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빛나는 순간>은 늙은 해녀와 청년의 사랑을 말한다. 제주도는 조금 다른 모양을 한 그 사랑을 아랑곳하지 않고 큰 품으로 끌어안는다. 얼굴 자체가 제주의 풍경과도 같은 배우 고두심과 갈수록 순수한 마음을 믿는 지현우, 용기 내어 밀어붙일 줄 아는 감독 소준문이 제주 아닌 파주에서 함께한 반짝이는 순간들.

지현우가 입은 프린트 실크 셔츠, 브라운 알레산드로 슈즈는 벨루티(Berluti). 베이지 라인 테일러 팬츠는 랜덤 아이덴티티(Random Identities). 고두심이 입은 블랙 버튼업 미디 드레스는 웨일즈 보너 바이 분더샵(WalesBonner by Boon the Shop). 골드 링은 골든듀(Golden Dew).

[ 배우 고두심 ]

제주도에서 바로 오신 거죠?
맞아요. 어제 <빛나는 순간>의 제주 언론 시사회가 있었거든요. 밤에 잠깐 눈 붙이고 일어나서 바로 온 거예요. 김포공항에서 바로. 근데 사진 찍었으면 됐지. 무슨 유튜브에 인터뷰까지 시켜? 너무해, 진짜. 하하. 빨리 좀 보내줘요.(웃음)

안 돼요. 좀 더 계세요. 그나저나 제주에서 사다 주신 오메기떡 맛있었어요. 고마워서 마음이 괜히 좀 그랬어요.
촬영하는데 스태프들이랑 한 쪽씩이라도 나눠 먹으면 좋잖아요. 오메기떡은 맛있다고 너무들 좋아해. 나도 좋아하고. 나눠 먹는 정이 있잖아요. 제주도에서 제일 잘하는 집 떡이에요. 우리 조카가 새벽부터 가서 사 온 거예요.

<빛나는 순간> 촬영할 때 스태프들 밥이며 간식이며 다 그렇게 직접 챙기셨다고 들었어요. 그게 좋으신 거죠?
내 고향에 손님들이 온 거잖아요. 두 달간 제주에 머물면서 촬영했는데 저도 오랜만에 고향에서 그렇게 머문 거예요. 고두심 하면 제주도잖아요. 제주도 하면 고두심이고. 옛날부터 무슨 작은 행사 같은 것만 있어도 고두심을 불렀어, 막. 나는 그럼 또 조건 없이 그냥 달려갔어요. 근데 어느 해인가 선거철에 잘못 얽힌 적이 있어요. 내 딴에는 순수한 마음이었는데 오해가 있었어요. 제주도가 좁잖아요. 고향 사람 다 나를 좋아했는데 그때 딱 반으로 갈라지더라고. 나한테는 굉장히 슬픈 일이고 큰 상처였거든요. 한동안 고향의 끈을 놓고 살다가 이번 영화 덕분에 다시 그렇게 갔죠. 오랜만에 고향에서 지내니까 너무 좋더라고요. 촬영 쉬는 날 스태프들 데리고 맛있는 집 가서 밥 먹이고 같이 놀러 다니고 그랬어요. 영화 속에서 해녀를 연기했는데요. 그 정신이 제주의 혼이나 다름없어요.

그게 뭔데요?
생명줄이요. 그 직업 자체가 생명을 걸고 하는 일이잖아요. 바닷속에 들어가서 숨만 조금 잘못 쉬면 그냥 죽는 거예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고달픈 직업이에요. 해녀들을 보고 있으면요. 그냥 막 가슴이 먹먹해져요. 경계가 없이 그저 다 아우르는 큰 그릇이 있어요. 그게 제주도의 혼이에요. 정신이고.

어제 만난 제주도 관객은 <빛나는 순간>을 어떻게 느낀 것 같던가요?
사람들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어른들은 어른들 대로 ‘우리도 애정의 끈을 놓으면 안 되겠다. 희망을 품어야겠다’ 그런 정다운 농담도 막 하시고요.(웃음)

이번 영화는 아주 마음먹고 신나게 자랑하시는 것 같아요.
그 흥분이 이렇게 보여요. 잘 봤어요.(웃음) 특히 좀 그렇죠? 우리가 지금 굉장히 어려운 시절을 겪고 있잖아요. 모든 게 잠들어 있는 나날이고요. 힘들게 생활하는 영화 예술인들이 많아요. 제작사들도 어렵고요. 함께 힘내고 싶은 마음도 있고, 또 무엇보다 내 고향 제주도의 향기와 정신과 혼이 깃들어 있는 영화이기도 해서 더 특별하죠. 열심히 알리고 싶어요. 이번 기회로 내 체력의 한계를 한번 저울질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어서 더 그래요. 그럴 때인 것 같아요.

그레이 드레이프 셰이프의 슬리브리스 톱과 스커트는 이세이 미야케(Issey Miyake). 실버 포인티드 힐 뮬은 콰이단 에디션(Kwaidan Editions).

