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AGIC, 선미와 크루엘라
자신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일에 진심이다. 선미는 매번 그렇게 한다. 선미가 남다른 패션과 비주얼로 화제를 모으는 디즈니 영화 <크루엘라>의 크루엘라를 입었다. 선미와 크루엘라, 그 어딘가에서 만난 밤은 그래서 마법처럼 아름다웠다.
긴 촬영을 마치니 자정이 넘었어요. 그런데도 마치 막 만난 것처럼 생기가 있네요.
일이니까요.(웃음) 그것도 그렇지만 제가 재미있는 작업을 할 땐 피곤해도 피곤한 줄 몰라요. 오늘이 그런 날이에요.
8벌의 옷을 입고, 두 편의 영상을 찍으면서 크루엘라가 되는 경험은 어땠어요?
크루엘라라는 멋진 캐릭터를 표현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어요. 오늘 촬영은 모두들 최고라, 진짜들이 모인 기분이었어요. 처음에 제의를 받고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감사하게도 제가 크루엘라가 될 수 있었어요. ‘꼬리’ 활동 때 제가 진짜 제대로 빌런을 연기했거든요. 그때 기억도 났고요.
촬영 시작하자마자 눈빛이 바뀌더라고요. 집중하고, 욕심을 내는 게 보였어요. 말하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전해지는 말 같죠.
어떻게 하면 크루엘라를 표현할 수 있을까 계속 생각하면서 왔어요. 첫 컷 보고 바로 느낌이 왔어요. 오늘은 다 믿고 맡기면 된다고. 저는 촬영할 때 설령 웃기게 나오더라도 포즈를 대담하게 하는 편이거든요. 사진이라는 건 찰나를 포착하는 거니까 하나는 걸리겠지? 하는 마음으로 과감하게 했어요.
화제를 모으는 영화와 캐릭터를 표현하는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아요. 화보를 찍을 때 영화에서 모티프를 가져오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이 경우에는 우리 모두가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잖아요?
제 기억 속의 크루엘라는 모피코트 입고 파이프를 입에 문 무서운 할머니였는데 오늘 제가 연기한 ‘크루엘라’는 젊은 시절이라 저만의 해석을 가미할 수 있어서 더 재미있었어요.
어쩌면 더 좋았어요. 영화를 봤다면 영화 속 크루엘라 이야기를 보며 답을 찾으려고 하거나, 엠마 스톤의 크루엘라를 재연하려고 했을 수도 있는데, 모르니까 오히려 무궁무진해졌어요.
정답이 없다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렇다보니 이걸 어떻게 선미식으로 해석해야 하는지를 저도 고민했어요. 집에서 <크루엘라> 예고편도 보고 인터넷도 검색해서 정독하고 왔어요. 감사하게도 기자님께서 한국에서 크루엘라는 제가 적격이라고 해주셨는데, 거기서 용기도 얻었고요.
그 말 안에 여러 의미를 담았어요. 크루엘라 역을 소화할 수 있는 사람, 이 프로젝트를 재미있다고 생각할 사람, 대중이 이 사람이면 크루엘라답다고 받아들일 사람… 당신에게는 어떤 게 가장 중요했어요?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하는 게 제일 중요해요. 잘하려면 먼저 재미를 느껴야 하거든요. 제 뮤비 속 모습을 보면 어쩐지 다 나사가 하나씩 빠져 있는 모습인데, 인간 선미는 뮤비 속 선미와 정말 달라요. 인간 선미는 대담하지도 않고 모험도 안 좋아하는 인간이에요. 저랑 정반대인 캐릭터를 표현하는 게 재미있나봐요. 다른 자아를 표현하면서 제 안의 갈증이 해소되는 것 같아요.
선미의 지금까지 행보를 보면 놀랍지 않죠. 오래전이지만, ‘보름달’ 무대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해요. 충격적이기도 하고, 선연하기도 해서 로맨틱 발레도 오페라도 떠올랐어요. ‘보름달’의 선미라면 달의 정령 같았고, <루치아>라는 오페라의 주인공처럼 광기도 선연함도 있었거든요.
‘보름달’이 2014년이니까 시간이 많이 흘렀어요. 정령 같다니 정말 새롭고 감사해요. 그때는 뱀파이어라는 콘셉트만 냈지 자세하게 어떤 비주얼로 하고 싶다는 의견을 강하게 내지 못할 때였어요.
맨발로 춤추는 건 지금 봐도 파격이죠. 당시 고민이 많았나요?
그때 사람이 아니라 뱀파이어를 표현하려고 했으니까, 더 맨발을 택했어요. 발이라는 은밀한 부분을 드러냄으로써 오는 날것의 느낌과 광기가 확실히 있는 것 같아요.
솔로를 시작하면서 다양한 콘셉트, 무대를 소화하게 되었어요. 솔로를 시작할 때 뭘 가장 먼저 그리고 싶었어요?
