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가득 머금은 여름 과일과 투명한 술 한 잔. 덥고 쨍한 날일수록 절실해지는 낮술의 시간.

 

‘술시’란 본래 오후 7시부터 9시를 뜻하는 옛말이다. 마침 저녁을 먹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이다 보니 ‘술을 마시는 시간’이라는 의미도 은근슬쩍 통용된다. 그러나 누구나 생체리듬이 다르듯 모두의 술시가 같은 것은 아니다. 나의 술시는 해가 쨍쨍하게 빛나는 낮 2시부터 시작된다. 낮술이라 한다면 팔자 좋게 늘어져 한껏 여유롭게 즐기는 것이 기본이겠지만, 나의 술시를 결정적으로 앞당긴 낮술의 경험은 빽빽한 취재 일정 속에서 이루어졌다. 기자로서 처음 취재를 나간 곳은 이태원의 탭퍼블릭이었다. 무려 60여 종의 수제맥주를 맛볼 수 있는 곳이었는데, 들어서자마자 벽면을 가득 채운 탭핸들에 압도되었다. 당연히 모든 맥주를 먹을 수는 없었지만 시그니처와 인기메뉴, 추천 메뉴, 한정 메뉴 등을 묻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번 맛보세요!”라는 말이 나왔고 그럴 때면 어쩔 수 없는 척, 하지만 누구보다 기쁘게 잔을 비웠다. 이건 기사를 쓰기 위해서야, 맛을 봐야 기사를 쓰지, 책임감을 빙자해 사적인 즐거움을 채우며 조금씩 홀짝이다 보니 사무실로 돌아갈 쯤에는 은근슬쩍 술기운이 올라왔다. 다시 일을 하러 가는 길이었지만 한낮의 한남대교를 건너며 나는 조금 행복했다. ‘이 일을 하길 잘했어. 술 마시는 게 일이라니.’ 그것이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즐거움을 실감한 첫경험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반짝거리는 한강을 내다보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벅차올랐던 감정은 잔상처럼 남았다. 아무래도 꽤 취했던 게 분명하다. 첫 취재와 에디터로서의 첫 즐거움이 함께 맞물린 낮술의 경험은 강렬했고, 틈만 나면 흠뻑 빠져들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나의 낮술 지론은 딱 세 가지다. 해가 드는 곳에 자리 잡을 것, 향이 좋은 술을 마실 것, 그리고 내 멋대로 마실 것. 세 가지의 목적은 같다. 감각을 고양시키고 감각을 즐기고 감각에 집중할 것, 그것이 낮술의 전부다. 특히 혼자 마시는 낮술은 자신의 몸을 온전히 느끼게 된다는 점에서 명상과 비슷하다. 혼술은 무릇 평소보다 빠르게 마시기 마련이기에 주량의 반쯤 마셨을지라도 금세 취하게 된다. 거기에 해까지 떠 있다면 몸은 쉽게 달구어지고 온몸에 피가 더 빨리 도니 알코올을 운반하는 혈액도 딱 그만큼 내달린다. 눈을 감고 그 뜨거움을 느낀다. 편안히 기대어 힘을 뺄 수 있는 자세라면 훨씬 좋다. 까무룩 잠이 들기 직전, 혼몽의 경계에서 너울거린다. 어딘가에 부유하듯 정신은 가벼워지는데 그럴수록 신체의 존재감은 선명해진다. 송골송골 땀이 맺히기 시작하는 이마와 콧잔등, 붉어지는 뺨과 귀, 침 한 번 삼키고 숨 한 번 내쉬는 것조차 아주 큰 움직임으로 느껴지는 순간,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술을 다시 들이켠다. 정수리까지 번쩍 정신이 드는 듯하다가 어느새 일렁이는 감각으로 빠져든다. 물밖에서 물속에 있는 기분, 풍덩 뛰어들었다가 파도에 온몸을 내맡긴 듯한 찰나의 방임은 술을 마시는 그곳이 어디든, 바다로 떠난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흰 천과 바람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던 드라마 대사에 손발을 접으며 괴로워했건만, 이제는 해와 술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곳을 잊고 저곳으로 넘어가는 낮술은 짧은 여행과도 같다.

후우, 반쯤 풀린 눈으로 심호흡을 한다. 마스크를 쓰기 시작하며 급증한 가글 판매량이 보여주듯, 우리는 잊고 있던 속냄새를 의외의 순간에 마주한다. 거세진 콧김 사이로 그날 마신 술내음이 고스란히 되돌아온다. 향이 좋은 술을 마실 것, 두 번째 지론의 이유다. 이번 여름에는 국내산 진 ‘정원’과 캔와인 ‘웨스트 와일더’에 빠졌다. 정원은 이름 그대로 푸릇한 정원 한가운데 있는 듯, 첫 모금부터 싱그러운 향이 물씬 피어오른다. 부드럽게 올라오는 솔잎 향을 최대한으로 느끼고 싶어 토닉워터보다는 탄산수를 부어 마시는 걸 좋아한다. 본래의 향을 어느 정도 즐겼다면 좋아하는 과일을 이것저것 빠뜨리기도 한다. 맑은 술과 잘 어울리는 복숭아와 자두는 숭덩숭덩 잘라 넣고, 산딸기와 블루베리는 그대로 퐁당퐁당 던져 넣고, 진과의 궁합은 말할 것도 없는 레몬과 라임은 얇게 슬라이스한다. 과일을 곁들여 먹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과감하게 빠뜨리게 된 것은 삼각지에 위치한 바 ‘애시드 서울’에서 프루츠 사워를 맛본 덕분이다. 과일의 맛이 스며든 술과, 술의 향을 머금은 과일은 이제 여름을 기억하는 하나의 방식이 되었다. 빠르고 간편하게 후루룩 마시고 싶은 날은 편의점에서 컵얼음을 하나 사 들고 곧바로 캔와인을 딴다. 사실 와인의 맛을 아직 모르겠다. 다이닝에서 마실 때는 비싸면 괜히 더 맛있는 것 같고, 조금씩 마시면 섬세하게 음미할 수 있을 것만 같지만 실상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말하자면 레스토랑에서의 나는 단숨에 들이켜고 싶은 욕망을 꾹 누르며, 있는 척하며 와인을 마신다. 정작 내가 가장 맛있게 마시는 와인은 플라스틱 얼음컵에 찰랑찰랑하게 넘칠 듯 채워 고개를 젖혀가면서 마시는 와인이다. 생산지가 어디고, 무엇과 페어링하고, 어떤 향이 느껴지고… 와인에도 교양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기꺼이 무뢰한을 자처하고 싶다. 정해진 규칙, 그것이 통상적인 술시든 관습적인 주도이든 간에 상관없이 내 몸이 가는 대로 가볍게 선을 넘는 것, 귀여운 위반이 가져다주는 자유의 감각이 즐거워 혼자 마시는 낮술을 끊지 못한다. 마침 오전에 갓 수확한 황도 한 박스가 도착했다. 이번 주말을 채울 맑은 술을 준비할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