제주도는 어떤 곳인가요?
아름다운 풍속이 진짜 많아요. 제주도에는 예부터 대문이 없는 거 알죠? 마당에 앉아서 밥 먹고 있는데 아는 얼굴이 지나가면 밥 숟가락 하나 더 올려놓고 같이 밥 먹고 그래요. 제가 그렇게 자랐어요. 그래서 누구네 집에 미리 약속하고 가는 걸 해본 일이 없어요. “화요일 오후 3시에 놀러 갈게” 그런 걸 못해요.(웃음) 그냥 지나가다가 “삼촌 나 물 한잔 줍서” 하고 들어가는 거죠. 제주도에서는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이웃집 사람들을 다 삼촌이라고 해요. 괸당. 괸당은 친척이거든요. 이웃사촌이 다 친척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요. 정말 아름답지 않아요? 순우름이라고 품앗이처럼 이 집에 일이 있으면 동네 사람 다 와서 도와줘요. 조건 없이. 그리고 또 조냥 정신이라고 있어. 너무 척박한 땅이라 돈 될 게 없으니까 뭐든 근면하고 아껴야 한다 이거야. 그거 외에는 살길이 없으니까. 그런 절약 정신도 참 좋은 풍습이죠.

좀 웃을게요. 너무 피곤해서 인터뷰도 안 하고 싶다더니 무슨 제주 문화 해설사처럼 숨도 안 쉬고 막 신나게 말하시네요.
힘들어도 또 하면 막 하죠.(웃음) 고향 얘기하라고 하면 난 밤도 다 새울 수 있어. 제주도에서 태어난 걸 얼마나 감사하게 생각하는지 몰라요.

사자 머리 같던 파마머리도 쭉쭉 펴서 이렇게 쫙 붙이고 화장도 하고 손톱에도 뭘 바르고 화보 촬영한 소감은요?
아이고, 말해 뭐해. 생소했죠. 나와 닮지 않은 패셔너블한 옷들이었잖아요. 과연 사진으로 멋있게 나올까? 지금도 내내 그 생각만 머리에 있어요. 곁에 있던 스태프들이 다 멋있었대. 나는 제대로 보지도 못했어요. 안 하던 거 너무 많이 하면서 힘들게 촬영했으니까 다들 어른 듣기 좋은 소리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나 하고 말았어요. 지금도 계속 궁금하긴 하네요.

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그걸 또 다 쿨하게 오케이하실 줄은 몰랐어요.
어머? 웃겨 진짜. 오늘 자기 믿고 다 맡겨달라고 하더니 그렇게 말하기예요?(웃음) 우리는 한번 딱 믿고 가기로 하면 그거로 끝이야. 더 말 안 해. 뭐 집에 가면서 “시발 시발” 욕지거리는 할 수 있지만.(웃음)

사람들이, 세상이 고두심에게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있죠. 참한 맏며느리, 뭐든 다 내어줄 것 같은 엄마 같은 거요. 어때요?
좋을 때도 있고, 싫어질 때도 있고 그래요. 뭐 어쩌겠어요. 그냥 오다 보니까 이렇게 온 거지. 그 이미지가 이젠 고두심이 된 거죠.

오늘 촬영은 그 이미지를 싹 지우고 싶었어요. 보란 듯이 보여주고 싶었어요. 멋진 여자 고두심.
근데 아쉬워서 어쩌죠. 나 젊었을 때 당신 같은 사람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때 나를 잡아놓고 족쳤으면 정말 뭐든 잘할 수 있었는데 아무도 내 이미지를 벗겨낼 생각을 하지 않더라고.(웃음) 감독이든 작가든 사진가든 그런 사람이 없었어요. 사실 이제는 자신이 없어서 못해요. 젊었을 때의 패기는 다 어딜 가고 없죠.

그레이 롱 레더 코트는 피망(Piment). 블랙 에나멜 뮬은 렉켄(Rekken). 콜드 펜던트 네크리스는 골든듀, 레이스 타이츠는 구찌(Gucci).

그런 말 마세요. 오늘 결국 해내셨잖아요.
사람들이 알고 있는 고두심 말고 제 안에는 또 다른 모습이 많다고 자부하거든요. 그렇다고 내가 먼저 이걸 다 까발려서 보여주는 성격은 또 못돼. 이렇게 짙은 색을 가지고 있기도 해요. 주어진 숙명 속에서 그저 사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엄마로 끝나는 것 같아. 후회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살짝 아쉬운 거죠.

1972년 데뷔 이후 주로 엄마를 연기했지만 여러 자리에서 줄곧 멜로 연기를 하고 싶다는 말을 선언처럼 하셨더군요?
나도 여자니까요. 처음부터 조그만 애 딸린 엄마 역할로 시작했거든요. 한번 그랬더니 그냥 계속 엄마 역할만 시키는 거야. 많이 하다 보니까 그렇게 굳어진 거죠. 그래도 신기한 건 시어머니 역할은 딱 한 번밖에 안 해봤어요.

