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ADY IS A BOSS
옥스퍼드 법대 졸업, 영화 <캡틴 마블>의 캐스팅, 여기에 세련된 패션 감각까지. 완벽해 보이기까지 하는 젬마 찬(Gemma Chan)을 제시카 시아(Jessica Chia)가 만났다. 그간의 이야기, 차별과의 싸움 그리고 현실 속 진짜 슈퍼히어로가 되는 법 등을 얘기했다.
어둑한 조명이 흐르는 호텔 룸, 젬마 찬은 맨발로 의자에 앉아 있다. 번헤어로 올려 묶어 단정함을 더한 그녀가 분주한 한 해를 보낸 끝에 자신이 원하는 걸 털어놓는다. 그녀는 유기견을 분양받고 싶어 한다. 아주 오랜만에 그냥 젬마로 돌아온 순간이다.
몇 시간 전에 젬마는 로즈 컬러의 쿠튀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건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두 명의 스태프가 피팅을 돕고 있었고 크리놀린(스커트를 부풀려주는 딱딱한 페티코트)가 한껏 펄럭이더니 바닥에 푹신하게 내려앉았다. 드레스의 장식은 디자이너 제이슨 우가 의도한 대로 층층이 달려 있었고, 이제 허리에 장식된 리본만 손보면 일주일 후에 입을 드레스가 모두 완성된다. 피팅을 마친 후 편안한 그레이 스웨터와 크롭트 진으로 갈아 입었지만 여전히 완벽한 기품이 느껴진다. 아마도 부드러운 영국식 악센트 아니면 그녀의 외모 때문이리라. 통계학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좌우대칭형 얼굴과 개성 있는 광대뼈, 또렷한 눈매와 도톰한 입술… 그녀가 <휴먼스>의 자기희생적인 안드로이드 미아, <캡틴 마블>의 크리족 유전학자 미네르바 등 특별한 역할에 캐스팅되는 이유를 알 거 같았다. “영화의 많은 부분을 얘기하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웃음) 하지만 브리 라슨이 속해 있는 막강한 스타포스 팀의 일원이고 주드 로가 리더죠. 그녀는 유전학자예요. 일을 아주, 아주 잘해요.”
젬마는 2004년 옥스퍼드 법대를 졸업했고 런던 로펌의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한 채 런던 드라마 센터에서 연기 공부를 시작했다. 부모님은 문화혁명 당시 영국으로 이민(홍콩 출신 아버지와 중국계 스코틀랜드인 어머니)을 왔고, 처음 2년간은 노숙자로 고생하면서도 다섯 형제자매를 모두 학교에 보냈다. 당연히 부모님은 그녀의 배우의 꿈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그만큼 설득의 과정이 필요했다.
젬마는 어려서부터 다재다능했다(국가대표급으로 수영을 했고 10대 때 거의 프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얼핏 보면 전형적인 모범생에다가 과잉성취자(overachiever) 같지만, 항상 그런 건 아니었다고 한다. “학창시절, 이탈리아로 오케스트라 여행을 갔을 때였어요. 어느 날 저녁, 전 행방불명이 되었죠. 다들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잠깐 일탈한 거였죠. 남자아이들이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걸 구경하고 있었거든요.” 그녀가 12살 때의 일을 털어놓자 난 10대 초반에 보드카를 스트레이트로 마셨던 첫 음주에 대해 얘기했다. “세상에, 정신을 잃진 않았나요?” “전혀요.” 술을 마셔도 전혀 흐트러지지 않는 타입이라는 내 말에 그녀가 웃음을 터트린다. “저도 그래요. 술을 마셔도 말짱할 자신이 있어요.”
