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뭐예요?

시 한구절 같은 서정적인 표현부터 톡톡 튀는 발칙한 단어까지. 누가 누가 더 특이한 이름을 내놓는지 경쟁이라도 하듯, 독특한 컬러명이 쏟아져 나온다. 영문과 숫자의 조합으로 어려운 암호 같던 호수명에 이야기가 더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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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오렌지’, ‘당연히 오렌지’, ‘마침내 오렌지’, ‘아직 오렌지’, ‘오렌지가 아닐지라도’. 갑자기 웬 말 장난인가 싶겠지만, 이 문구들은 2013년 출시된 에뛰드하우스의 디어 마이 블루밍 립스-톡의 컬러명이다. 색조제품의 경우 영문이나숫자를 조합하여 호수명을 정리하는 것이 일반적이던 당시, 미묘한 어감 차이의 재미를 잘 살린 이 립스틱은 일명 ‘접속사 립스틱’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각종 인터넷 유머 게시판을 섭렵했다. 화장품에 관심이 없는 남자들 사이에서도 소위 ‘병맛 컬러명’으로 회자되었을 정도니, 적어도 화제성만은 완벽히 성공한 셈이다. 이후 에뛰드하우스는 컬러명에 ‘시럽빼고 테이크아웃’, ‘까페라떼 우유 많이’, ‘자색 고구마 라떼’ 등 일상의 위트 있는 문구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니스프리는 제주의 자연 성분을 기반으로 한 브랜드답게, ‘제주 햇당근’, ‘포로롱 물거품’ 등 제주의 풍광과 색채를 담은 서정적인 컬러명으로 유명하다. 나스의 컬러명은 더 과감하고 사적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1999년에 출시된 블러셔 컬러명인 ‘오르가즘’!

‘스트립드(Stripped)’, ‘언레이스(Unlace)’ 등 발칙하고 섹슈얼한 단어부터 ‘팔레 로얄’, ‘하이드 파크’, ‘뤽상부르’와 같은 여행지 이름까지, 모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프랑수아 나스가 직접 지은 것들로 그가 여행지나 친구, 연인에게 받은 영감, 일상의 감정들이 원천이 되었다. 아티스트의 영감이 컬러명이 된 것은 이뿐만 아니다. 샤넬의 루쥬 코코 라인은 컬러군별로 각각 코코 샤넬의 연인, 가족, 친구들의 이름을 본떠 호수명을 지었고,톰 포드 뷰티의 립스앤보이즈의 컬러들 역시 톰 포드가 영감을 받은 50명의 남자 이름에서 따왔다. 모두 독특한 컬러명이 브랜드 혹은 제품 자체의 정체성이 된 사례다. 사실, 색조 전문 브랜드의 경우 호수명만 봐도 어떤 질감의 어떤 컬러인지 대략 파악할 수 있도록 암호화된 알파벳, 숫자를 혼합하여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메이크업 포에버의 아티스트 루즈의 경우 호수명 M300과 C203이라면, M은 매트한 제형, C는 크림 제형 등 립스틱의 질감을 의미하고, 백 자리의 숫자는 컬러군을 뜻한다. 뒤의 십과 일 자리의 숫자는 고유의 컬러 넘버다. 200번대의 번호는 핑크 컬러, 300번대의 번호는 코랄 컬러이므로 M300이라면 매트한 질감의 코랄 컬러 립스틱 임을 호수명만 보고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슈에무라의 글로우 온 블러셔 역시 P324, M530 등으로 분류되는데 이때 P는 펄이 함유된 제형, M은 매트한 제형을 의미하며 백 자리 숫자는 컬러군을 표시한다. 역시 호수명만 봐도 어떤 제품인지 바로 짐작이 가능하다. 브랜드 입장에서 보면 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컬러 관리가 가능할 뿐 아니라,소비자도 호수명만으로도 발색을 짐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컬러명 자체가 인상 깊지 않아 쉽게 기억하기 힘들다는 것이 단점이다.