‘24시간이 모자라’로 솔로 데뷔를 했는데, 그때 제가 표현한 여성상은 어떻게 보면 수동적이었어요. 사랑에 아파하고 그 사랑에 목말라했죠. 기다림이 ‘보름달’까지 계속되었어요. 사랑에 목마르고 기다리고 사랑하는 이를 계속 바라보는 순수한 여자였죠. 지금 회사에서 다시 솔로로 시작을 했는데, 그때 다시 ‘나라는 사람이 아련하고 기다리는 사랑을 하는 여자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아니더라고요. 그게 재미가 없었어요.(웃음) 비참하고 처절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렇게 ‘가시나’가 나왔군요?
‘가시나’ 비주얼 프로듀싱을 할 때도 뭔가 사랑을 초월해서 이별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선미라는 아티스트의 감정으로 풀어낼까를 생각했어요. 미쳐버린, 나사가 빠져버린, 그런 사랑을 표현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때까지는요.
개인적으로는 ‘보라빛 밤’을 가장 좋아하는데, 그 곡으로는 뭘 표현하려고 했어요?
‘사이렌’, ‘느와르’ 할 때는 ‘사랑 같은 거 안 해!’ 이러다가 ‘보라빛 밤’에서 다시 소녀로 돌아갔어요.(웃음) 그렇지만 가사 보면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진 상황이 아니에요. ‘꿈인가 싶다가도 니가 떠오르니까 그 밤은 진심인 거야.’ 결국엔 꿈이라는 가사가 있는데 저는 그렇게 해석을 했거든요. 그렇게 불확실한 감정이어서,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곡이에요.
선미의 무대를 보면 음악, 춤, 의상 등 하나의 콘셉트가 완벽하게 구현돼요. 그런 면에서 영화 같다는 느낌을 받아요. 실제로는 어디에서 영감을 얻나요?
영화 많이 보냐고 많이들 물어보시는데, 저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좋아해요.(웃음) 대중성이 기반이 되어야 블록버스터가 성립되잖아요. 저도 대중을 상대로 대중음악을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게 너무 중요해요. 비공개 인스타에 천 몇 명 팔로우해놨는데 엄청 다양해요. 사진가, 설치예술가, 비디오 아트 하시는 분들, 유리공예가 등 모든 방면의 예술가를 많이 보고 공부하려고 하는 편이에요. 직접 다니기엔 한계가 있어서 그렇게나마 시각을 넓히려고 해요.
대중성과 예술성 중에 더 손을 들어줘야 할 때는 무엇을 선택해요?
대중성과 예술성이 있다면, 제가 생각했을 때 선미라는 사람은 대중성이 더 중요한 가수예요. 예술성도 물론 좇고 싶지만요. 그래서 최대한 밸런스를 맞추려고 노력해요. 예를 들면, 비주얼이 너무 예술적이면 가사를 대중적으로 풀어나가고, 그게 아니면 멜로디나 음악을 대중적으로 푸는 식이죠.
노래하고 춤추는 아티스트면서 작사, 작곡을 하는 동시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역할까지 하고 있는 셈이에요. 거기에서 즐거움을 느끼나요?
저는 PPT까지 제가 다 만들어요. 회사 분들을 위해서요. (보여주면서) 보세요, 이렇게요. 곡을 쓰다 보니까 곡을 쓰면서 생각나는 비주얼이 있고 이야기들이 떠올라요. 저 혼자 좋다고 가면 너무 객관성을 잃어버리니까 회사에 먼저 보여드리고 같이 개선해요.
반대 의견을 받을 때도 있죠? 쉽게 수용하나요?
있죠. 이번에 ‘꽃같네’라는 곡이 있었는데 제가 생각하는 ‘꽃같네’는 비속어 느낌이 있는 언어유희여서 가운뎃손가락에 꽃을 꽂아 아트 티저를 찍어보고 싶었는데 과하다고 하셔서 화살 쏘는 걸로 바꿨어요.
PPT 를 보니 스토리도, 표현하고 싶은 이미지도 아주 구체적인데, 그런 계획이 가장 잘 구현된 무대는 무엇이었어요?
대중들에게 각인된 노래가 ‘가시나’라면, 저는 ‘꼬리’가 저라는 가수가 보여줄 수 있는 무대의 정점이라고 생각해요. ‘24시간이 모자라’는 잘됐지만, 그 곡이 잘된 거예요. 선미보다 노래가 더 유명했어요. ‘가시나’ 때까지도 그랬던 것 같아요. ‘꼬리’를 통해서 아티스트 선미가 노래 앞에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꼬리’가 가장 최근 활동이었죠? 정점에 올랐다고 느꼈다니 그 다음 생각이 궁금해지네요. 더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했나요, 아니면 정점을 찍었으니 더 자유롭다고 생각했나요?
최근 곡이라는 이유도 있어요. 저는 자유로운 쪽이에요. 앞으로 또 해보고 싶은 걸 할 수 있겠다….
데뷔 후 15년이죠. 여러 일이 있었고, 성공적인 그룹 활동에 이어 성공적인 여성 솔로 아티스트가 됐죠. 또 어떤 모험을 더 하고 싶어요?
