이자 상승의 관계라고 이야기하는 건 어떨까. 진토닉 몇 잔 마시기 위해 레몬과 라임을 사들였지만 그걸 다 먹어 치우는 경우는 또 드물다. 냉장고에 굴러 다니는 레몬과 라임을 버리지는 못하고 속이 상해 씩씩거린다. 르 꼬르동 블루 서울에서 그랑 디플로마 과정을 이수한 김도형 셰프는 남아도는 과일이야말로 잼으로 만들기에 좋은 재료라고 말한다. “아무리 상태가 좋지 않은 과일이라도 잼으로 만들면 고유의 맛과 향이 다시 살아나요. 레몬과 라임이 더 말라 비틀어지기 전에 냄비에 레몬과 라임 제스트, 설탕을 넣고 졸여보세요.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잼을 졸이고 있으면 그렇게 평온할 수가 없어요. 집 안 가득 레몬과 라임, 설탕의 감미로운 향기가 퍼진다고 생각해보세요. 잼을 먹는 것보다 잼을 만드는 그 시간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밤의 고요는 잼처럼 진득하고 아늑하다.

 

살구잼의 존재감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역사학자인 엘리오의 아버지 펄먼 교수와 올리버는 ‘살구’라는 단어의 기원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데 이때 우리는 ‘살구’라는 단어가 그리스와 비잔틴, 아랍 문화권의 영향을 받으며 지금의 모습으로 변형되어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건 살구라는 ‘존재’는 같지만 그 존재가 언제, 어떤 환경에서 누구에게 불리느냐에 따라 다른 이름을 가진다는 것이다. 살구가 여름 과일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복숭아와 자두와 세트처럼 잠깐 나왔다가 후다닥 들어간다. 복숭아와 자두가 폭발하듯 향을 뽐낸다면 살구는 있는 듯 없는 듯 은은하다. 반으로 쪼개면 엽전 같은 씨가 자동으로 툭 분리되어 혀로 뭉개도 좋을 만큼 부드러운 과육만 남는다. 그야말로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맛. 입맛이 달아난 여름 점심은 싱싱한 채소를 푹푹 찢어 만든 샐러드가 최고다. 올리브 오일과 비네거 한두 방울이면 드레싱은 완성이지만 살구잼 한 스푼을 더한다면 맛은 완전히 다른 쪽으로 방향을 튼다. 신선한 그릭 요거트에 레몬 제스트를 쓱쓱 긁어내듯 갈아 넣으면 또 다른 드라마가 시작된다. 살구잼의 존재는 같지만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그 존재감은 달라진다.

 

아무튼 키위잼

키위가 키위인지 참다래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일단 먹는다. 키위와 참다래는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농수산진흥원 이목희 농업연구사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은 같은 과일이다. 뉴질랜드의 ‘제스프리’로 유명한 키위의 원산지는 중국 양쯔강 유역이다. 뉴질랜드와 미국에선 구즈베리와 맛이 비슷하다고 ‘차이니스 구즈베리’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멜로네트’라는 이름을 거쳐 뉴질랜드의 국조인 키위와 생김새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키위 프루트’라는 이름으로 변했고, 지금의 ‘키위’가 된 거란다. ‘참다래’는 키위의 한국식 이름이다. 1970년대 후반 한국에 도입, 재배되기 시작하다가 1991년 키위가 농산물 수입 자유화 대상에 포함되어 타격을 받았는데, 이때 국내산 키위를 ‘참다래’라고 부르기 시작했단다. 무슨 소동인가 싶지만 아무튼 키위와 참다래, 참다래와 키위는 각자의 사정으로 이름만 다를 뿐 결국 하나다. 키위는 고기와 궁합이 좋다. 푸드 스타일리스트 김은아는 키위잼을 곁들인 갈비 스테이크를 추천한다. 도톰한 스테이크용 쇠고기를 익숙한 갈비 양념에 재워 굽는다. 스테이크 위에 키위잼을 좀 투박하게 끼얹어준다. 홀그레인 머스터드로 산미를 조절해도 좋다. 키위와 참다래, 갈비와 스테이크에 이르는 대통합의 길.

 

오렌지 마멀레이드를 먹는 법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는 유난히 음식과 관련된 구절이 자주 등장한다.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를 여행하며 먹거나 먹지 못한 음식은 많기도 한데 그 첫 번째가 오렌지 마멀레이드다. “앨리스는 떨어지면서 선반 위에 있던 병을 한 개 끄집어냈어요. 병에는 ‘오렌지 마멀레이드’라고 쓰여 있었는데, 실망스럽게도 빈 병이었어요. 하지만 그냥 던져버리면 아래 있는 누군가가 병에 맞아 죽을까봐 겨우겨우 선반 위에 도로 올려놓았답니다.” 이상한 나라에 도착한 앨리스는 체리 타르트에 커스터드, 파인애플, 칠면조 구이, 토피 사탕, 뜨거운 버터 토스트를 섞은 것 같은 맛이 나는 음료를 마신 뒤 몸이 줄거나 건포도로 장식한 이상한 케이크 한 조각을 먹었더니 세상에서 가장 큰 망원경처럼 훌쩍 커지기도 한다. 앨리스의 신비한 모험은 하트 여왕이 만든 타르트를 훔쳐 먹은 하트 잭의 재판에서 절정에 달한다.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증인들 틈에서 당당히 “넌 아무것도 아냐!”라고 소리치던 앨리스는 다정한 언니의 목소리에 오후의 단잠에서 깨어난다. 오렌지 마멀레이드를 듬뿍 올린 스콘에 홍차 한 모금을 곁들인다. 서울 말고 영국에서. 그렇다면 이것도 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