아이를 구한 적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자 살짝 쑥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서너 살쯤 된 여자아이였어요. 손에 닿는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쉽게 아이를 잡을 수 있었어요. 별거 아니에요.” 진짜 힘들었던 일에 대해 묻자 지하철역에서 일어난 일을 말했다. 그녀는 목덜미를 칼에 찔리는 남자를 목격했다. 러시아워였고 연극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느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어요. 쓰러진 남자를 도와주러 달려갔다가 고개를 들었더니 범인과 눈이 마주쳤어요.” 젬마가 말한다. “그 순간 생각했어요. 그가 다가와 나를 찌를지도 모른다고요. 도망칠 수 있을 만큼 빨리 달리지도 못할 거라는 생각도 들었죠.” 하지만 다행히도 기차가 들어왔고 인파가 몰려들자 범인은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젬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결국 피해자는 앰뷸런스가 도착하기 전에 사망했고 그녀는 나중에 법정에서 목격자로 진술했다.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나요. 내가 그의 목덜미에 손을 대고 지혈을 했더라면 상황은 더 나아졌을까… 그건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확실히 젬마는 위기 앞에서 소심한 타입은 아니지만 스스로를 ‘처음엔 좀 더 수줍어하는 사회적 겁쟁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이런 점이 살짝 느껴지기도 했다. 젬마는 내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와 앉았는데 처음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색해하는 듯했다. 5분쯤 지나고 나서야 서서히 이런저런 얘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내 드레스와 자신의 스트라이프 셔츠가 같은 브랜드 제품(앤아더스토리즈)이라는 점, 오늘 하루 일정이 어떤지, 그리고 고향은 어딘지를 물었다. 우린 올리브 샐러드와 오렌지 주스(어워드 시즌의 분주한 애프터 파티 후엔 항상 디톡스가 될 만한 주스가 필요하다), 와인(내가 좀 더 개인적인 질문을 파고들기 위해 용기가 필요했다), 앙트레(둘 다 파스타) 등을 주문했다. 대화 도중 그녀는 옆 테이블에 방해가 될까봐 간간이 목소릴 낮추기도 했다.
“낯선 상황에선 먼저 말을 꺼내기보단 남들이 얘기하는 걸 듣는 편이에요.” 젬마가 털어놓는다. “사실 웬만한 상황에서는 듣는 걸 더 좋아해요. 그들이 내게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려 애쓰는 편이거든요.” 인터뷰 내내 젬마는 내가 먼저 질문을 하면 아주 잠깐 생각을 하고 답했다. 나는 낯선 사람인 데다가 기자이고 좀 더 익숙해질 만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를 처음 만나면 수줍은 성격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론 사려 깊은 태도가 몸에 익어 있다. 자신이 뚜렷하게 말을 해야 할 부분, 이를테면 공정성이나 평등에 관한 부분에선 누구보다도 분명한 목소리를 내니 말이다.
사실, 인지도가 높은 아시아 여배우가 흔치 않기 때문에 요즘 젬마는 영화나 TV 속에서 완벽한 아시아인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아마도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에 등장한 후 이런 유형의 질문을 너무 많이 받아서 식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매번 똑같은 질문일지라도 결코 지루해하지 않는다. 중국인의 혈통을 물려받았지만 그녀의 아이덴티티는 훨씬 복잡하다. “나는 영국인이자 유럽인, 중국인이자 아시아인으로 느껴지는 순간들이 혼합되어 있어요.” 그녀는 인터넷을 떠돌아다니는 자신에 관한 얘기들을 끄집어낸다.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에서 하드윅의 베스 역을 맡았을 때 그녀가 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잠시 논란이 일었었다. “피부색 때문에 기회가 적다는 사실이 힘들게 다가왔어요. 왜 오직 자신의 인종에만 속하는 역할을 해야 할까요? 심지어는 종종 이 역할조차도 허락되지 않을 때가 많지만요.” 젬마는 역할의 다양성과 해석의 다양성에 대해 말한다. “과거엔 오히려 동양이 아닌 서양 배우들이 유색인종 역할을 하곤 했어요. 존 웨인이 칭기즈칸이었으니까요. 그가 칭기즈칸이었다면 저도 하드윅의 베스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전 <해밀턴>(힙합 뮤지컬)이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었다고 생각해요. 우리에겐 조지 워싱턴을 연기하는 흑인배우가 있으니까요. 그들은 ‘지금의 미국이 말하는 당시의 미국’을 묘사하고 있어요. 저 역시 우리의 예술이 현재의 삶을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해밀턴>은 조지 워싱턴, 알렉산더 해밀턴, 토머스 제퍼슨 등 백인인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을 모두 흑인으로 캐스팅했다).
작년 젬마는 중국인 노동부대(Chinese Labour Corps)에 관한 다큐멘터리 작업에 참여했다. “학교에서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 공부했지만, 서부전선에서 복무한 14만 명의 중국인 노동자에 대해선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그들이 없었더라면 전쟁의 결과도 달라졌을지 몰라요.” 나 역시 이들에 관한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자 젬마는 사진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을 묘사한 벽화도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거대한 벽화이고 중국인만을 묘사한 부분도 있었지만 나중에 미군에 의해 재페인팅되었다. “그들은 무릎을 꿇은 중국인을 표현한 부분을 남겨놓았어요. 아마도 여전히 이 부분만큼은 볼 수 있을 거예요. 만일 그들의 부모님이 이걸 보셨더라면 ‘고향으로! 우리가 온 곳으로 되돌아가라!’를 수없이 반복했을 테죠. 많은 사람은 대개 백인들의 관점에서 쓰여진 과거를 ‘그럴 듯한 것’으로 믿어요. 하지만 진실은 그게 아니에요.”
