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를 마친 배우 고아성과 베트남 푸꾸옥 섬으로 떠났다. 함께하는 매 순간 그녀는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였다. 그 모습은 마치 춤을 추는 듯했고,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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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리브리스 니트 톱은 유닛(Unit), 와이드 데님 팬츠는 그레이양(Greyyang), 드롭 이어링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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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 핏의 뒷판 플리츠 폴로 드레스는 라코스테(Lacoste).

출발 직전, 공항에서 만난 고아성은 무척 단출한 차림이었다. 짐이라고는 작은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그래서 그 안에 무엇이 들었냐고 물었더니, 블루투스 스피커와 책 한 권뿐이라고 했다. 그녀의 쿨한 태도는 푸꾸옥 섬에서도 이어졌다. 예정된 촬영일, 오전부터 주룩주룩 비가 쏟아져 다음 날 비행기에 오르기 전까지 촬영을 해야 했을 때도 그녀는 그저 웃었다. 경유지에서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 때문에 ‘툭툭이’를 타야 했는데, 바깥에 앉은 그녀의 몸이 빗물에 다 젖어버린 일도 있었다. 그 때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후룸라이드 타는 것 같지 않아요?” 이처럼 그녀는 모든 일상에 쿨한 태도를 지니는데, 일을 하거나 그녀가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말할 때만큼은 달랐다. 가만히 들여다본 그녀의 내면은 뜨겁고 뜨거웠다.

지금 푸꾸옥에 함께 있어요. 여름 날씨죠. 여름을 좋아해요?
더위를 별로 타지 않거든요. 하지만 휴양지의 매력은 최근에 알게 됐어요.

어떤 매력이 있던가요?
자연 속에 있는 느낌이 좋아요. 여기 오기 전에도 치앙마이에 다녀왔어요. 지인이 그곳에 다녀오고 나서 여행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그걸 기억해두었다가 갔다 왔죠. 수영하는 걸 좋아해서 계속 물속에 있었어요.

평소에 여행을 즐기나요?
네. 그동안 부지런하게 여행을 다녔어요. 하지만 여행도 적당한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촬영 앞두고 잠깐의 여유를 가질 때가 가장 최상의 컨디션으로 여행을 즐길 수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의 계획이 없을 때는 오히려 더 여유가 없는 느낌이거든요. 돌아올 구석이 든든하게 있을 때의 여행이 더 즐거워요. 혼자 여행을 떠난 적도 많고요.

여행을 하며 쉬어가는 게 일에 어떤 도움을 주나요?
같은 풍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죠. 그거면 충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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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 칼라와 뒤쪽 플리츠 디테일이 어우러진 코튼 포플린 셔츠와 광택이 살아있는 미디 길이의 플리츠 스커트, 투톤 피케 레더 소재와 체인 숄더 스트랩이 돋보이는 샨타코백, 소가죽 갑피와 메쉬 라이닝, 정통 컵솔 디테일의 프리미엄 스니커즈는 모두 라코스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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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피컬 프린팅 재킷은 3.1 필립 림(3.1 Phillip Lim).

영화 촬영 중에 만나는 새로운 풍경들은 또 다른 느낌일 거예요. 이를테면 <항거: 유관순 이야기> 촬영 중에는 서대문 형무소라는 공간에 머물렀죠.
이전부터 실존 인물을 연기하고 싶었어요. 드디어 기회가 왔는데, 아무래도 실제로 그 곳에서 사람들이 살아갔다는 실감이 너무 컸어요. 그래서 그분들의 일생에 누가 되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장 많이 한 것 같아요.

캐릭터를 연구할 때는 어떤 고민을 해요?
경험해보지 못한 캐릭터는 아무래도 상상에 많이 맡겨요. 하지만 연기를 한다는 건 진짜의 정곡을 찔러야 하는 거니까, 상상만으로도 실제처럼 너무나 깊은 감정 경험을 할 때가 있어요. 주변 인물들에게 힌트를 얻기도 해요. 제가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매력이 느껴지는 캐릭터는 기억에 오래 남는 것 같아요.

