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설과 함께 향한 곳은 서울에서 2시간이 걸리는 한 목장이었다. 갈대와 들풀이 바다처럼 펼쳐진 곳에서 이설이 말했다. “여기에 앉아서 인터뷰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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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 니트 풀오버는 레이 바이 매치스패션닷컴(Raey by Matchesfashion.com). 구조적인 형태의 귀고리는 젬앤페블스(Jem&Pebb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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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워 패턴 드레스는 마크 제이콥스(Marc Jacobs).

아까 그 들판에서 인터뷰하자고 했을 때, ‘정말 그러면 좋겠는데?’ 생각했어요. 아무것도 없는 그냥 들판이어서, 캠핑 의자나 돗자리가 아쉬운 순간이었어요. 
시골에서 자라서 그런지 그런 분위기를 좋아해요. <옥란면옥> 할 때 연천에서 많이 찍었는데 오늘 촬영장소와 비슷한 것 같아요. 서울에서 벗어나 촬영한다고 해서 저 정말 기대했어요.

언제 어디서 벌레가 나올 지 모르는 곳이기도 하죠. 
별로 안 무서워해요. 지네만 아니면.(웃음).

드라마 <악마가 너의 이름을 부를 때> 마지막 방송이 끝난 지 이제 일주일 되었지만 사전제작이라 촬영이 끝난 건 훨씬 전이죠. 늘 본방을 보았어요? 
마지막 촬영이 1회 방송할 때쯤 끝났거든요. 혼자 집에서 뭐 먹으면서 봤어요. 요즘에 라면 부숴 먹는 게 그렇게 맛있더라고요. 제가 없었던 현장의 장면들을 보면서 ‘아, 저렇게 했구나. 잘했다’ 하면서.

본인에게도 ‘잘했다’하고요? 
스스로 질책하는 스타일이에요. 제가 하는 걸 보면 ‘왜 저렇게 했지?’ 하죠. 선배들이 워낙 잘하시니까 괜히 더 작게 느껴져요.

스스로 칭찬해주고 싶었던 점이 없어요? 
굳이 말하자면 ‘그래도 많이 안 떨고 했다.’ 긴장을 전보다는 조금 덜 하게 됐구나 하는 점이요. 옛날에는 긴장해서 정말 아무것도 못했는데 이제는 조금 편해졌어요.

300대 1의 오디션을 뚫은 사람이라면 굉장히 쿨하고 당찬 성격이 아닐까 상상했어요.
아니에요. 매우 소심하답니다.(웃음) 누가 장난으로 ‘다신 보지 말자’고 하면 전 진짜로 받아들이거든요. 특히 감정적인 것에 대해 장난을 치면 전혀 쿨하지 못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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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사이즈 트렌치코트는 마이클 마이클 코어스(Michael Michael Kors). 스웨터는 YMC. 롱 드레스는 마쥬.

이번 작품을 하면서 어떤 기대가 있었어요? 
기대라기보다는 스스로에게 조금 궁금했던 것 같아요.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 ‘음악을 잘 모르는데 내가 싱어송라이터를 어떻게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음악 신을 계속 하다 보니까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고요. 드라마 촬영할 때는 드라마 OST를 많이 들었고, 끝나고 나서도 계속 음악을 듣고 있어요. OST도 많이 듣고 프랭크 오션, 알렉 벤자민 그리고 가을은 또 김동률 씨의 계절인 만큼 김동률 씨 음악도 듣고. 이번에 선물로 CD를 주셨는데 너무 행복했어요.

그런 마음이 모두 충족되었나요? 
저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고 또 너무 좋은 사람들이랑 한다는 게 정말 행복한 일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어서 좋았고요. 조금 더 믿음을 가지고 뻔뻔하게 해보지 못한 것이 아쉬워요.

