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툭 끊어지는 플로우에 독기만을 품던 키드밀리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과거는 과거고, 실은 이게 진짜라고 말한다.

 

셔츠와 모자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코트는 1017 알릭스 9SM(1017 ALYX 9SM).

오늘로 새 앨범 <BEIGE 0.5>가 나온 지 딱 3주가 지났네요. 
발매하고 이틀 정도만 반응을 확인했어요. 장르의 마니아는 좋아하는 것 같고, 팬인지 아닌지 아리송한 어떤 사람들은 싫어하는 것 같아요. “키드밀리 형, 옛날처럼 세게 해줘” 뭐 그런 분위기?

힙합 커뮤니티에 검색해보니 온도 차가 느껴지긴 했어요.
그게 좋아요. 모든 사람이 저를, 또 제 음악을 좋아하는 건 재미없잖아요. 양극으로 나뉠 걸 예상했는데, 그냥 했어요. 재미있잖아요. 갑자기 ‘감성충’이 됐다는 말도 들어요.(웃음) 저는 단지 저 자신에게 떳떳한 음악을 하고 싶었어요. 멋있는 척하는 거 말고요. 센 척하는 것도 싫고요. 그냥 최원재 같은 거요. 이미 나와 있는 제 노래를 제가 못 들어주겠더라고요. 진짜 웃겨서.

리스너의 예상이나 기대를 보기 좋게 배반하고 싶다는 얼굴도 좀 엿보이는데요?
그런 마음이 없진 않지만, 사실 불편했어요. 이전까지 제가 내놓은 음악이나 미디어를 통해 보이는 모습이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매사에 아니꼬운 모습이 하나의 캐릭터가 되고 나니까 의식적으로 더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어요. 왜냐면 제 옆엔 스윙스나 저스티스 같은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그 사람들 진짜 세잖아요.(웃음) 그게 힙합이라고 생각했어요. 일부러 더 못되게 행동한 시절이 있어요. 어느 순간 내 옷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죠. 딱 ‘현타’가 오더라고요.

재킷과 티셔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팬츠는 릭 오웬스(Rick Owens). 스커트는 혜인 서(Hyein Seo). 신발은 프라다(Prada).

오늘도 좀 의외였어요. 마음 단단히 먹고 왔는데 의외로 다소곳한 태도에 살짝 당황했어요. 
하하. 오늘 새로운 걸 좀 많이 했죠. 진짜 참한 머리도 하고 땋기도 하고요. 치마도 입었잖아요. 저는 그런 사람이에요. 단순해요. 사실 별 생각이 없어요, 인생에. 막 사는 편이에요.

간결한 기타 리프와 보컬로 시작하는 <BEIGE 0.5>의 첫 트랙 ‘손톱’을 듣고 다른 뮤지션의 앨범을 잘못 튼 줄 알았어요. 여러모로 의외이긴 하죠. 
원래 넬이나 새소년 같은 밴드 음악을 좋아해요. 언젠가 그런 장르를 꼭 해보고 싶었는데, 마침 하고 싶길래 했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난 다음, 그때부터 시작하는 감정을 담고 싶었어요. 기존에 만들어둔 음악 중 흐름이 잘 맞는 곡을 추려서 모아봤어요. ‘손톱’이라는 곡은 자려고 누웠는데 비트가 딱 왔거든요. 휴대폰 음성녹음 앱으로 녹음한 다음 바로 큐베이스에 올려서 작업했어요. 네오 서울이나 세기말 같은 감성을 담고 싶었어요.

요즘엔 뭘 들어요?
시티 팝에 꽂혔어요. 유튜브에서 맨날 찾아 듣는데, 제가 좋아한다고 그게 제 음악이 될 순 없더라고요. 특히 시티 팝이 그래요. 시티 팝이 유행하던 시절에 일본에서 살아보지 않고는 정확한 코드를 이해하기 어려운 장르라고 생각해요. 일단 좋게 듣고 있어요. 테임 임팔라처럼 사이키델릭한 사운드 있잖아요. 몽롱하고 리버브 엄청나게 빵빵한 그런 스타일을 힙합에 접목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더플백 상의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힙합을 축으로 하지만 장르의 스펙트럼이 이렇게 열려 있네요. 유년 시절엔 티아라를 그렇게 좋아했다면서요?
하하. 맞아요. ‘너 때문에 미쳐’라는 노래를 정말 좋아했어요. 한국에서만 나올 수 있는 굉장히 특색 있는 음악과 스타일을 갖춘 그룹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높이 사요. 티아라와 같은 시기에 활동한 아이돌이 지금 케이팝이 누리는 영광을 만드는 데 주춧돌 역할을 했다고 봐요. 엄청난 일조를 한 거죠. 제가 케이팝을 좀 좋아해요.

몇몇 힙합 뮤지션은 케이팝이라는 울타리에 자신을 가두지 말라고 이야기하던데요. 
저도 처음엔 그랬죠. 애플뮤직 같은 스트리밍 사이트에 장르가 뭔지 적혀 있잖아요. 저도 원래 꼭 랩, 힙합으로 적어달라고 했거든요. 근데 지금 보시면 제 음악은 케이팝으로 나와요. 제가 그렇게 해달라고 요청했어요.

