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이라는 말 대신, 차별금지법과 생활동반자법
그저 같이 사는 세계를 꿈꾼다. 내가 누구여도 괜찮고 우리가 어떤 관계여도 안전한 내일을 위해 오늘 필요한 두 가지 법안에 대하여.
차별금지법
장예정 |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
2011년 발족한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146개의 단체로 구성된 연대체이다. 2017년 재출범 이후,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어떤 차별을 포함하는가? 기존의 차별금지법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기존의 장애인 차별금지법, 남녀고용평등법 등은 개별 차별 사유, 특정 영역에 국한해 적용된다. 하지만 개인의 정체성은 단일하게 머무르지 않고 복합적으로 구성된다. 여성 장애인과 성소수자 장애인이 겪는 문제는 각각 다른데, 현재의 개별법은 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이에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차별 사유로서 성별, 장애, 인종, 성적지향, 고용 형태 등을 포함하고 재화용역, 행정서비스처럼 확장된 영역에서의 차별을 금지한다.
이 법으로 무엇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성희롱 관련 조항은 일상의 많은 부분을 바꿀 수 있다. 현재는 근무기관 내에서, 고용관계 사이에서만 성희롱 문제가 인정될 뿐 일상에서 만연한 성희롱에 대해 법적 규제를 가할 수 있는 조항이 없고 이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부족하다. 성희롱을 포함한 차별적 괴롭힘을 방지하고자 하는 차별금지법이 생긴다면 이에 대한 제재는 물론 근본적인 인식 개선 또한 가능할 것이다.
소수자만을 위한 법이라는 인식이 있다. 누구를 위한 법인가?
약자에게 가장 필요한 법이라는 점에서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핵심은 누구나 약자의 위치에 놓일 수 있다는 점에서 모두를 위한 법이라는 것이다. 이 사회가 성소수자를 포함한 약자를 바라보는 특정한 시선이 있을 때, 그 시선은 언제든 나에게도 향해올 수 있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더라도 그의 정체성으로 차별받지 않을 때 모두가 안전할 수 있다.
무려 14년 동안 발의와 폐기를 반복해왔다. 폐기가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시작은 2007년 법무부에서 정부 입법의 법이었다. 7개의 차별금지 조항이 삭제되었는데 당시만 해도 사회적 이슈로까지 다뤄지지는 않아 그대로 넘어갔다. 19대 국회에서 김한길 의원이 추가 조항을 넣은 차별금지법을 다시 발의했는데, 갑작스럽게 난리가 났다. 반대세력이 국회의원실에 찾아와 난동을 부리기까지 했다. 법안 발의만으로 이렇게 심한 저항을 겪은 것은 처음이라 결국 법안은 철회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 반대세력은 이런 식의 공격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차별금지법은 말하는 것조차 암묵적으로 금기시되었다.
21대 국회에서 장혜영 의원의 발의 후 다시금 관심을 모았다. 법안은 현재 어느 단계에 있나?
국회 입법 과정을 단순하게 정리한다면, 관련 상임위에 오른 후, 법제사법위원회 논의를 거쳐, 본회의 표결로 이어진다. 현재 법안은 담당 상임위에 올라가 있고 전문위원들의 의견서가 제출된 상황이다.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기 전에 멈춰 있다.
논의를 빠르게 진행시키는 방법은 없나?
입법 진행은 국회 소관이지만 법안이 시끄러워져야 비로소 논의를 시작한다. 이미 대기 중인 법안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차별금지법은 언제나 ‘나중에’라는 말로 미뤄지곤 했는데 그 말은 결국 지금 안 하겠다는 뜻밖에 되지 않는다. 왜 우리의 삶은 현안이 될 수 없을까? 차별금지법은 나중이 아닌, 지금 당장 필요한 법이라는 목소리를 모아야 한다.
14년 동안 법안을 둘러싸고 실감하는 변화가 있는가?
고 변희수 하사의 추모 논평을 낼 때 느꼈지만 이제 우리뿐 아니라 수많은 단체와 사람들이 차별금지법을 요구하며 국가의 책임을 묻고 있다. 이 법에 대해 말하는 사람, 아는 사람이 이만큼 많아진 건 몇 년 전과 비교해도 큰 변화다.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 역시 이전보다 확대됐다. 특히 2030세대 중에서는 이미 이 법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법조항 내부에서의 변화는 없나?
기본 기조는 같지만 차별 금지 사유가 늘었다. 차별이 ‘발견’되기 때문인데 이전에는 차별이라 생각지 않았던 부분을 점점 인지하게 되는 거다. 예를 들어 한국사회 내에서는 국적, 언어 등의 차별 사유가 더해졌다.