재미있는 컬러명의 마케팅 효과
영문 약자, 숫자와의 조합, 혹은 영문 컬러명 일색이던 화장품 업계에 스토리가 담긴 네이밍 열풍이 불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갈색병’,‘분홍 크림’,‘슈렉 팩’ 등 애칭 마케팅이 인기를 끈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색조 제품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색조 제품의 애칭에는 보통 제품명이 아니라 컬러명만 존재한다. 늘 품절 사태로 손에 넣기가 좀처럼 쉽지 않아 ‘애증의 에리카’로 불리던 랑콤의 옹브르 이프노즈 아이섀도 에리카, ‘시빼테 메이크업’이라는 유행어까지 낳은 에뛰드 하우스의 룩 앳 마이 아이즈 시럽 빼고 테이크아웃 섀도 등 색조 제품의 애칭은 모두 특정 컬러명을 의미한다. 스킨케어 제품과는 다르게 메이크업 제품의 경우 제품 그 자체보다는 구체적 컬러로 인지하기 때문이다. 연예인이 바른 특정 컬러가 인기를 얻으며 스타의 이름을 딴 애칭을 붙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컬러명 자체가 제품의 광고 헤드라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기 컬러명이 제품의 이미지까지 대표하게 되면서 소비자들이 보다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인상 깊은 컬러명을 짓는 경우가 많아졌다. 재미있는 이름을 내세우는 것이 제품력을 강조하는 것보다 오히려 주목도가 높고 SNS 채널을 통해 자발적으로 확산되기도 하여 입소문 마케팅이 보다 쉬운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두 번째는 브랜드의 정체성을 녹여 차별화하려는 전략이다. 대표적으로 이니스프리는 가급적 우리말을 사용하고, 제주의 자연이 느껴지도록 컬러명을 짓는 것이 원칙이다. “색조 전문 브랜드들은 전문성을 강조하기 위해 주로 영어 단어, 숫자 등을 조합하여 호수명을 만들지만 이니스프리는 색조 전문 브랜드가 아니잖아요. 전문 메이크업 브랜드 느낌보다는 청정 제주를 기반으로 한 자연주의 브랜드라는 것이 컬러명에서도 느껴지게 하도록 제주를 연상시키는 단어들로 컬러명을 짓고 있어요.” 이니스프리 BM2팀에서 색조 메이크업 상품 개발을 담당하는 최혜윤 과장은 설명했다. 에뛰드하우스 역시 마찬가지다. 화장은 어렵고 전문적인 것이 아니라, 즐거운 놀이라는 브랜드 철학에 맞춰 재미있는 단어나 문구 등을 컬러명으로 사용한다. “다른 브랜드와는 달리 ‘센치한 트렌치’, ‘향초 켜고 거품 목욕’ 등 직관적인 표현을 쓰고 있어요. 보자마자 즉각적으로 사람들의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단어를 주로 사용해요. 주요 타깃층인 20대들이 제품명을 접했을 때 바로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말이죠. 처음에는 컬러명이 유치하다거나 이름이 다소 길고 어렵다는 평도 있었지만, 지금은 소비자들이 이런 컬러명을 에뛰드하우스만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인식하게 된 것 같아요.” 에뛰드하우스 MC팀 이규원의 말처럼 컬러명 자체가 브랜드 철학이나 정체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도구가 되는 셈이다. 샤넬이 코코 샤넬의 지인의 이름을 넣은 립스틱을 내놓고, 톰 포드 뷰티가 톰 포드가 영감받은 남자 이름을 딴 립스틱을 내놓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브랜드의 아이덴티티가 되는 인물의 경험과 이야기를 컬러명에 투영하여 제품에 대한 매력도를 높이는 것이다. 색조 브랜드가 많아졌을 뿐 아니라 각 브랜드에서도 한번에 출시되는 컬러 자체가 많아지면서,각각의 미묘한 컬러 차이를 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몇 해 전 맥은 한국 지사에서 제안한 컬러 중 라즈베리 컬러를 골라 ‘귀요미’라는 우리 발음의 컬러명의 틴트를 내놓았다. 이 ‘귀요미’라는 컬러명에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컬러일 뿐 아니라 사랑스러운 느낌의 컬러라는 상징이 함께 녹아 있는 셈이다. “하늘 아래 같은 색조는 없다고 말할 정도로, 컬러는 아주 작은 차이에도 미묘하게 뉘앙스가 변해요. 같은 레드라도 블루가 섞였는지, 화이트가 섞였는지에 따라 색의 느낌이 확 달라지고 그 양에 따라서도 분위기가 바뀌어요. 컬러명에 감성을 담으면 그 뉘앙스를 표현하기가 좀 더 쉬워져요.” 브이디엘의 마케터 박슬기는 또한 이렇게 컬러명에 스토리가 있는 이름을 지어줄 경우, 제품 자체가 의인화되어 컬러 자체를 보다 쉽게 부각시킬 수 있다고 덧붙였다. 소비자들에게 해당 제품의 발색뿐 아니라 특정한 감성을 불러일으키면서 제품을 더욱 확실하게 인식하게 한다는 의미다. 메이크업 제품은 그 무엇보다 감성을 소비하는 제품이기 때문이다.

