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반대함
퇴사를 권하는 시대. 퇴사가 주는 아름다운 로망에 나를 기꺼이 던지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디에 던지려고? 당장 월급과 4대 보험이 없는 현실은 생각보다 냉혹하다. 왜 퇴사를 말리는 사람은 없을까? 우리가 가능한 한 오래도록 회사에 다녀야 하는 몇 가지 이유.
어느 ‘퇴사러’의 고백
퇴사의 유혹은 언제나 달콤하다. 매일 서점에서, TV에서 쏟아지는 퇴사 콘텐츠들은 가난하고 유약하며 지친 직장인의 마음을 부추긴다. 내 주위만 둘러봐도 그렇다. 어떤 선배는 퇴사 후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지친 마음을 다독였다고 했다. 친한 후배는 브런치에 글을 꾸준히 써서 어느 출판사와 책을 두 권이나 계약했고, 직장에서 월급을 받을 때보다 큰 돈을 손에 쥔 프리랜서 선배들도 많다. 나 역시 얼마 전 퇴사를 했다. 결혼을 했지만 경제적 독립을 원하는 나는 여전히 내가 원할 때 여행을 떠날 수 있기를, 망설임 없이 내가 갖고 싶은 가방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퇴사를 하자마자 열심히 일을 찾아다녔다. 무작정 회사를 뛰쳐나온 뒤에 몰려드는 불안은 ‘먹고사니즘’을 위한 어쩔 수 없는 대가였다. 퇴사 후 가장 큰 변화는 평소 사소하게 여겼던 것에서 발견됐다. ‘명함이 없는 나’는 세상 밖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이 차이를 조직 안에 있을 때는 생각지도 못했다. 명함을 건네면 더 이상 나를 설명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회사라는 울타리와 월급 통장이 얼마나 든든한지는 없어지고 나서야 안다. 조직에서는 내가 일부러 찾아다니지 않아도 절로 일이 굴러들어왔다. 일을 하기 싫어 문제였지, 일이 없어 걱정하는 일은 없었다. 별 생각 없이 다녀도 회사는 잘 굴러가고, 영혼 없이 일해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울타리를 벗어나면 이게 곧장 ‘생존’의 문제가 된다. 평일 낮에 카페를 드나드는 여유, 나에 대해 생각할 시간, 자유로운 여행 등 퇴사가 주는 달콤함은 생각보다 짧게 끝난다. 야금야금 줄어들고 있는 통장 잔고를 생각하면 밤마다 공포가 밀려와 퇴사를 후회한다는 경우가 60퍼센트를 넘는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피곤한 인간관계가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는 이유도 나와보면 대단한 게 아니다. 조직을 떠나본 사람들은 안다. 그나마 회사 안에서는 상식이 통했다는 사실을. 회사 밖에는 나와는 전혀 다른, 상상 이상의 사람들이 있다. 카페 사업을 시작한 친구들이 진상 손님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을 셀 수 없이 많이 봤다. 퇴사를 하더라도 결국 사회와의 관계는 피할 수 없다.
다만 당장 먹고사는 일보다 더 큰 문제는, 언젠가는 우리 모두 회사 없이도 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프리랜서의 시대’는 우리의 예상보다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고용의 종말은 막을 수 없고, 회사는 더 이상 우리의 미래를 책임질 수 없다. 자의든 타의든 퇴사를 해야 하는 시기는 반드시 온다. 여성의 경우는 더욱 빠르다. 광고업계의 베테랑이자 울프소셜클럽의 대표 김진아는 “최소 5년은 조직 생활을 해보아야 해요. 최대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다녀보는 걸 권하고 싶어요. 아이러니하게도 입사하자마자 퇴사를 준비해야 하고요. 회사를 다니는 동안에 부지런히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내 브랜드를 만들며 성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세요. 어차피 나는 퇴사를 하게 될 것이고, 직장 생활을 조직이 주는 혜택들을 알뜰히 챙기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무엇에든 유연해져요”라고 말했다. 그토록 날 괴롭게 했던 회사가, 훗날 울타리 밖으로 던져지기 위해 홀로 설 힘을 키우는 소중한 공간으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회사에서 얻어야 할 것들
어느 회사도 직원의 퇴사를 원하지 않는다. 이걸 바꿔 말하면 조직에 있는 동안 회사만 나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얼마든지 나도 회사를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회사를 단순히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자신의 능력을 업그레이드해보는 건 어떨까. 늘 귀찮게만 느껴졌던 영어 강의도, 리더십과 실무 교육도 다르게 보일 것이다. 해외 출장 역시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한 경험이다. 현장에서 부딪히며 배우는 문제 해결 능력이나 지긋지긋하게 힘든 경험까지 버릴 것이 없다. 최악의 상사와 고된 환경 속에 있더라도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사람을 상대하는 법이나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법, 심지어는 내가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앞으로 피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까지 알 수 있다.