차별에 대해서는 누구나 반대한다. 그럼에도 해당 법안에 대한 편견과 오해는 많아 보이는데, 어떤 것들이 있는가?
차별금지법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주장이 있다. ‘반동성애’ 설교를 하는 교회가 처벌을 받는다는 이야기도 하는데, 차별금지법은 고용, 교육, 재화용역, 행정서비스의 공적 영역에 한해 적용되기에 전혀 틀린 말이다. 그리고 표현의 자유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는 게 아니다. 성소수자로서 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 자신에 대해 말하지 못하는 거야말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받는 것이다.
입법 전망을 어떻게 보는가?
연내 제정을 목표로 두고 있다. 국회의 결단 외에 사회적 분위기는 이미 준비되었다고 생각한다. 장혜영 의원의 말을 빌리자면 이런 법안은 사회적 합의가 아닌 사회적 결단이 필요하다. 최근엔 아시안헤이트 문제로 해외의 교민들 역시 많은 관심을 가지는데 법에 대한 수요가 많아질수록 입법 전망은 긍정적이다.
입법을 위해 앞으로 더 풀어나가야 하는 문제는 무엇일까?
국회의원들은 말하는 순간 폭격당할 것이라는 두려움과 당장 급한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을 버려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이 법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목소리를 모을 것이다. 반대세력의 논리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설득해야 하는 대상은 이 법에 대해 아직 입장이 없는 사람들이다.
입법에 힘을 싣고자 하는 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현재 ‘만인 선언’을 준비하고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만인선언문 문구를 2명 이상이 함께 읽는 모습을 영상으로 보내주시면 제작 후 배포할 예정이다. 국민동의청원 또한 5~6월쯤 다시 시작하려 한다. 작은 참여이지만 이런 관심이 모이고 모이면 정치적 목소리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달라.
생활동반자법
황두영 | 작가
국회 보좌관으로 일하며 국내 최초로 2012년부터 ‘생활동반자법’ 명칭을 만들고 입법 내용을 제안했다. 생활동반자법의 개념을 다룬 <외롭지 않을 권리>를 썼다.
생활동반자는 어떤 개념인가? 기존의 가족제도, 혼인제도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말 그대로 같이 생계를 하며 서로를 돕고 부양하는 사이를 뜻한다. 기존의 혼인제도에 속하지 않는 관계가 늘어났지만 이들을 명명하거나 보호하는 제도는 없다. 제도로서의 혼인은 이성애자 사이에서 성애적 관계를 맺고 평생을 함께 살겠다는 각오가 있는 쌍에게 주어지는 아주 특수한 가족 구성 방식이다. 그런데 이 단 하나의 방식이 다양한 상황의, 다양한 세대의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현저히 매력이 떨어진다. 누군가에게는 다른 종류의 친밀성, 조금 더 느슨하게 연결된 공동체가 필요하고 생활동반자가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이 법으로 무엇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주택 문제가 대표적이지만 이 외에도 건강보험, 국민연금 등 가족으로서 당연히 주어지는 혜택을 결혼 바깥의 가구에게도 제공하게 된다. 혼인, 혈연에 한하지 않고 실제 서로를 부양하는 둘에게 초점을 맞추어 권리를 부여한다면 더 다양한 공동체의 삶이 가능할 것이다. 현재 동거 가구의 경우 헤어질 때 자신의 권리, 재산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 생활동반자법은 혼인관계가 아닌 두 사람이 헤어질 때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정리될 수 있도록 돕는다.
생활동반자법의 필요성을 느낀 계기가 있는가?
예전에는 결혼 제도 밖에 있는 성인을 노처녀, 홀애비, 과부 등 소수자로 칭하는 말을 사용할 정도로 결혼이 보편적 전제였다. 그러나 처음 개념을 제안했던 2012년만 해도 결혼 제도를 선택하지 않은 성인이 이미 많았다. ‘그럼 그 사람들은 제도적으로 외롭게 살 수밖에 없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자 대안 정책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그때보다 10년이 지났고 더 빠른 속도로 1인가구 수가 늘어 2000년에 비해 3배 가까이 증가했다. 생활동반자법은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정책이 아닌, 지금 당장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정책이다.
소수자만을 위한 법이라는 인식이 있다. 누구를 위한 법인가?