요즘엔 매 순간이 모험 같아요.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스릴 있는 모험이요. 저는 지금 한 치 앞도 모르겠어요.(웃음) 시장도 그렇고 제 음악도 그렇고요. 그래서 요즘엔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어릴 땐 제 목표를 너무 멀리, 높이 세웠어요. 15년 차가 돼보니까 알게 되었는데요, 처음부터 목표를 너무 높게 설정하면 지쳐버리더라고요.
그래서 목표를 수정 중인가요?
목표는 지금 내가 가진 힘만큼, 내가 가진 연료로 갈 수 있는 정도로만 세우려고 해요. 도착하면 휴게소 들러서 충전하는 것처럼 또다시 목표를 설정해서 가는 거죠. 그래서 모험이라는 게 옛날엔 너무 무서웠는데 지금은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것만큼이라고 생각하니까 더 재미있는 걸 많이 할 수 있게 됐어요.
1년, 2년의 목표가 아니라 당장 오늘과 내일 할 일을 하는 거죠. 성실한 직업인의 태도예요.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선배도 많지만 후배도 많아요. 역할에 대한 고민도 하나요?
요즘 후배들이 저한테 고민상담을 무척 많이 해요. 그럴 때 ‘벌써 내가 그렇게 됐구나’ 해요. 사실 저도 아직도 답을 모르거든요. 서로 처한 상황이 다르지만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저한테 물어보는 것 같은데, 어떤 게 정답인지 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게 필요한 거고요. 내가 거창한 대답을 안 해줘도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후배들이라고 해도 나이는 많이 차이 안 나는데…(웃음) 후배들의 말을 허투루 안 듣게 돼요. 혹시라도 제가 놓치는 게 있어서 ‘나중에 더 돌아봐줄걸’ 후회 하고 싶지 않아서요.
다른 여성 아티스트들이 선미를 통해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선미가 했으니까, 다른 사람도 할 수 있고요. 후배들에게 조언할 때는 어떤 타입이에요? 자주 하는 말이 있나요?
저는 현실적인 말을 해주는 편이에요. 지금 막 시작한 친구들한테 ‘천천히 가도 괜찮아’ 이런 식으로 말해주지 않아요. ‘넌 잘돼야 해’라고 해요. ‘성공보다 네가 중요해’라고 조언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일단 잘돼야 네 삶이 보장된다’고 하죠. 진짜 다 잘돼야 해요.(웃음) 제가 이제 서른인데, 옛날에는 서른이 진짜 어른인 줄 알았어요. 제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 저희 어머니가 스물아홉이셨거든요. 그런데 아직도 저는 제가 너무 아이 같아요.
15년간 사랑받았는데 대중들에게 여전히 듣고 싶은 말이 있나요?
모든 걸 다 떠나서 ‘저 사람은 오래 보고 싶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요. 이미 15년을 봤지만 더 오래 보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건 이 세계에서 오래 버텼다는 거니까요. ‘가시나’ 할 때도 ‘나도 3년 뒤면 끝이지 뭐’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3년 뒤에도 아직 괜찮더라고요.(웃음) ‘그럼 또 3년 해보지 뭐.’ 이렇게 살고 있어요. 그렇게 사니까 마음이 너무 편해요. 나머진 저도 몰라요.(웃음)
어린 시절에는 막연하게 어른이 되면 어떤 모습이 되기를 꿈꾸잖아요. 어린 시절에 바라던 어른이 되었나요?
오…! 네, 제가 그런 모습이 되었어요. 이 질문 받고 방금 생각해봤어요. 지금까지 수많은 인터뷰 중에 이런 질문은 받아본 적이 없는데 생각해보니까 그래요.
다 이루었네요, 그럼.
제가 꿈꾸던 모습으로 되어 있는 거 같아요. 생각했던 거보다 더 큰 사람이 된 거 같아요. 운이 정말 좋았죠. 다 운발이에요.(웃음)
코로나19로 예정된 월드투어를 취소했었잖아요. 그후로도 계속 준비 중인가요?
너무 아쉬워요. 내년에는 꼭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원더걸스로 미국 활동을 해봤지만 혼자서 월드 투어를 하는 건 처음이었고 그게 저한테는 모험이었어요. 처음 투어 제안을 받았을 때 못한다고 생각했어요. 가능성을 본 투어라서 새로운 월드투어에 대한 기대가 컸어요. 하지만 오히려 무대를 구성할 에피소드는 더 많아졌으니까, 더 완성도 높은 공연을 내년에는 해보고 싶어요.
이런 늦은 밤의 인터뷰도 좋네요. 처음 만난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간 희열과 함께 이제 집으로 돌아가면 되겠어요.
맞아요. 오늘 진짜 다 너무 멋있었어요. 다들 나사가 하나씩 빠진 사람들 같이. 하하! 이 말은 칭찬이에요.
이렇게 집에 돌아가면 바로 쓰러져서 자나요?
집에 가면 또 그때부터 다시 시작이에요.
*본 기사에는 협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포토그래퍼
- Hyea W. Kang
- 인터뷰 에디터
- 허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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