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의 신세계
새해가 밝았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마음으로 눈에 띄는 드링크 트렌드를 모았다. 여전히 화두는 건강이다.
저도주에서 무알코올까지
저도주의 열풍은 단순히 알코올 도수가 낮은 주류의 인기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소주의 알코올 도수는 자꾸 낮아지지만 취하도록 마시는 음용 방식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데, 이는 정확히 이야기하면 저도주의 열풍과 결이 조금 다르다. 같은 의미에서 주로 폭탄주로 만들어 먹는 위스키를 알코올 도수를 40도 아래로 낮춰 출시하면서 저도주 열풍에 발 맞춘다 설명하는 일도 좀 애매하다. 오히려 위스키 업계에서는 50도가 넘는 CS(캐스크 스트렝스, Cask Strength) 술이 꾸준히 강세다. 저도주 열풍이라는 말은 ‘좋은 술을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조금씩 마시는 현상’을 지칭한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알코올 도수가 강하지 않은 칵테일을 브런치와 곁들여 마신다거나 저녁의 바에서 가벼운 보디감과 가벼운 알코올의 와인을 간단히 마시거나, 작은 잔에 조금 따라 마시는 식전주나 식후주를 즐기는 라이프스타일을 떠올리면 더 이해가 쉬울 것이다. 더불어 건강 문제 때문에 혹은 개인의 선택으로 아예 알코올을 마시지 않는 이들을 위한 무알코올 술의 개발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름난 칵테일 바의 메뉴판을 들여다보면 목테일(Mocktail)이라고 부르는 무알코올 칵테일 카테고리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압구정에 새로 문을 연 조각보 바에서도 정성 들여 만드는 목테일 메뉴가 몇 가지 마련돼 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2018년 12월 21일자 기사 ‘How You’ll be Eating in 2019’에서 아침에 마시는 칵테일 시장이 커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목테일의 다양한 음용 상황에 대해 설명한 셈이다. 주류 업계는 신제품 출시로 트렌드를 수용하고 있다. 영국의 크래프트 음료 브랜드 시드립(Seedlip)은 세계 최초로 증류된 비알코올 스피리츠를 출시했다. 진이나 위스키처럼 허브 향, 스파이스 향이 나는 증류된 음료이며, 이를 기반으로 더 술 맛에 가까운 목테일 구현이 가능해진다.
내추럴 와인이 쏘아 올린 공
유기농법과 자연 발효를 통해 와인을 가장 자연스러운 결과물로 만들고자 하는 ‘운동’이자 ‘신념’이 바로 ‘내추럴 와인’이다. 와인의 특정한 맛이나 스타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추럴 와인의 고유한 맛의 특징을 딱 잘라 정의할 순 없다. 하지만 이산화황 사용을 극도로 자제하거나 자연 발효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산미가 도드라지고, 쿰쿰한 향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공통점이 발견될 때도 있다. 기존에 익숙하게 느꼈던 와인의 맛과 향의 궤도를 벗어나는 내추럴 와인이 시장에 대거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연 발효’가 주는 펑키한 맛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내추럴 와인이 낮춰준 입맛의 장벽 덕에 새롭게 빛을 보고 있는 와인이 ‘오렌지 와인’이다. 오렌지 와인은 발효와 숙성 과정에서 포도줄기와 씨까지 접촉시켜 타닌감과 색깔을 뽑아낸 와인이다. 자몽 색깔과 오렌지 색깔의 중간쯤 되는 진한 빛깔이 나고 화이트 품종으로 만든 와인이지만 바디감과 타닌감이 진하게 느껴지는 묘한 카테고리를 차지하게 됐다. 내추럴 와인의 열풍을 훈풍 삼아 국내에도 수입되는 제품 수가 빠르게 증가되고 있다. 비슷한 맥락으로 벨기에 수도원에서 자연 효모로 만드는 람빅(Lambic) 맥주가 ‘차트 역주행’을 하게 되는 일도 생겼다. 사워 맥주는 그간 소수 마니아층이 즐기는 독특한 맥주 카테고리의 일종이었는데, 내추럴 와인 덕에 ‘신맛’의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특히 기간이 다르게 숙성된 람빅 원액을 섞고 병에서 2차 발효를 시키는 괴즈(Gueze)는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맛에도 편하게 잘 맞아 수요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크래프트 맥주 브루어리의 포용력