관순도 영화에서 이런 말을 하죠. “나는 신보다 사람에게 관심이 많다”고요.
처음 시나리오를 받고 캐릭터를 다듬어갈 때 재미를 느끼는 건, 근본적으로 제가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은 매력적인 존재고, 그걸 표현하는 건 제 적성에 맞는 일이고요.

고아성과 가장 가까운 캐릭터는 누구였어요?
<라이프 온 마스>의 윤나영이요. 아마 제가 연기했던 캐릭터 중에 저와 가장 닮았을 거예요. 물론 윤나영을 만들어내면서 제가 윤나영스러워진 점도 있어요. 연기가 다른 세계로 접근해 익숙해지는 과정을 포함한다고 하면, 촬영이 끝날 때쯤에는 원래의 나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그 익숙해진 세계를 가지고 일상으로 돌아오니까요. 그 사람이 된 것 같을 때가 있어요.

전공인 심리학도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 파생된 학문이죠.
감정을 다루는 학문이지만 그게 과학적인 접근이라는 게 흥미로운 점이에요. 흔히 인문학이라고 하면 증명하기 힘든 분야처럼 보이지만, 심리학은 반은 인문학이고, 반은 과학인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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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리넨 드레스는 레지나 표(Rejina Pyo), 우드 소재 미니백은 앤아더스토리즈(& Other Stories), PVC 샌들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최근 새롭게 흥미를 가지게 된 분야가 있어요?
유년기의 기억을 다룬 문학을 찾아서 읽어보고 있어요.

지금도 테이블에 아니 에르노의 <세월>이 올려져 있네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예요. 오랜만에 나온 책이라 바로 구입해서 여기 와서도 읽는 중이에요. 그다지 특별하지는 않지만 개인에게는 너무나 애틋한 기억에 대한 이야기인데, 요즘의 제게 크게 와 닿는 점들이 있어요. 이를테면, 누군가가 자신의 가장 최초의 기억에 대해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가족과 다 같이 TV를 보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눈을 뜨니 아버지가 자신을 들어서 방으로 옮겨주고 있었다고요. 너무나 포근했던 기억이라 아직까지도 기억이 난다고 했어요. 특별한 사건은 아니지만 떠올리면 특정한 이미지가 남아 있는 기억에 대해 파고들고 있죠.

비슷한 기억이 있어요?
네. 4살 때인가 촬영장에서의 기억이요.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나비를 잡았거든요.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푸른 들판이었고, 아마 캠페인 영상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어떤 증거도 남아 있지 않죠. 너무 오래된 테이프 세대의 영상이거든요. 그걸 다시 정확히 확인해볼 수 없는 게 답답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매력적이기도 해요. 제가 머릿속으로 구현해볼 수밖에 없거든요. <세월> 같은 책을 읽으면서 제 유년 시절의 기억을 선명하게 그려보려고 노력해요. 제가 가진 기억과 감정들을 언젠가 작품으로 보여드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해요.

일찍 연기 생활을 시작했어요. 어떤 점이 가장 변했어요?
20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최근의 3년이 가장 성숙해진 것 같아요. 어릴 때는 저 스스로에게만 집중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공감 능력이 훨씬 높아진 기분이 들어요. 하지만 이건 직업상의 특이점이 아니라 모두가 겪는 일일 거예요. 20대 후반 즈음에는 자신이 선택한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점차 안정화된 시기여서 그런가봐요. 더 지혜로워지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 것 같아요.

무엇에 대한 공감 능력인가요?
사람에 대한 것이요. 어릴 때 영화 <아무도 모른다>를 본 뒤, 작년에 다시 봤는데 옛날에 느꼈던 공감대와는 차원이 다르더라고요. 꼬마가 놀다가 실수로 화분을 떨어뜨리는 장면도 너무 가슴 아프게 느껴졌어요. 오히려 어른이 되고 나서야 어린 아이들에 대한 공감 능력이 커진 거죠. 아니 에르노 작가의 작품 역시, 어릴 때 읽었지만 어른의 이야기니까 당시에도 제가 전부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어요. 이건 나중에 어른이 되고 나서 이해하고 판단하자고 표시해뒀죠. 요즘에 다시 읽으니 ‘내가 미래를 내다봤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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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귤러 핏의 스트라이프 우븐 반팔 셔츠 드레스는 라코스테.