하드윅의 베스뿐 아니라 미네르바 역시 인종을 초월한 느낌이다(이 마블 캐릭터는 푸른 피부와 다크 헤어지만 외계종족은 얼마든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젬마는 인종에 대한 열린 생각을 가지고 있고 수많은 매체를 통해 이러한 부분을 표현했다. 패션에 있어서는 아시안-아메리칸 디자이너, 에디터,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택한다. 최근 레드카펫에선 제이슨 우의 드레스를, 뉴욕시티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시사회에선 프라발 구룽을 택했다. 프라발 구룽, 겐조, 알투자라, 에딤 등의 옷을 즐겨 입는다. “물론 그들의 디자인이 제 마음을 움직이게 했기 때문이에요.”
젬마는 자신의 생각이 단지 아시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블랙 캐스팅이 주를 이룬 스파이크 리 감독의 <블랙클랜스맨>이나 라이언 쿠글러의 <블랙 팬서>를 언급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캡틴 마블> 역시 마블 최초의 단독 여성 히어로물이고 여성 감독이 최초로 연출을 맡았다. 그녀는 또한 런웨이에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나 트랜스젠더를 기용하는 프라발 구룽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잡지를 펼쳤을 때 여러 체형, 노년의 흰머리 모델, 검은 피부, 주름 등을 보는 걸 정말 좋아해요. 우리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또 다른 방법이라는 걸 말하고 싶어요.”
젬마와는 밤새워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고 실제로도 거의 그럴 뻔했다. 정치적 견해에서도 소신이 뚜렷한 그녀는 브렉시트 투표를 둘러싸고 사퇴한 보수당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한때 국회로 가기 전까지 그 역시 대중과 많은 커뮤니케이션을 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는 특권계층이고 정책을 살릴 만한 진정한 상호작용이 없었죠. 이런 거리와 단절감은 정말 치명적이라고 생각해요.” 젬마는 ‘모든 것이 다 괜찮게 굴러가고 있다고 가장하는 건 어리석다’고 말한다. “세상에는 우리의 관심이 필요한 많은 것들이 있으니까요.”
타임스업(Time’s Up) 운동과 마찬가지로, 젬마는 영국의 LDF(Legal Defense Fund)격인 JEF(Justic and Equality Fund)에도 참여하고 있다. “일상 속에서 문제점에 대한 꾸준한 공격이 있어야만 문화가 변화할 수 있어요.” 그녀가 말한다. “아마도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요.” 젬마는 영국 배우 루스 윌슨과 함께 영국영화협회(BFI)의 교육 워크숍 활동도 하고 있다(400여 명의 드라마 스쿨 학생에게 오디션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법, 노출에 관련된 계약 조항을 이해하는 것, 성폭력을 인지하는 법 등등을 일러준다). “섹스 신을 해야 할 때 무엇을 예상할 수 있을까요? 불편한 뭔가를 요구받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노(No)라고 어떻게 말할까요? 이 모든 건 드라마 스쿨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이죠.”
그렇다면 영화계의 변화와 여성의 권리에 대한 일 외에도 젬마의 ‘할 일 리스트’엔 무엇이 더 있을까? 그녀는 올해 후반에 도미닉 세비지의 드라마에 내정되어 있다. 극중 평범하지만 ‘가족을 만들어야 한다는 압력에 시달리는 여성’을 맡았다. “그녀 주변의 모든 인물은 아기가 있거나 가정에 정착했거나 엄마가 되려는 사람들이죠. 아마 스스로 뭘 원하는지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자신이 낯설고 변종처럼 느껴질 거예요.” 그녀의 얘기 끝에 자연스럽게 도미닉 쿠퍼와의 연애를 묻고 싶었지만(오랜 연인이었던 잭 화이트홀과 결별한 후 일년 후 도미닉 쿠퍼와 만나기 시작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지난 12월 영국 패션 어워드에 두 사람이 이미 공식석상에 나란히 모습을 드러낸 데다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만 봐도 모든 걸 말해주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많은 걸 그려나가고 있어요. 연애는 정말 흥분되고 동시에 두렵기도 한, 그래서 더 근사한 일이죠!”
- 포토그래퍼
- Paola Kudacki
- 스타일리스트
- 카렌 카이저(Karen Kaiser)
- 헤어
- 케빈 라이언(Kevin Ryan)
- 메이크업
- 제임스 칼리아도스(James Kaliardos)
- 매니큐어
- 케이시 허먼(Casey Herman)
- 세트 디자인
- 줄리에트 저니건(Juliet Jernigan)
- 프로덕션
- 헤더 로빈스(Heather Robbi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