동성커플의 경우, 우리나라에서는 동성혼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꿩 대신 닭 격으로 생활동반자법을 이용하는 것이다. 생활동반자법은 결혼 밖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한 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 쉽게 잊히지만 우리나라에 가장 흔한 가구 유형이자 돌봄이 필요한 가구를 말하고 싶은데, 바로 노인 1인가구다. 현재로서 노인 1인가구가 선택할 수 있는 가구 형태는 너무나 한정적이다. 자식들이 부양하거나, 요양 시설을 찾거나, 홀로 외롭게 살거나. 현실에서는 동거를 하는 노인 커플도 많고, 동성 친구들과 함께 사는 노인도 많다. 그들을 보호할 법이 필요하다.
<외롭지 않을 권리>에서 생활동반자법이 개인의 고독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제도로 해결될 수 있을까?
법만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가족을 꾸리는가는 분명 제도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기에 제도는 최소한 사람들을 점점 떨어뜨려 외롭게 살도록 디자인되어서는 안 된다. 둘 사이가 합리적이고 공평하다면 외로움을 더 쉽고 다양하게 해결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야 한다.
2012년 발의를 준비하던 생활동반자법은 어떻게 되었나?
발의에 필요한 10명 이상의 동의를 채우고 제출만 하면 되는 상태였다. 하지만 법안을 공개하기도 전에 법의 내용과도 무관한 비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에 생활동반자법이라는 개념이 사회적으로 이해받지 못하고 있었기에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공격 지점 없이 완성도 있는 법안을 제출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판단해 조금 더 연구를 하기로 결정했다.
법안은 현재 어느 단계에 있나?
지연된 채 아직 발의를 하지 못한 상황이다. 그러나 국회 내에서 생활동반자법을 이해하고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을 실감한다. 특정 정당의 정책이 아니라, 사회적 흐름으로서 이해되고 같이 고민해볼 문제로 다뤄질 만큼 사회가 성숙해졌다고 느낀다.
법조항 내부에서의 변화는 없나?
법적인 내용 자체는 크게 변화하지 않았는데 배경과 맥락이 조금 달라졌다. 처음에는 비혼 의사가 있는 사람들의 대안적인 가족 개념이었다면, 지금은 한국의 돌봄 공백에 대한 대안적 정책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OECD 국가 중 한국의 노인빈곤, 노인자살률이 압도적 1위일 정도로 노인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내년부터는 베이비부머 세대인 1955~58년생이 법적인 노인인구에 포함되기 시작하기에 고독사를 포함한 노인문제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
생활동반자법이 기존의 가족을 해체할 거라며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일단 생활동반자법은 법적인 계약을 맺는 것이기에 남용할 수 있는 제도가 아니다. 지금의 결혼처럼 단 한 사람과 맺을 수 있으며, 지금의 이혼처럼 책임을 다하지 못할 경우 보상을 해야 할 수도 있다. 한국에서 가족을 맺는 것은 너무나 막중한 일로 느껴진다. ‘배우자라면, 부모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라는 말이 주는 부담 때문에 가족 맺기를 꺼려하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그렇다면 오히려 장벽을 낮추고 사람들이 같이 살아보도록 만드는 것이 가족을 이루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이로 인해 출생률이 더 낮아질 것이라는 비판도 꾸준하다.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에 달린 문제이지만 출생률을 하나의 정책적인 지표로 본다면 이미 0.8명대로 떨어졌다. 이것은 현재 가족정책의 실패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다. 지금의 가족 정책만큼 가족을 빠르게 무너뜨리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아예 다른 획기적인 대안이 필요하다는 결과가 나와야 자연스럽다. 가족을 더 쉽고 즐겁게 이룰 수 있는 제도를 제시해야 한다.
입법 전망을 어떻게 보는가?
최근 여성가족부는 동거 가구에 대한 차별 해소에 힘쓰겠다고 발표했고, 법무부 또한 1인가구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발표했다. 새로운 가족제도 논의는 끊임없이 제시되고 있기에 꼭 생활동반자라는 워딩이 아닐지라도 21대 국회에서는 조금 더 진전될 것이라 기대한다.
입법을 위해 앞으로 더 풀어나가야 하는 문제는 무엇일까?
기존 가족제도의 한계에 공감하고, 이를 개혁해야 한다는 동의까지는 다 와 있다. 다만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 기존틀이 제시하던 선택지 외의 옵션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입법에 힘을 싣고자 하는 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투표를 하고, 관련 단체에 후원을 하거나, SNS로 관심 법안을 알리고, 지자체 의원에게 면담을 요청할 수도 있다. 기업이나 기관은 자신들의 입장을 전달하고 원하는 걸 요구하기 위해 국회의원을 자주 찾는다. 일반 시민이라고 안 될 리 없다. 정치적 참여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 에디터
- 정지원
- 포토그래퍼
- HYUN KYUNG J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