나이를 먹으면서 연기에도 변화가 생겼어요?
어릴 때는 지금보다 많이 고민하지 않고 연기해서 그 시절이 가끔 그리울 때가 있어요. 어떤 결점도 없는 완벽한 관찰자 입장이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요즘에는 잘 모르겠어요. 같은 인물을 연기해도 제가 바라보는 관점은 모든 걸 포괄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오래 일하면 권태가 오는데, 배우의 일 역시 그런가요?
저는 그리 바쁘게 일한 건 아니어서, 공백마다 생각할 시간이 많았어요. 너무 바빠지려고 하면 재정비할 시간을 꼭 갖는 편이고요. 여전히 내가 어떤 걸 표현하고 싶은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정확히 알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아직도 연기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는 게 스스로에게 고맙고요.(웃음) 앞으로도 하고 싶은 건 다 해볼 거예요. 그 욕심을 영원히 충족시킬 수는 없겠지만요.

연기 외에 표현의 욕구를 채우는 방법이 있나요?
10년 넘도록 일기를 쓰고 있어요. 일기는 타인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충족이 되는 면이 있거든요. 책을 그리 많이 읽는 편은 아니에요. 좋아하는 작가의 책만 반복해서 읽어요. 그런데 책을 읽는 과정은 표현의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부분이 있어요. 작가가 이런 글을 쓰는 게 어떤 심경인지 파악해보고 싶거든요. 이석원 작가가 최근 <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이라는 산문집을 썼는데, 이전 책부터 읽어와서 그런지 심경의 변화가 느껴져요. <세월> 역시 이전 작품과는 문체도 바뀌고 다루는 소재도 광범위해졌어요. 나이가 들어가면서 인생을 크게 돌아보는 느낌이랄까? 그게 슬프기도 하고,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자체에 감동이 있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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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우스 디자인을 결합한 루즈 핏의 후디 폴로 드레스는 라코스테.

고아성의 30대를 상상해본 적이 있어요?
이런 바람은 있어요. 제가 가진 연기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지금처럼 표현하는 것에 대한 재미를 잃지 않길 바라요. 타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연기 열정은 어디에서 비롯되나요?
제가 믿는 세계를 구현해나가는 과정이 정말 재미있어요. 예를 들어 아까 말한 유년기의 포근함을 연기한다고 가정했을 때, ‘포근하다’는 개념을 제 식으로 살릴 때 희열을 느껴요.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모두가 공감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기는 순간도 마찬가지예요. 사실 모두가 공감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지만, 무언가를 표현하는 순간만큼은 그런 비합리적인 신념을 갖게 돼요.

어떤 기준으로 작품을 선택하는 편인가요?
이야기가 최우선이죠. 하지만 제가 체감하고 있는 사회 정세가 은연 중에 반영되는 것 같아요.

다음 작품은 무엇이 될 것 같아요?
아마 드라마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아직은 공개할 수 없지만요.

반대로 올해 기다리는 작품도 있어요?
그럼요. 제가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을 너무 좋아해요. 시즌 7을 기다리고 있어요. <기묘한 이야기>도 여름에 새 시즌 방영을 앞두고 있고요. 영화 <그것 2>와 <겨울왕국2>의 개봉도 기다리고 있습니다.(웃음)

다음 여행지는 어디가 될까요?
제가 걷는 걸 좋아해요. 이곳 푸꾸옥에서도 밤이 되면 계속 리조트 주변을 걸어 다녔어요. 30대가 되기 전에 체력이 많이 필요한 여행지에는 다 가보려고요.(웃음) 아마 겨울의 아이슬란드가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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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시 셔츠 드레스는 지방시(Givenchy), 화이트 뷔스티에는 렉토(Recto), 벨티드 쇼츠는 앤아더스토리즈(&Other Stories), PVC 샌들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