경력보다 경험이 중시되는 시대다. 다양한 경험이 쌓여 ‘나’라는 브랜드를 만들고 필요한 상황에 쓰여진다. 내가 맡은 일이 싫어서, 혹은 지겨워서 서둘러 회사를 나오면 그곳에서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회사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나라는 사람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그 후, 내 강점을 전문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갈고닦아야 한다. 과외 수업이나 자격증을 따는 것도 방법이다. 김진아 대표는 “자기계발도 정확한 방향성이 있어야 해요. 업계에서 일을 해본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들이 있어요. 이 업계에서 내가 어떤 식으로 길게 쓰일 수 있을지를 고민한 뒤 그쪽으로 전문성을 키워야 해요. 너무 광범위한 자기계발은 지양하세요. 제 경우를 예로 들자면, ‘카피라이터’로서의 길만 걸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미디어 전략에 대해 공부했다면 어떨까, 아쉬움이 남거든요”라고 덧붙였다. 내가 소유한 가치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방법을 구체화하면서 프리랜서로서의 영역을 꾸준히 다지는 것, 그리고 사업에 필요한 경영 지식과 업계의 흐름까지 공부한다면 완벽한 ‘퇴준생’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이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서라도 퇴사는 충분히 생각하고 천천히 해야 한다. <무작정 퇴사하지 않겠습니다>의 저자 김경진 역시 “불합리한 연봉, 피곤한 인간관계, 넘쳐나는 업무량, 출퇴근길의 피로 등 퇴사할 이유는 정말 많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퇴사를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퇴사해도 될까?’ 하고 질문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질문한다는 것은 확신이 없다는 것이에요. 충분히 나를 돌아보지 않았고 충분히 버텨보지도 않았죠. 진짜 퇴사해도 되는 이들은 조용히 준비를 마치고 자신이 원하는 시기에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나요. 퇴사 선택권을 외부에 넘기지 마세요. 여유를 두고 전략을 짜세요. 이게 핵심입니다”라고 말한다. 조직은 적어도 장소 제공과 물품 조달은 해주지 않나. 이왕 해야 하는 일이라면 부정적인 측면만 보지 말고, 알뜰히 지금 회사가 내 커리어에 미치는 가치를 따져보자. 그러면 일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퇴사는 여성에게 해롭다
덧붙여 김진아 대표는 퇴사가 이제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퇴사 권하는 콘텐츠는 여성에게 해롭다.’ 김진아 대표가 운영하는 ‘울프소셜클럽’으로 달려가게 만든 문장이다. 퇴사를 권하는 콘텐츠는 왜 특히 ‘여성’에게 해로운 걸까?
최근 조사에 따르면 한국 여성의 임금 피크 시기는 35~39세라고 한다. 반면 남성은 45~54세다. 이 결과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결혼이나 육아 등의 이유로 자발적 퇴사를 하는 경우도 많지만, 유리천장에 부딪혀 여성 임원이 적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현상은 조직 밖이라고 다르지 않다. 40세를 기준으로 여성 프리랜서는 남성 프리랜서에 비해 현저히 일이 줄어든다. 일이 있다고 해도 인건비가 저렴한 분야에 여성 프리랜서가 몰려 있다. 반면 40대부터 전성기가 시작되는 남성들은 그들만의 공고한 연대를 형성한다. 이게 여성들에게도 ‘사내 정치’가 필요한 이유라고 김진아 대표는 말한다. “남성들은 ‘사내 정치’ 자체를 업무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해요. 일종의 라인을 형성하는 거죠. 그러면서 필사적으로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줘요. 저는 회사 다닐 때 ‘내 일만 잘하면 되지 뭐’라고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개인의 능력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건 제가 했던 가장 큰 실수였죠. 여성도 연대가 필요해요. 따로 플레이하는 게 개인적인 성향이라고요? 이건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일이에요. 남 좋으라고 하는 일이 아니라, 내 밥벌이를 위한 것이니까요.” 한 직장에 팀장이 10명이라고 가정하면 여성은 한두 자리를 놓고 경쟁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작은 파이를 가지고 경쟁하다 보니 당연히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주기가 힘들다. 적어도 5명은 여성이 팀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근본적인 의문. 이것 자체를 바꾸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여성이 회사에 남아 ‘커넥팅’하며 서로의 롤모델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명함을 주문했다. 이미 퇴사를 했지만 결코 무엇과도 단절되지 않겠다는 결심을 담아서. 얼마 전 김진아 대표가 작업한 스텔라 아르투아의 광고 카피가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다. ‘#꿈은단절되지않는다’
- 에디터
- 황보선
- 포토그래퍼
- SHUTTERSTOCK
- 도움말
- 김진아(의 저자)
- 참고도서
- 김경진, 팜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