이번 영화를 통해 모처럼 사랑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고두심의 얼굴을 볼 수 있었어요. 그래서 좋았어요.
사랑 이야기라는 점도 그렇고 제주도 방언도 푸짐하게 쓸 수 있으니 더 좋았어요. 제가 연기한 진옥은 나이가 많지만 여자로서의 끈을 놓지 않은 거죠.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흔하지는 않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잖아요. 그렇죠? 사람의 감정이 오고 가는 일일 뿐이에요. 사랑을 나누는데 나이니 국적이니 성별이니 그런 게 뭐 대수예요? 사랑은 원래 그런 걸 초월하는 거 아닐까요. 그렇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올해로 49년째 연기를 하고 계시죠. 가늠조차 되질 않는 긴 시간이에요. 어떠세요?
곽지균이라는 감독이 있어요.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그 양반이 한 말이 있어. 어떻게 한 가지 일만 그렇게 오래 할 수 있냐고 묻더라고요. 친정엄마 역할, 더군다나 가슴이 너무 아픈 친정엄마 연기만 그렇게 할 수 있냐고요. 거기에 무슨 대답을 하진 않았어요. 나는 스스럼없이 했거든요. 다들 그게 참 신기한가 봐요.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일을 그냥 최선을 다해서 한다. 그 생각만 가지고 그냥 해요.

그렇다면 궁금하네요. 선생님의 엄마는 어떤 분이셨어요?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분이었어요. 배움이 하나도 없었어요. 이름이 홍정의인데 당신 이름 석 자를 끝내 써보지 못하고 가신 분이야. 근데 진짜 좋은 분이에요. 너무 다 좋은 기억만 가지고 있어서 다시 태어난대도 우리 아버지 어머니와 연을 걸고 싶어요. 무슨 대단한 부자, 지식인, 위대한 부모 다 필요 없고 우리 부모님과 다시 만나고 싶어요.

어머니를 많이 닮으셨나요?
어머니를 닮고 싶죠. 우리 어머니 발뒤꿈치만큼만 따라가는 생을 살았다면 난 정말 떳떳한 엄마일 거예요. 내 자식들은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거예요. 근데 많이 부족하죠. 지금도 어머니를 닮아가기 위해서 노력하면서 살아요.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에게 베풀면서요. 물질도 물질이지만 마음 씀씀이, 따뜻하게 건네던 말 한마디 한마디 같은 걸 닮고 싶어요.

그런 생각과 그리움이 엄마 연기를 할 때 도움이 돼요?
우리 어머니가 살아오신 모습을 항상 생각하고 기억해요. 그 모습을 이렇게 펼치면서 연기하는 거예요. 우리 어머니였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몸짓을 하실까. 그런 걸 생각하죠. 그럼 알 것 같아요.

옐로 도트 화이트 꾸튀르 드레스는 손정완 컬렉션(Son Jung Wan). 블랙 슬리브리스 톱은 이세이 미야케. 크리스털 네크리스는 스와로브스키(Swarovski). 골드, 실버 믹스 뱅글은 골든듀.

고두심에게 엄마의 이미지를 덧입히는 게 싫다고 해놓고선 결국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묻고 있네요.
아휴, 근데 난 정말 괜찮아요. 그 힘으로 모든 게 다 이어지는 거 아닐까요? 그런 끈들이 조각 이불마냥 이어져서 지금의 내가 있는 거지. 내 몸속에 나도 모르게 내장되어 있어서 막 나오잖아. 그래서 오늘날까지 친정엄마 연기를 수태하는데도 보시는 분들이 안 질려 하시고 매번 잘봐주시고 사랑해주시는 거 아닐까요? 그 사랑을 먹고 오늘날까지 고두심도 살아 있는 거고요.

고향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땐 들뜬 목소리였는데 어머니를 말할 땐 목소리도 낮아지고 눈빛도 이렇게 차분해지네요?
맞아요. 그렇게 되죠. 그리우니까. 어머니 살아계실 때 가끔 바닷가를 같이 걸었어요. 집이랑 가까웠거든요. 손잡고 걷다 말고 내가 그랬어요. “엄마, 난 엄마가 너무 좋아. 근데 내가 엄마가 돼서 살아보니까 너무 힘들더라. 나는 다시 또 태어나면 엄마랑 살고 싶은데, 엄마가 엄마는 힘들어서 하고 싶지 않으면 내가 엄마 할게. 엄만 내 딸로 태어나.” 내가 엄마를 그렇게 좋아했어요. 제게 엄마는 그런 존재예요.

어른들 표현대로 이제 ‘7학년’이 되셨네요. 어떠세요? 뭐가 좀 보이나요?
나도 잘 몰라요. 인생? 모르겠어요. 이 나이 먹어도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누구라도 붙잡고 매달려서 묻고 싶어요. 영영 모를 것 같아요.

