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치 앞을 모르는 세상. 패션월드는 변화의 돛을 달고 가상세계를 향해 빠르고 묵직하게 나아가고 있다.

 

최근 브랜드에서 주최하는 행사와 관련해 초대 안내 전화를 받으면 대략 둘 중 하나다. ‘언제, 어디로, 몇 시까지 참석해주세요’ 또는, ‘특정 시간에, 함께 보내는 링크를 통해 해당 사이트에 접속해주세요’다. 전자가 정통적인 방식의 오프라인 행사라면, 후자는 요즘 들어 크게 주목받는 버추얼(가상의) 쇼케이스다. 요즘 패션계에서 ‘MZ세대’ 다음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이 AR(증강현실), 버추얼 등이 아닐까 싶다.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의 활동의 폭이 크게 준 대신, 실존하지 않는 가상세계에서의 움직임이 활발해진 까닭이다. 패션계는 이 흐름을 놓치지 않고 변화의 돛을 단 배에 승선했고 가상의 세계로 순항 중이다.

이 같은 현상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것은 지난해 10월, 크리스찬 루부탱의 2021 여성/남성 컬렉션 디지털 이벤트다. 당시 크리스찬 루부탱은 하이엔드 브랜드 최초로 아바타 플랫폼인 제페토와 손을 잡고, 그가 사랑해마지 않는 파리의 모습을 담은 가상세계에 각국의 친구들을 초대했다. 아찔하고 아름다운 슈즈 컬렉션을 늘어놓은 플래그십 스토어, 파리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파리 테라스, 즐거운 파티가 열리던 루비 디스코까지. 나를 닮은 아바타와 함께 가상의 공간 구석구석을 다니며 얼마나 즐겁게 놀았는지 모른다. 정확히 놀았다는 표현이 옳다. 다양한 신발을 신어보고(아바타에 신겨보고), 공연도 즐기고, 회전목마 앞에서 사진도 찍고, 한 공간에 있는 사람들과 채팅을 나누며 파리까지는 아니어도 이국적인 콘셉트의 놀이동산에 잠시 다녀온 기분을 만끽했다.

이후 버추얼 이벤트는 꽤 빈번하게 일어나는 중이다. 얼마 전 진행한 멀버리의 ‘Made to Last’ 프레젠테이션과 아디다스의 ‘4DFWD’ 론칭 쇼케이스는 가장 흔한 케이스로, 브랜드의 최신 이슈와 제품에 관련된 담당자가 출연하여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발표한 시간이다. 약간은 받아 적어야 할 것 같은 엄숙한 강연 같은 분위기를 풍겼지만, 관련 인물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정보를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는 느낌이 들었다. 투미와 슈콤마보니의 버추얼 스토어는 이에 한발 더 나아가 컬렉션을 구경하며 쇼핑도 하고, 그 밖에 즐길거리도 있어 재미있었다.

투미는 외국의 어느 부티크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가상의 공간에 컬렉션을 펼쳐 보였다. 아이템을 하나씩 눌러보면 상세 정보, 가격과 함께 각각 아이템에도 3D 증강현실을 적용해 어느 한 곳 놓치지 않고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꾸며놓았다. 넋 놓고 아이템을 구경하다 지루해질 즈음 가운데 놓인 모바일 게임 이모티콘을 클릭하면 인스타그램으로 연결된다. 맥라렌을 타며 투미 맥라렌 컬렉션을 얻는 단순한 게임이다. 맥라렌 라이더 얼굴에 내 얼굴을 넣을 수도 있으니 이입이 더 잘되는 것은 당연한 일. 단순한 게임이 주는 쾌감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힐링을 선물한다. 한편 슈콤마보니는 ‘써머하우스’ 테마의 버추얼 스토어를 마련했다. 넓은 풀과 선베드 등 너른 여름 풍경 앞에서 여름 신제품을 구경할 수 있는 것은 마찬가지. 공간 안쪽 깊이 히든 룸을 찾아가면, 슈콤마보니와 협업한 뮤지션 비비의 라이브 클립을 감상할 수 있다. 버추얼 패션월드에서 보다 높은 경험치를 얻고 싶다면 브랜드의 버추얼 시착 서비스를 이용해보자.

구찌와 마시모두띠는 단독으로 개발한 앱을 통해 서비스를 제공한다. 사용 방법도 간단하다. 원하는 제품을 선택한 뒤 모바일 디바이스의 카메라로 발을 비추면 증강현실 기술을 통해 실제 착용한 것처럼 보여주는 것. 누구나 오프라인 스토어에서 신발을 신어보고 사진을 찍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바로 그것과 같은 효과다. 착용감을 느낄 수 없는 아쉬움은 숍에 직접 가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과 브랜드에 대한 경험치, 자세한 설명 등으로 커버가 될 일이다.

디올과 발렌티노는 스냅챗의 AR 필터를 통한 시착 서비스를 운영한다. 이 역시 방식은 간단하다. 스냅챗의 카메라를 열고 스냅코드를 스캔하면 서비스로 연결! 스냅챗은 Z세대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고 있어 반응이 즉각적이다. 디올이 스냅챗 광고로 홍보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는 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다.

아이웨어 브랜드 젠틀몬스터는 국내 카메라 앱 1위인 스노우와 손잡고 선글라스 시착이 가능한 브랜드관을 오픈한다. 기존 플랫폼에서 선보인 AR 필터 중 선글라스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 것으로 보았을 때 선글라스 시착 서비스가 왜 이제 나왔을까 갸웃할 따름이다. 젠틀몬스터는 이번 서비스를 통해 네 가지 디자인의 선글라스를 AR 필터로 선보인다. 그리고 젠틀몬스터의 마니아뿐 아니라 더 넓은 잠재 소비자층에까지 새로운 경험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잠시, 가까운 미래의 언젠가 버추얼이 기본값이 되어 오프라인 만남이 모두 사라지는 삭막한 세상이 오면 어떡하나 기묘한 생각에 빠졌으나, 잡념은 젠틀몬스터의 여러 가지 선글라스를 바꿔 껴보는 사이에 쏙 들어가고 말았다. 차라리 다음에는 뭘 해볼까 생각 중이다. 시시때때로 출입하는 버추얼 패션월드. 시공간의 제약이 없으니 하루가 길고도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