긱(Geek)이라고 부르는 크래프트 맥주광들은 변화와 혁신에 열려 있는 집단이다. 저도주 열풍과 자연 발효의 인기 모두 크래프트 맥주 업계에 깊게 파고들었고, 수용됐으며, 이미 변화가 시작됐다. 미국의 브루어 협회(Brewers Association)는 무알코올 맥주 카테고리를 시상식에 포함시켰고 대마와 같은 새로운 식재료를 침용한 무알코올 맥주 개발에도 박차를 가했다. 과일을 많이 넣고 알코올 도수를 낮춘 음료수 같은 사워 맥주도 앞으로 더 많이 등장할 전망이다. 무엇보다 맥주광들의 유연성은 맥주 밖의 영역과의 교류까지 이어졌고, 꼭 맥주가 아니어도 양조한다는 게 크래프트 맥주 업계의 요즘 특징이다. 녹차나 홍차에 유익균을 넣어 발효한 음료인 콤부차의 유행을 이끈 것도 크래프트 브루어리였으며, 시드르 혹은 사이더라고 부르는 사과술을 힙하게 풀어낸 것도 크래프트 브루어리다. 그리고 최근 몇 년간은 꿀로 만든 술인 미드(Mead)의 인기를 견인하기도 했다. 미드는 기원전 7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등장하는 고대의 술이다. 맥주가 세상에 등장하기도 전, 꿀을 발효한 술인 미드는 로마인, 그리스인, 그리고 바이킹족들에게 크게 인기 있었던 술로 한동안 대가 끊겨 있었다. 이 꿀술을 본격적으로 다시 양조한 주체가 크래프트 브루어리다. 그래서 맥주 양조장에서 주로 사이더와 미드를 함께 만드는 경우가 많다. 2015년 미드를 만드는 미국의 미더리(Meadery)는 250개 정도였는데 2019년에는 600개를 넘어섰다는 통계도 나왔다. 사실 꿀 하나로 맛있는 술을 만들기란 쉽지 않다. 텁텁한 단맛이 강조되기 십상이라, 브루어들은 미드에 과일을 적극 활용해 신맛을 더하기도 한다. 해외 크래프트 맥주 소식을 뒤지다 보면 미드는 여기저기에서 쉽게 발견되는데, 술에 있어서만큼은 국내외 시차가 거의 없는 한국이라도 미드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깝다. 국내 주세법상 과실로 만든 술이 아닌 경우 식약처 검사를 통과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는 영국의 ‘고스넬스’ 정도가 정식으로 수입되고 있다.
차를 만난 칵테일
칵테일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최근 칵테일 바에서 새롭게 개편된 칵테일에 유난히 차(Tea)가 많이 들어가는 것을 눈치 챘을 테다. 청담동의 화이트 스피리츠를 전문으로 다루는 ‘화이트바’는 일식 레스토랑 코사카와 협업해 녹차, 진, 샴페인으로 만든 특별한 칵테일을 선보이고 있다. 도곡동에는 아예 전면에 차를 내세운 ‘티 앤 프루프’ 바가 있다. 홍대에 있는 바 페더는 겨울 시즌 한정 메뉴로 다양한 차가 들어간 네 가지 시그니처 칵테일을 선보인다. 주로 술에 차를 침용해 향을 더하는 칵테일이다. 해외에서는 이미 몇 해 전부터 칵테일의 중요한 요소로 차를 자주 활용해왔다. 분자 요리로 유명한 레스토랑 알리니아(Alinea)가 만든 칵테일 바 ‘에이비어리(Aviary)’에는 십수 가지 차를 활용해 칵테일에 독특한 향과 맛을 더한다. 단순히 차를 침용하는 것이 아니라 술을 증류하는 과정에서 찻잎을 더하는 장비와 기술을 도입한 칵테일 바도 있다. 청담동 ‘티센트’는 바 뒤쪽에 마련된 랩에서 강압 증류기와 초음파 분산기 등을 활용해 차 향이 강력한 술을 만든다. 해외에서도 보기 드문 기술을 바에서 선보이고 있다. 술을 마시지 않는 이들이 이곳에서 차만 즐기는 것도 가능하다. 신맛 단맛이 주를 이루는 칵테일 맛에 차는 화려한 향을 더하는 역할을 맡는다. 더 이상 화려한 장식이나 훈연 연기로 칵테일의 차별화를 이루기가 어려워진 바텐더들이 새롭게 개척해낸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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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랜스 에디터
- 손기은
- 포토그래퍼
- KIM MYUNG S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