배우만이 가지고 있는 기세가 있기 마련인데 유난히 크고 강하게 느껴지네요.
연기자에게 제일 중요한 게 바로 그 에너지예요. 금방 죽을 사람을 연기하려 해도 에너지가 있어야 할 수 있어요. 그거 이해하시겠어요? 기운 넘치는 연기할 때만 에너지를 쓰는 게 아니라 죽음을 앞둔 사람을 연기할 때도 그 바탕에는 에너지가 있어야만 가능해요. 그래서 신체를 잘 단련시켜서 건강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해요.

멈추지 마세요. 끝까지. 텀블러에 되게 귀엽게 ‘두심이꺼’라고 적힌 이름표를 보니까 쉽사리 멈출 것 같진 않지만.
으하하하. 이걸 또 어떻게 보셨대. 제주도에서 촬영할 때 (지)현우가 선물해준 거예요. 작년 내 생일에. 촬영장에 가지고 다니는 물건마다 이렇게 붙여뒀어요.

오버사이즈 핑크 셔츠는 피망. 베이지 크리스털 버튼 테일러 재킷, 캐멀 컬러의 더블 레이어 데님 테일러 팬츠는 모두 와이프로젝트 바이 분더샵(Y Project by Boon the Shop). 애니멀 프린트 뮬은 세르지오 로시(Sergio Rossi).

텀블러를 쓰면 환경에도 이롭다고 하잖아요.
차가운 걸 잘 안 마셔요. 한여름에도 뜨거운 물만 마시거든요. 냉커피 얼마나 맛있어요. 그거 아는데 일부러 피해요. 집에서 나올 때 여기다가 보리차든 결명자차든 뜨거운 차를 담아서 가지고 다녀요. 뜨거운 거 마셔야 목이 풀리거든요. 우리는 목을 쓰는 사람이니까 관리를 잘해줘야 해요. 저도 담배를 열심히 피우던 시절이 있었는데 무서워서 끊었거든요. 목이 망가지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흡연을 권장하는 건 아니지만 담배 한 대 맛나게 피우는 고두심을 상상했어요. 그런 작품이요. 되게 근사할 것 같은데요?
흐흐. 그렇죠? 나도 알아요. 누가 그러던데 제가 담배 들고 있는 걸 보면 그렇게 가슴이 아리대요. 스산해 보이고요. 이름도 고독하게 생겨서 그런가. 고두심. 이 나이 들고 보니까 나도 참 내 이름대로 산 것 같네요.

말 두에 마음 심. 두심. 단단하네요. 영화와 함께 나온 책 <빛나는 순간: 영화 편지>에 사인 하나 해주세요. 제일 예쁜 페이지를 골라보세요.
이 책 너무 잘 만들지 않았어요? 영화도 그렇고 이 책도 많이들 좀 봐줘요. 어디보자. 여기 ‘빛이 내려앉은 시간, 위로의 순간’이 좋네요. 뭔가 맞는 것 같아. 해녀복을 입은 채 웃고 있는 내 모습도 보기가 좋고요. 정말 위로받은 것 같네요.

 

베이지 색상의 미니멀 슬리브리스 톱, 스트레이트 블루 테일러 팬츠는 렉토(Recto). 블랙 펜던트 드롭 체인 브레이슬릿은 블레스(Bless).

[ 배우 지현우 ]

촬영장에 오자마자 화보 촬영 때 입을 옷을 미리 다 입어본다거나, 어떤 감정을 준비하면 되는지 꼼꼼히 챙기는 모습을 흥미롭게 봤어요. 그런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죠?
화보 촬영도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해서요. 그냥 이렇게 만나서 단순히 사진만 찍는 것보다 진지하게 임하고 싶었어요. 요즘 활발하게 활동하는 젊은 스태프들과 함께 작업해서 좋았어요. 신선하더라고요.

좀 전에 도착한 고두심 선생님이 거울 앞에 앉더니 그러더군요. 화보 촬영은 어렵다고요. 영상은 조명이 어디에 있고, 카메라가 날 어떻게 찍는지 다 알겠는데 사진은 내가 어떻게 찍힐지 전혀 모르겠다고요.
아무래도 움직임이 없는 정지된 화면을 포착하는 작업이라 영화와 드라마와는 또 달라요. 그래서 오늘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이것저것 물어본 거고요. 현장에서 감독님과 상의하는 것처럼. 오늘 촬영은 약간 신인의 마음으로 임했던 것 같아요. 새로운 걸 편견 없이 다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으로요. 요즘 청춘들이 좋아하는 느낌을 저보단 더 잘 아실 테니까요. 약간 무심한 듯, 툭 그런 식으로.

‘요즘 청춘’이라는 표현이 왠지 재미있게 들리네요.
창문으로 빛이 드는 하얀 방에서 찍을 때 그런 느낌이 들던데요. 겉으로 볼 땐 멋있는 옷 입고 부족한 거 없이 잘살고 있는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텅 빈 원룸에 혼자 있는 것 같은 젊음이요. 그 인물이 되어서 방에 혼자 있는 상상을 했어요.