키드밀리 하면 패션을 빼놓을 수 없죠. 브랜드 논디스클로즈도 전개 중이잖아요. 오늘은 손톱에 세기말적 감성이 가득한 브랜드 마린 세레의 로고를 새겼네요?
제 브랜드에서는 그냥 제가 입고 싶은 옷을 만들어요. 직원들에게 힌트만 던지는 식으로요. 요즘 유광 검은색 옷에 빠져 있어요. 무채색이 반짝거릴 때 좋아 보이더라고요. 마린 세레를 좋아해서 브랜드 로고를 손톱에 해봤어요. 마린 세레에서 검은색 유광 가죽바지를 하나 샀는데 그거 입을 때 세트로 보이고 싶어서요. 근데 갑자기 더워졌네요.(웃음)

새롭게 좋아진 브랜드는요?
네멘이라고 아웃도어 스타일을 지향하는 브랜드인데 가격은 좀 나쁜 편이에요. 요즘 행사가 없어서 살 순 없어요. 돈이 없거든요.

이너와 코트는 강혁(Kanghyuk).

행사의 계절에 아무 무대에도 설 수 없는 건 어때요?
여러 마음이 들어요. 사실 어느 순간 좀 당연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어느 무대에 서든 날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막연한 자신감 같은 거요. 늘 바쁠 줄 알았죠. 코로나19 때문이긴 하지만 몇 개월쯤 무대에 서지 않으니 사람들이 저를 알아보지도 못하더라고요. 내가 되게 큰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다 착각이었어요.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일이 정말 특별하다는 것도 알게 됐고요. 그러고 나니까 하나하나 전부 다 고맙고 그립더라고요.

행사가 없어서 돈은 없지만 그래도 애스턴 마틴은 샀잖아요. 스튜디오까지 몰고 왔는데 주차 공간이 좁아서 요 앞 건설회관 주차장에 직접 대고 온 건 공공연한 에피소드로 기록할게요.
저도 애스턴 마틴을 살 줄은 몰랐어요. 플렉스하려고 산 건 아니고요. 람보르기니를 사려고 계약까지 했는데 2년 넘게 기다려야 한다더라고요. 그 무렵 잠깐 좋아한 사람이 있는데, 한 2주 정도요. 그 사람이 애스턴 마틴을 좋아했어요. 람보르기니를 타기 위해 2년씩 기다리는 것도 웃기고, 애스턴 마틴을 사면 그 사람이 저를 좋아해줄 거라 생각해서 확 사버렸죠. 뒷일 생각 안 하고요. 그 차가 007시리즈에 나온 줄도 몰랐어요. 알고 보니까 와, 진짜 멋진 차라는 걸 알았어요. 제임스 본드 콘셉트로 뮤비라도 하나 찍어야 하나.

당신은 노래를 부르고, 밴드음악과 시티 팝을 좋아하면서 애스턴 마틴을 타는 좀 드문 래퍼네요. 왜 꼭 힙합이어야만 해요?
좋으니까요. 제 기본은 언제나 힙합이에요. 힙합은 꼭 길바닥 같아요. 누구든 길바닥에서 시작해서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어요. 저도 그 로망이 있죠. 가진 거 안 숨기고, 가지지 못했다고 주눅 들지 않아도 돼요. 잘 살든 많이 배웠든 상관없이 디스 붙어서 이기면 그게 이기는 판이에요. 공평하잖아요. 근데 저 요즘은 진짜 밴드를 해보고 싶어요. 또 모르죠, 어느 날 갑자기 무슨 밴드의 프런트맨 최원재로 돌아올 수도 있고요. 갑자기 테크노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웃음)

스카프는 릭 오웬스. 티셔츠는 스타일리스 소장품. 팬츠는 혜인 서. 신발은 핸더스킴(Hender Scheme).

두고 보면 알겠죠. 키드밀리에게 스윙스라는 존재는 무엇인가요?
이제 대표님 아니고 형이죠. 그냥 형.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그 형의 씀씀이라든가, 쓰는 물건, 태도까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람은 제게 꿈을 준 사람이에요.

당신의 헤이터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올해 정규 2집을 낼 계획인데요. 헤이터에게 하고 싶은 말이 거기 담겨 있어요. 그들에게 거친 욕과 고마운 인사를 함께 날릴 각오예요. 좀 세요, 하하. 인터뷰 처음에 앨범이 나오고 딱 이틀만 반응을 살폈다고 했잖아요. 그 이틀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길 예정이에요. 전 헤이터가 좋아요. 제 음악에 대해 냉정하게 말해주는 사람들이니까요. 제 외모나 스타일을 지적하는 것도 좋고요. 당하고만 있을 순 없으니 저도 반박을 하고 싶어서 미친 듯이 작업하게 돼요. 그런 자극이 엄청난 아이디어를 주죠.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에요,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