컬러명이 만들어지기까지 
이렇게 재미있고 예쁜 이름들은 누가, 어떻게 만드는 것일까. 이니스프리 BM2팀의 최혜윤 과장에 의하면 그 과정은 대략 다음과 같다. 보통 제품에 삽입되는 모든 문구는 상품 개발자가 작성하므로 컬러명 역시 상품 개발자가 직접 짓는 경우가 많은데, 1차로 다양한 이름을 생각한 다음 고객 혹은 부서 내 선호도를 조사한다. 그중 선호도가 높은 후보군들이 사용 가능한지 상표권을 검토하고 상사들의 컨펌 후 최종 컬러명이 결정되는 구조다. 보통 립, 아이섀도, 네일 등 제품 유형에 따라 상품 개발 담당이 나뉘므로 상품 개발팀 내 거의 모든 사람이 창작에 관여하고 있다고해도 무방하다. “컬러명용 창작 파일을 따로 갖고 있어요. 여기에 생각날 때마다 형용사나 감성적인 단어를 두서없이 적어둬요. 이후 그 단어들을 나열한 다음 해당 단어가 가지는 느낌이 비슷한 것들끼리 묶어보고, 그 느낌에 어울리는 컬러명을 하나씩 대입해보며 컬러명을 만들어요. 예를 들어 민들레, 속삭이는, 해맑은, 반짝이는, 꽃다발 등 생각나는 단어를 써 본 후 이 단어들을 조합해보는 거죠. ‘해맑은 민들레 코랄’ 컬러처럼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컬러명의 글자수가 많아지면서, 립스틱처럼 제품 사이즈가 작은 경우 컬러명을 넣을 공간이 너무 빼곡하다는 단점도 있어요.” 에뛰드하우스 MC팀 이규원이 주로 영감을 얻는 곳은 뷰티 커뮤니티나 SNS다. 꼭 뷰티 관련 사이트가 아니더라도 10대, 20대들의 대화가 이뤄지는 곳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요즘 그들에게 가장 화제가 되는 장소, 물건, 감정 등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브이디엘의 마케터 박슬기는 다음과 같은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한번에 많은 컬러명을 지어야 할 때가 가장 힘들어요. 얼마 전 브이디엘에서 아이북 모노가 출시되었는데 총 48개 컬러였어요. 담당자는 내부 심사를 위해 제품당 각각 10개 정도의 후보작을 내야 하니, 48개의 컬러명을 위해 총 400개 에 가까운 후보를 생각해야 했던 거죠.”
색조 브랜드 삐아의 피그먼트의 컬러명은 다음과 같다. 염장, 환장, 된장. 각각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컬러, 너를 환장하게 만드는 컬러, 한국인이라면 모두 좋아할 브론즈 컬러라는 의미다. 제이 에스티나 레드의 립스틱은 HD TV를 보는 듯 선명한 색감이라는 장점을 내세우기 위해 ‘CH1 레드 인 서울’, ‘CH2 퍼플 인 밀라노’ 등 TV 채널을 컬러명에 사용했다. 한 마디로 개성 있는 컬러명의 시대다. 이제 화장품을 사용할 때마다 뒷면을 자세히 살펴보며 컬러명에 어떤 감성이 녹아 있는지, 이 이름이 나오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을지 한번쯤 상상해보는 건 어떨까. 아마도 화장품을 사용하는 재미가 몇 배는 증가될 테니 말이다.

    에디터
    이미현
    포토그래퍼
    정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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