‘요즘 청춘’을 생각하면 또 어떤 이미지가 떠올라요?
되게 당당하고 솔직하죠. 자신의 생각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것 같아요. 내가 수용할 수 있는 건 수용하고 아닌 건 또 확실히 아니라고 말하고. 좋아 보여요.

스스로를 ‘요즘 청춘’의 범주에 넣지 않는 식으로 말하네요. 그래요?
정확하게 말해서 요즘 청춘은 아니죠. 그 시절은 이미 지난 것 같아요. 근데 그 세대가 살아가는 현실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플지에 대해서는 자주 생각하고 공감하는 편이에요. 음, 보면 마땅한 정답이나 돌파구가 없는 시대잖아요. 30대 중후반인 제 세대도 비슷한 이유로 힘이 들겠지만 지금의 20대 친구들을 보면 우리랑 또 달라 보여요. 말 그대로 답이 없어 보여서 아프죠. 혈기 왕성한 젊은 에너지를 표현하고 살아야 할 텐데 여러모로 그게 어렵잖아요.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베이지 색상의 미니멀 슬리브리스 톱, 스트레이트 블루 테일러 팬츠, 실버 버클 레더 벨트는 렉토. 테일러 재킷은 랜덤 아이덴티티.

<빛나는 순간>을 보고 당신의 청춘을 다시 생각했어요. 소년 같은 특유의 미소가 여전하길래.
영화를 좋게 봐주신 의미라고 생각할게요. 배우는 매번 새로운 옷을 입는 게 일이잖아요. 내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을 때도 있지만 영 어색한 옷을 입어야 할 때도 있어요. 누군가에게는 호감일 수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별로일 수 있다는 말이에요. 작품에 따라 밋밋해 보이던 배우를 다시 보게 되기도 하고요. 아마 저에게 가장 잘 맞았던 옷이 <올드 미스 다이어리>였던 것 같아요. 그게 벌써 15년 전이에요. 그 후 <달콤한 나의 도시>나 <송곳> 같은 작품도 그렇고요. <빛나는 순간>에서 제 모습이 좋아 보였다면 ‘경훈’이라는 옷이 저에게 잘 맞았기 때문일 거예요. 좋은 면을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주 신중하게 말하네요. 일리가 있는 말이고요.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든 아니든 그래도 세월이 흐르면 얼굴은 변하기 마련이잖아요.
글쎄요. 이번에 고두심 선생님과 함께 작업하면서 느낀 건데요.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건 감수성을 잃지 않는 일인 것 같아요. 어떤 감정 같은 것들이요. 시간이 흐르면 얼굴도 변하겠지만 감정도 변하잖아요. 대부분은 무뎌지는 편인 것 같아요. 무뎌지지 않고 처음의 순수한 감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해요. 그게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자기감정에 솔직한 것도 중요할 것 같네요.
그렇죠. 이 일을 하다 보면 감정을 감춰야 하거나 조심해야 할 때도 많거든요. 연기할 땐 모르겠지만 일상에선 잘 드러내지 않게 돼요. 그러다 보면 자기 색깔을 잃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 동료들을 자주 봤어요. 어릴 땐 잘 몰랐는데 저도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다 보니까 그런 고민을 하죠.

어떤 부분에선 겁이 난다는 의미인가요?
겁이기도 하고, 두려움도 많아지고요. 요즘 제 20대 시절을 자주 돌아보거든요. 그땐 연기하는 게 지금처럼 무겁거나 힘들지 않았어요. 마냥 재미로 했던 것 같아요. 현장에서 사람들 만나는 게 좋고, 대본이 나오면 거기 적힌 거 늘 하던 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어느 순간 그게 안 되더라고요. 지금은 대본 한 줄 한 줄 이해되지 않거나 납득되지 않으면 다음으로 넘어갈 수가 없어요. 갈수록 고민도 의문도 많아지는 것 같아요.

그건 어떤 책임감이라고 보면 어때요?
책임감 맞죠. 확실히 일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어요. <빛나는 순간>만 해도 그래요. 이 작품은 작년 6월에 촬영이 끝났지만 감독님과 후반 스태프는 불과 며칠 전까지 티 나지 않는 작은 부분까지 고민하고 수정하셨대요. 소준문 감독에겐 이 작품이 그렇게 긴 시간과 고민을 담아 완성한 귀중한 작품인 거잖아요. 내가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책임감이 커요. 경력이 쌓일수록 말 그대로 작품을 남기고 싶다는 욕심도 커지는 것 같고요.