<악마>는 선택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욕망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생각해봤어요? 
배우들끼리도 이런 이야기를 자주 했는데요, 돌고 돌아 결국 ‘영혼’이 되더라고요. 영혼이 없다면 사랑도 못할 거고, 친구도 없을 거고, 희망도 없을 테니까. 그러면 살아가는 것이 재미가 있을까요?

결말은 마음에 들어요? 
네, 다들 좋아했어요. 저도 만족스러운 결과고요. 제가 마지막 대본을 받아보고 이경이 꿈을 이뤘다, 건물주가 됐다고 했더니, 다들 너 가수 만들려고 몇 달을 달려왔는데 그런 소리 할 때냐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전작에서는 사이코패스 역할이었는데 이번엔 1등급 영혼을 맡았어요, 착한 캐릭터를 연기하면 실제 모습도 달라지나요? 
1등급 영혼이라는 게 정말 대단한 거잖아요. 이경 역할을 하면서 이경처럼은 못 살더라도 조금 더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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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셔츠 드레스는 스튜디오 톰보이(Studio Tomboy). 뷔스티에는 렉토(Recto). 부츠는 코스(Cos).

그동안 작품을 하면서 베테랑 배우들을 많이 만났죠. 인상적인 선배 배우는 누구였어요? 
다 너무 다르게 인상 깊어서 너무 어려운 질문인데, 한 분만 말한다면 신구 선생님이요. <옥란면옥>에서 연기할 때 함께 버스정류장에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문득 제가 정말 선생님의 대사를 재미있게 듣고 있더라고요. 대사가 엄청 길었는데 정말 할아버지가 말해주는 것처럼 듣고 있었어요. 저는 <악마>할 때도 서동천 역할과 촬영할 때가 제일 좋았어요. 경호 오빠(정경호)는 분장이 힘들어서 싫어했지만 전 서동천이 오는 날만 기다렸어요.(웃음)

<허스토리>, <나쁜 형사>, <악마가 너의 이름을 부를 때> 모두 마니아층이 있는 작품이죠. 당신에게는 어떻게 남았어요?
모두 소중해요. <허스토리>는 첫 작품이다 보니까 카메라나 동선 같은 것도 잘 몰랐어요. 카메라를 열 몇 대 두고 공연처럼 한 번만 하면 되는 건 줄 알았거든요. 카메라에 대한 이해와 촬영현장에 대해 첫 걸음마를 떼게 해준 작품이었어요. <나쁜 형사>는 어떻게 하면 이 캐릭터를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해줬고, <악마>에서는 동료 배우, 현장 스태프 같은 팀원들과의 소통을 배웠어요.

늘 고난이 많은 역할을 했는데, 이번 작품에도 역시 고난을 피하지 못했어요.
맞아요. 제가 그렇게 보이나 봐요.(웃음) 고난을 겪고 일어선 사람처럼. 꿋꿋하게 살아가는 역할들이 재미있기도 하고요. 저도 다양한 이 시대의 청년 중 하나니까요.

지금까지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다면서요? 
‘까대기’부터 찜질방, 카페… 정말 많이 해봤어요. 가장 적성에 맞는 건 까대기요. 계속 트럭 뒤에 타고 돌아다니면서 복숭아 상자를 픽업하는 건데 그게 제일 재미있었어요. 아저씨들 쫓아다니면서 복숭아 박스 옮기는 것도 좋았고, 처음에 두 박스로 시작했다가 나중엔 다섯 박스, 여섯 박스 혼자 옮기면서 성취감도 생겼고 차 타고 돌아다니면서 바람 맞는 것도 좋았고, 떨어진 복숭아 주워 먹는 것도 좋았고, 아저씨들이 시켜주시는 다방 마즙도 되게 맛있어요. 마즙이 메뉴 중에 제일 비싼데 힘내라고 많이 사주셨거든요.(웃음) 지금은 복숭아를 사 먹을 때마다 까대기가 생각나요. 너무 비싸요. 그땐 주워 먹는 과일이었는데….

