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복을 필두로 한 아웃도어 룩이 선도하는 패션 시장. 아재 패션? 그래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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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가서 등산복 입은 사람을 보면 열에 아홉은 한국 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T.P.O를 신경 쓰지 않고 산이나 바다, 공원, 미술관 등 그저 등산복을 관광복 삼 아 주야장천 입고 다니는 투어리스트들을 자조 적으로 비꼰 말이다. 우리는 여기에 ‘아재 패션’ 이라는 애칭(?)도 안겨주었다. 그런데 이 같은 아재들의 시그니처인 등산복, 무모한 믹스매치, 우스꽝스러운 운동화 등 과거에 ‘패션테러리스 트’라는 오명을 썼던 아이템이 계속해서 인기 다. 어글리뷰티, 어글리시크, 어글리프리티라는 반어적인, 그래서 더 그럴싸한 타이틀도 추가했 다. 이는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이끄는 구찌, 뎀 나 바잘리아의 베트멍과 발렌시아가, 그리고 러 시안 패션의 신성 고샤 루브친스키 등 트렌드 의 정상에 선 브랜드들이 인기를 견인했다. 패 션 전반에 미친 과거에 대한 향수도 한몫 거들 었을 것이다. 또 자신이 만족하는 스타일을 적 극적으로 찾고 어필하는 요즘 애들, 그리고 어 른 아이들이 늘어난 덕이기도 하다.

이번 시즌 발렌시아가는 멘즈 컬렉션을 통해 형형색색의 아노락과 패딩을 대거 선보였다. 1990~2000년대가 떠오르는 스포티한 바람막 이들. 후디에 매치하거나 셔츠에 받쳐 입고, 몇 몇은 바지 속에 넣어 입어 긱(geek)스러움을 피 력했다. 또 비즈니스맨의 출근복인 슈트 팬츠 에 비닐봉지 같은 토트백을 들게 해 마치 퇴근 길 비즈니스맨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함께 선 보인 운동화 ‘트리플S’는 생김이 투박해 ‘대디 슈즈’라 불리는 운동화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이미 전 세계적으로 품귀현상을 일으키며 인기 의 핵으로 떠올랐다. 많은 카피캣을 양산한 것 은 물론이고, 스포츠 브랜드와 하이패션에서 앞 다투어 비슷한 분위기의 운동화를 출시하는 중 이다. 여성 컬렉션 역시 많은 패션 마니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빈티지풍 패턴으로 만든 패니 팩, 여러 겹 레이어드한 듯한 아우터(그중 아노락을 앞면에 부착한 위트 있는 아우터는 그만의 해체주의적 패션 철학을 잘 알 수 있는 대목), 긴 드레스 자락 사이로 보이는 크록스와 협업으로 만든 플랫폼 샌들까지!

러시안 패션의 쿨함을 널리 알린 고샤 루브친 스키가 버버리와 손잡고 선보인 협업 컬렉션 도 많은 관심을 모은다. 컬렉션 전반에 버버리 아카이브의 대표격인 오리지널 체크 패턴을 활 용했고, 쇼츠와 낚시 조끼를 만들었다. 하얀 양 말을 한껏 끌어올린 종아리에 로퍼를 매치하 고, 비닐 바람막이에 볼캡을 눌러 쓰고 등산화 를 신는 식의 ‘어글리 프리티’스러운 스타일링 을 더한 것은 물론이다. 이들의 두 번째 협업인 2018 가을/겨울 컬렉션까지 공개된 이때에 가 장 두려운 것은 살포시 스쳐 지나갈 텅장(?)이 아닐는지. 그 밖에 ‘노 쇼’를 선포하고 일반인들 과 길거리 룩북 촬영을 감행한 베트멍은 안 그 래도 믹스매치 투성이인 룩에 하이패션 포즈를 더해 우스꽝스러움을 극대화했다. 2018 가을/ 겨울 컬렉션은 런웨이로 복귀했지만, 아무렇게 나 낙서한 듯한 프린트 티셔츠, 낚시터 쿨워머 가 연상되는 톱, 야무지게 껴입은 레이어드 스 타일 등 통념을 깬 재기발랄한 의상은 여전했 다. 또 이 모든 변화에 선봉장이 되었던 구찌 역 시 현란한 자수 장식 의상에 볼캡을 매치하고 빈티지풍 트레이닝 세트에 포멀한 가죽 가방을 연출하는 등 그만의 독특한 면모를 이어가고 있다. 이 시점에 가장 한탄스러운 것은 예전에 입던 면 소재의 버버리 점퍼, 노티카 아노락, 색 색깔로 있던 폴로 모자들, 프라다 나일론 백 등 을 그대로 두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다. 지금 그것들이 있었다면 옷장에 꺼낸 보물 같 은 빈티지 아이템으로 재미있는 연출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각설하고, 아재 패션이 유 행 코드로 떠오른 것은 천편일률적인 미학적 기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디자이너와 대중의 바람이 합의를 이뤄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앞 으로 또 어떤 패션이 유행을 주도하게 될지 재 미있는 상상에 빠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