<빛나는 순간>의 최초 버전은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됐죠. 유튜브에서 그 직후 진행한 기자회견이나 관객과의 대화 영상을 봤어요. 배우들이 유난히 상기된 얼굴이더군요.
고두심 선생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완성된 영화에 만족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많은 스태프가 제주도에서 두 달 동안 궂은 날씨와 싸워가며 찍은 작품이 무사히 완성됐다는 기쁨도 있었을 테고요. 선생님도 울더라고요. 다들 고생해서 열심히 해서 세상에 뭔가 하나 남겼다. 그게 좋았던 것 같아요.

지현우가 입은 프린트 실크 셔츠, 브라운 알레산드로 슈즈는 벨루티. 고두심이 입은 블랙 버튼업 미디 드레스는 웨일즈 보너 바이 분더샵, 골드 링은 골든듀.

며칠 전 밤에 스크리너를 통해 영화를 봤어요. 그저 따뜻하고 아름다운 영화인 줄 알았는데 늙은 해녀와 젊은 청년의 사랑을 목격하게 됐죠. 가장 큰 고민과 결심을 한 건 당신이 아닐까 싶었어요. 이 또한 편견일지 모르지만요.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가 기억나요. 일단 담배 한 대를 피웠던 것 같아요.(웃음) 저는 진옥과 경훈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제가 잘 표현해서 관객들에게 이들의 감성과 관계를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내가 느낀 좋은 마음을요. 일본 팬미팅 생각이 났어요. 제 일본 팬들을 보면 주로 여성이고 대체로 연령대가 높은 편이에요. 근데 그분들 보면 엄청 소녀 같거든요. 눈도 잘 마주치지 못하고 제 곁에 서면 땀을 막 흘리기도 하고 그래요. 우리에게 이상한 편견의 시선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엄마 혹은 엄마 또래의 여성을 여자로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사랑에 빠지는 데 나이 제한이 있는 건 아닌데도 그렇죠. 맞아요.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나이와 성별을 다 떠나서, 사람이 사람에게 설렘을 느끼고 두근거림을 느끼는 건 죽을 때까지 영원한 감정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어쨌든 진옥과 경훈 모두 저마다의 아픔이 있는 인물이에요. 두 인물이 제주도라는 섬 안에서 서로를 치유한다는 영화의 메시지가 좋았어요.

사람과의 관계가 다 그렇지만 배우는 상대 배우의 영향을 많이 받는 직업일 거로 생각하는데 어때요?
눈을 못 봐요. 저희는 서로의 눈을 보고 연기해야 하는데 상대와 감정 교류가 안 되면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요. 그럼 모든 게 다 어긋나버리죠.

고두심이라는 배우와 함께 작업하는 건 어땠나요?
그런 욕심이 있었어요. 고두심 선생님과 함께 해보고 싶었어요. 촬영장에 가는 길이 즐겁더라고요. 기댈 수 있는 존재, 도움 받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게 참 든든했어요. 함께 연기하면서 존중받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고요. 선생님이 없는 촬영장이 허전하게 느껴질 정도였어요. 그런 후유증도 있더라고요.

당신의 미소도 미소지만 눈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의 아이 같은 울음을요. 우는 건 쉽지만 마음을 흔드는 건 다른 문제니까.
어떻게 하면 관객을 설득할 수 있을지 기술적인 계산을 하진 않았어요. 대사와 지문에 적힌 글을 보고 마음을 먼저 생각했어요. 제주라는 섬에서 실제 해녀 삼촌들과 어울리면서 쌓인 감정이 있을 거잖아요. 그 감정을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제 그만 그 시간과 작별을 해야 할 때, 또 흔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떤 특별한 사랑의 형태와 이별해야 하는 순간 그걸 수용해야 하는 마음은 어떨지 생각했어요. 상처가 아물기 위해서는 딱지가 생기잖아요. 간신히 딱지는 생겼는데 다 아물기도 전에 그 딱지가 다시 떨어진 느낌이랄까요. 그런 심정이 담겨 있는 장면이에요.

블랙 가죽 재킷, 그레이 팬츠, 블랙 스니커즈는 모두 프라다(Prada).

데뷔 18년 차죠. 처음 그 미소가 여전하다고 했지만 대화 속에서 꽤 많은 변화가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런 짐작을 하게 되네요.
30대가 된 다음부터 좀 달라진 것 같아요. 좀 달라져야죠. 근데 이게 맞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좀 답답하게 변한 것 같기도 하고요.(웃음)

<빛나는 순간>을 이미 봤거나 앞으로 보게 될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단지 마음으로 바라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던 혹은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 제주도의 이야기를 그냥 바라봐주셨으면 해요. 그 섬에는 상처받은 사람이 있고,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 있고, 해녀들의 굴곡진 삶도 있고, 여전히 많이들 모르고 살지만 너무 아픈 역사도 오늘 일처럼 남아 있어요.

영화의 메이킹 북이라고 할 수 있는 <빛나는 순간: 영화 편지>도 기쁘게 읽었어요. 잘 안 하는 짓인데 사인 하나 해주세요. 제일 좋아하는 페이지에다가.
음, S#9 ‘진옥과 경훈의 빛나는 순간’이라고 적힌 이 페이지가 좋겠어요. 설렘을 간직한 두 사람이 있는 사진도 예쁘네요. 이 연인의 모습을 편견 없이 봐주셨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고요. 이 장면 찍을 때 진짜 좋았거든요.