그때의 경험들이 배우를 하는 지금도 남아 있어요? 
체력적인 부분에서 도움이 많이 돼요. 생활감도 있고 많이 혼나기도 해서 실수를 하더라도 무서워서 떨거나 그러진 않는 것 같아요. 실수를 했으면 그냥 죄송합니다 하고 잘해보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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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안 무드의 스웨터는 바네사브루노(Vanessabruno).

무명 기간이 길지 않았고, 또 금세 주연을 맡고 있는데 항상 스스로 ‘운이 좋았다’고 표현하더군요. 
제게도 되게 신기하고 놀라운 일의 연속이에요. ‘어떻게 이런 제안을 주시지?’ 해요. 연기를 전공한 것도 아니고 정말 그냥 뛰어든 건데 이렇게 된 게 정말 신기할 따름이에요.

관계자들은 배우 이설의 장점을 뭐라고 해요? 
자연스럽다. 되게 평범한데 평범해서 좋다고 하세요. 평범해서 많이 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씀을 많이 해주시더라고요.

적어도 어떤 ‘척’은 하지 않는다는 건가요? 인스타에서도 느껴져요. ‘인스타그래머블’하기 보다, 직접 만든 콩나물밥상을 올리고요.
그런 모습들을 좋게 봐주시는 것 같기도 하고요.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성격이다 보니까. 어떤 척을 하지 못하는 투명한 사람을 <보건교사 안은영> 소설 속에서는 ‘해파리’라고 부르던데…. 그런데 저도 밥도 예쁘게 찍어서 올리는 거예요. 이게 소시지고, 애호박이고, 된장인데 이 메뉴를 자주 해먹어요. 할머니가 된장을 해서 보내주시니까 그냥 맛있는 된장, 물만 있으면 맛있게 돼요.

얼마 전에 샌프란시스코에 다녀왔죠? 휴가였나요? 
<샌프란시스코에서 하룻밤>이라는 영화를 보고 가보고 싶었어요. 정말 좋더라고요 꼭 한 번 살아보고 싶은 곳이었어요. 자연이 너무 많아서 좋았어요. 커피도 너무 맛있었고. 여행 가면 공원에 앉아 있고, 바다 가서 앉아 있곤 하는데 그 시간이 정말 좋더라고요. 미술관에 가는 것도 좋고요.

이제 아르바이트하던 시절보다 돈을 많이 벌지 않아요? 어디에 쓰고 있어요? 
아직 돈을 못 벌어서 쓸 돈도 없고 쓸 데도 없어요.(웃음) 굳이 말하면 여행인데요. 요즘엔 집에 있다 보니까 책 사고, 영화 보는 데 써요. 요즘은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를 사서 읽어보고 있는데 지금 아홉 번째 책을 읽고 있어요. 테드 창 소설도 보고 있고요. <미드90>는 아무런 정보도 기대도 없이 본 영화인데. 배우들 연기도 너무 좋고, 연출도 너무 깔끔해서 감탄하면서 봤어요. 제가 90년대생인데, 미국의 90년대 문화를 볼 수 있는 것도 좋았고 너무 재미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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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사이즈 트렌치코트는 마이클 마이클 코어스. 톡톡한 짜임의 그린 스웨터는 YMC. 롱 드레스는 마쥬. 부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연기해보고 싶은 책 속의 인물도 있어요? 
제일 기억에 남는 책이 <엘리너 올리펀트는 완전 괜찮아>라는 영국소설이에요. 그 주인공 엘리너 올리펀트라는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사람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믿는 괴짜인데 그 여자가 다른 부류의 괴짜 남자를 만나면서 자신의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세상 밖으로 나오고 친구도 만드는 이야기인데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늘은 서울에 돌아가면 뭘 할 건가요?
복싱하러 가려고요. 그냥 하는 거예요. 어제 샌드백 치는 걸 시작해서 오늘도 가서 하고 싶어요. 소리와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느낌이 좋아서, 조만간 좋은 글러브를 사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