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들에 핀 야생화처럼 강렬하고 과감하게 물든 플라워 패턴. 세상 어디에도 지루한 꽃은 없다.

 

봄이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꽃 시장에 들러 튤립을 한아름 산다. 그건 봄을 맞이하는 나만의 루틴으로, 집 안에 튤립 꽃 향기가 만연하면 우리 가족은 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깨닫는다. 오락가락하는 날씨 통에 겨울의 냉기가 간혹 남아 있다고 해도 부러 두터운 외투를 정리하고 봄여름 옷을 준비하는 게 바로 이때다. 그리고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 옷차림에서 무채색 옷이 자취를 감추고 컬러가 피어나기 시작한다. 그에 더해 꽃도 핀다.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겨울이 끝나고 산에도 들에도 그리고 사람들 옷에도 꽃이 만개했다. 봄 친구인 꽃이 뭐가 그리 특별하다고 야단스러운가 싶겠지만, 이번 시즌 더욱 화려한 꽃 잔치가 벌어졌으니 그 매력을 짚고 넘어가도록 한다.

목가적 분위기의 꽃무늬 원피스는 핀코(Pinko).

드리스 반 노튼과 크리스찬 라크로와의 만남으로 예견되었던 화려의 장은 역시 꽃으로 시작해 꽃으로 마무리되었다. 평소 꽃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드리스 반 노튼과 오트쿠튀르의 살아 있는 역사인 크리스찬 라크로와의 협업이니 이미 시작부터 맥시멀리즘 스타일로 가닥을 잡았을 것(둘은 무려 5개월 동안 비밀 회동을 통해 컬렉션을 준비했다고!). 그들은 다양한 패턴과 실험적인 실루엣 등을 이용해 레디투웨어와 오트쿠튀르를 넘나드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블랙 실크 슈트에 노랗고 붉게 장식한 꽃이나 또 하나의 트렌드 키워드인 도트와 믹스매치한 스타일링, 러플을 한층 돋보이게 하는 꽃 프린트 등. 실키한 소재에 더한 고급스러운 꽃 자수 장식 시리즈는 당장 미술관에 가져다 걸어도 손색없을, 차라리 예술 작품에 가까웠다. 아마도 그런 전시가 열린다면 제목은 <100년의 복식사: 위대한 꽃의 여정> 정도가 되리라.

한편 루이 비통, 발렌티노, 마르니 등은 벨 에포크 시대와 보태니컬 프린트 디테일에서 영감을 받은 룩을 대거 소개했다. 하나같이 독창적이고 살아 숨쉬는 듯 생생함을 보여준 플라워 패턴의 향연. 강렬한 컬러 매치가 꽃의 야성미를 깨우며 룩에 압도적인 생기를 부여했다. 보다 그래픽적이고 실키한 텍스처를 강조해 봄보다 여름이 기대되는 스타일을 보여준 베르사체와 프라발 구룽의 컬렉션도 눈여겨볼 만하다. 동서양의 가치를 교묘하게 트위스트한 에르뎀과 오리엔탈 무드로 완성한 리차드 퀸의 컬렉션에서는 플라워 패턴이 동양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의 무게가 느껴지기도.

꽃무늬에 스와로브스키를 장식한 스카프는 에트로(Etro).

탐스러운 장미 장식의 언밸런스 스커트는 핀코.

이번 시즌 화려한 플라워 패턴은 아방가르드한 드레스를 비롯해 나이트 룩에 제한된 것이 아닌 웨어러블한 스커트, 재킷, 가방과 구두 등 데일리 아이템에 폭넓게 쓰였다. 이미 가지고 있는 아이템과 더해 취향에 맞춰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는 이야기. 이왕 무겁고 다크한 외투를 벗어 던졌다면 꽃이 지닌 화려함에 취해보는 것이 어떨지. ‘꽃이 지고 나서야 봄이었음을 알았다’라는 말처럼 시도하지 않고 마음으로 품고만 있다 지나면 아쉬움만 남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