 

‘Would you be my queer friend?’ 로고 화이트 티셔츠는 코스(Cos). 블랙 새틴 글러브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블랙 테일러 재킷, 오버사이즈 테일러드 팬츠는 모두 랜덤 아이덴티티.

[ 감독 소준문 ]

2004년 퀴어 옴니버스 <동백꽃-떠다니는, 섬>과 퀴어 단편 영화 <올드 랭 사인>, 성 소수자의 사적인 영역을 아주 직접적인 이미지로 표현한 <REC> 등 전작을 통해 동성 연인들의 관계를 멜로적인 감수성으로 표현해 온 감독이라는 걸 관객의 입장에서 잘 알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제주도와 해녀, 배우 고두심과 지현우가 전면에 등장하는 영화 <빛나는 순간>을 연출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의아하거나 실망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네, 어떤 의미의 말인지 저도 잘 알 것 같아요. 기존 제 영화를 알고 있거나 접해본 관객 입장에선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우선 궁금할 수밖에요. 주로 종로나 이태원을 배경으로 하던 전작들과 달리 제주도로 향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제주라는 섬에 대한 동경이 있었어요. 제주도에 내려가 살겠다고 다짐한 적도 있어요. 제주도라는 섬이 제가 해온 작품들에 등장하는 공간과 닿아 있다고 봤거든요. 첫 작품의 배경이 섬이기도 했고요. 섬은 철저히 타자화된 공간이잖아요. 게이들에게 종로나 이태원도 그런 공간이라고 볼 수 있거든요. 한국 사회에서 제주도와 육지 사이에 존재하는 좀 묘한 거리감에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물리적으로도 그렇고 심리적으로도 그렇고요.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나니 그전까지 단순히 아름다운 여행지로만 생각하던 그 곳이 전혀 다른 맥락으로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아픈 역사를 품고 사는 사람들의 정서에도 눈길이 갔고요. 존재하지만 배제된 이들이 섬이라는 자기들만의 공간에서 살고 있다는 게 저에게 이렇게 다가오게 된 것 같습니다.

섬은 그런 성미와 기운을 품고 있죠. 제주를 생각하면 아주 먼 곳이라는 막연한 느낌이 들기도 해요.
제주도에 살고 있는 지인들과 이야기 나눌 때 그 거리감을 자주 느끼곤 해요. 서울의 끝에서 끝까지 이동하는 시간보다 김포공항에서 비행기 타고 제주 공항까지 가는 시간이 더 짧잖아요. 사실 그렇게 먼 곳이 아닌데 아주 먼 곳처럼 느껴진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물리적인 거리도 거리지만 심리적인 거리가 이만큼이나 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땅으로 이어지지 않아서 생기는 고립감 같은 지점들에 마음이 움직인 것 같아요. 그 고립감 역시 제가 지금껏 만들어온 작품들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영화를 보고 나니 역시 ‘소준문의 영화다’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늙은 해녀와 청년의 사랑을 뉘앙스나 정서로 매듭짓지 않고 정확하고 직접적인 언어로 끝까지 밀어 붙인다는 점이 특히 그렇죠.
끝까지 가고 싶었으니까요. 제게는 그 마음이 중요했던 것 같아요. 최초의 시나리오는 완성된 영화보다 훨씬 더 과감하게 밀어붙였어요. 타협과 이해의 문제를 떠나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전하려면 중간에 멈출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괜히 막 궁금해지네요. 어느 정도였길래?
지현우 씨가 연기한 경훈의 나이가 원래 20대 초반이었어요. 단지 파격적인 설정으로 포장하고 싶은 의도는 아니었고요. 전혀 다른 형태의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상식적인 수준의 감정선 바깥에 있는 두 인물의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어요. 시나리오를 수정, 발전하는 과정에서 경훈의 나이를 30대로 수정했어요. 모르겠네요. 어쩌면 그걸 타협이라고 봐야 할 수도 있겠죠.

두 인물의 이야기와 감정을 그리는 데 있어 가장 고민한 지점은 무엇인가요?
“왜?”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기도 해요. 진옥과 경훈의 사랑에 물음표를 다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 질문 속에 너무 많은 편견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화가 많이 났어요. 속된 말로 “젊은 남자가 뭐가 아쉬워서 나이 든 여자와 사랑에 빠져?”라는 의미니까요. 두 사람의 사랑이 말이 되게 하기 위해서 영화적인 장치를 더하는 건 어떻겠냐는 조언도 많이 들었고요. 사람과 사람의 감정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려 들지, 그 자체를 느끼고 인정하려 하지 않더라고요.

언젠가 인터뷰에서 “사회가 동성애자를 혐오스럽게 바라보는 시선 중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섹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더군요. 나이 든 여자와 젊은 남자의 사랑을 향한 편견이나 혐오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빛나는 순간>에 등장하는 사랑 앞에 유난히 왜?라는 질문이 가득한 건 그 대상이 나이 든 여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서 늙은 남자와 젊은 여자가 사랑에 빠지는 걸 익숙하게 접해왔어요. 누구도 그 사랑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도 않고요. 역겹다고 생각하지도 않죠. 그런데 그 대상과 성별이 뒤집히니까 전혀 다른 시선이 생겨버리더라고요. 그런 편견과 낯선 것에 대한 불편한 시선을 영화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 시나리오를 끝까지 밀어붙이고 싶었지만 동시에 겁이 난 것도 사실인데 제작사인 명필름에서 이해하려는 대신 있는 그대로를 느껴줘서 변질된 부분 없이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빛나는 순간>은 명필름이 신진 영화인들을 발굴, 육성하자는 취지의 제작 시스템인 ‘명필름 랩’과 함께한 작품이죠. 어떤 경험이었나요?
저는 꽤 긴 시간 동안 혼자 제작과 연출을 하는 작은 규모의 시스템으로 작업을 해왔어요. 자유롭다면 자유롭지만 늘 어떤 한계에 부딪히는 게 있었죠.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스스로에게 함몰되는 것 같았거든요. 그러던 중 우연히 명필름 랩과 함께하게 됐어요. 원래 함께 작업하기로 한 건 <빛나는 순간>이 아닌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였는데, 제주의 이야기가 담긴 <빛나는 순간>의 시나리오를 보더니 이 작품을 함께 해보는 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어요. 결과적으로 한국 영화 산업 안에서 영향력 있는 제작사의 도움과 응원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해요.

제주 4.3사건을 다룬 영화 <지슬>의 양정훈 촬영 감독의 간결한 촬영도 인상적이었어요. 압도적인 제주의 풍경을 담고 싶은 야심이 있을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어요.
촬영 감독님과 긴밀히 공유한 게 있어요. 제주의 풍경에 이야기가 지배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점이었어요. 관광 비디오처럼 찍지 말자는 약속을 했어요. 화면을 타이트하게 잡아서 두 배우의 클로즈업을 담는 데 집중했어요. 특히 고두심 선생님의 얼굴이 가지고 있는 힘과 상징이 있잖아요. 그 얼굴의 풍경을 잘 담아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그분의 얼굴이 곧 제주 그 자체니까요.

곶자왈 숲에서 찍힌 진옥의 독백 장면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네요. 관객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찍힌 화면 속에서 어쩌면 갑작스럽게 4.3의 기억을 들려주죠. 고두심이기에 할 수 있는, 그럴 자격이 있는 장면이라고 생각했어요.
앵글이든 촬영 방식이든 의도한 게 있어요. 아직도 사람들이 4.3 사건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어요.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많은 부분을 고두심 선생님이 직접 준비하고 이끌어 간 장면이에요. 해녀들을 취재하면서 느낀 건데요. 제 입장에선 그날의 기억을 직접적으로 묻는 일이 실례라고 생각했어요. 두렵기도 했고요. 근데 이분들은 아주 일상적인 대화를 하다가도 갑자기 그 기억을 먼저 들려 주셨어요. 아주 고통스럽고 잔혹한 사건이잖아요. 아픔을 일상으로 끄집어내는 모습을 보는데 충격적이기도 하고 어떤 경외감마저 느껴지더라고요. 들려주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생각해요.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인 거죠. 제주도에서, 그곳 사람들에게서 그런 간절함을 봤어요.

영화 중간중간, 그리고 엔딩 곡으로 아이유의 노래 ‘밤편지’가 흐르죠. 지나치게 감정적이라는 생각이 들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더군요.
우선 아이유 님에게 감사드리고요.(웃음) ‘밤편지’라는 노래가요. 젊은 가수의 노래지만 굉장히 넓고 깊다고 생각해요. 양희은 선생님이 이 노래를 부른 게 있는데 노래 자체에 특별한 감수성이 있더라고요. 이 노래를 꼭 쓰고 싶었어요. 아이유 님이 허락을 할지 안 할지도 모르면서 다른 대안은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다행히 고두심 선생님과의 인연으로 ‘밤편지’의 저작인격권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허락해줬어요.

감독으로서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뭔가요?
해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어요. 강인한 어머니로 포장된 시선과 아름다운 제주도, 나이 든 여자와 젊은 남자의 사랑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어요. 어쩌면 그 시선에 우리가 갇혀 있는 건 아닐까요? 그 시선을 넓게 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영화의 주제가 뭔지 물으신다면 그리움이라고 답할게요. 제주도가 품고 있는 그리움이요. 남겨진 사람들의 그리움이요. 단순히 파격적인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를 건넬 수 있는 영화였으면 해요. 그 모든 걸 제주와 ‘밤편지’가 품 넓게 다 안아준다고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