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버른의 색
누군가는 멜버른을 호주의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시간의 블랙홀이라 묘사했다. 고풍스러운 영국풍 거리와 모던한 빌딩숲이 이질적인 조화를 이루고, 골목 골목마다 서로 다른 표정을 보여주는 곳. 멜버른은 분명 다채로운 색감을 품은 도시이다.
Inside Melbourne
처음 멜버른과 만난 건 한여름의 크리스마스 때였다. 해가 늦도록 지지 않는 12월의 여름날을 보내고, 짧은 셔츠를 입은 채 크리스마스 조명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멜버른 시청을 바라보는 것은 그야말로 생소하고도 멋진 경험이었다. 한낮에는 유레카 스카이덱 88(Eureka Skydeck 88) 전망대에 올라갔다. 고풍스러운 영국풍 건물이 빼곡한 시내 중심가와 야라강을 사이에 두고 즐비하게 늘어선 은빛 빌딩들, 짙은 초록으로 가득 찬 피츠로이 정원(Fitzroy Gardens)을 내려다보며 그 이질적인 조화에 감탄했다. 따스한 여름 햇살 아래 멜버른은 모든 것이 건강하고 아름다웠다. 덜컹거리는 나무 트램을 타고 느릿느릿 멜버른 시가지를 돌며, 꼭 다시 이 도시를 여행하리라 마음먹었다. 도시에도 색깔이 있다면, 멜버른은 짙고 선명한 색채를 지니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푹푹 찌는 서울의 한여름, 다시금 멜버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겨울의 멜버른은 나에게 또 어떤 얼굴을 보여줄까. 도착하는 날은 바람이 꽤나 차가웠다. 그래도 늦가을 서울의 날씨에 가까운 온화한 냉기다. 멜버른은 한겨울에도 최저 온도가 10℃ 아래로 내려가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로 기후가 온화하다. 한여름인 2월에도 평균 기온이 20℃에 머물 정도. 이번엔 야라 강 남쪽의 빌딩 지역에 숙소를 잡았다. 모던한 은빛 빌딩숲을 지나 야라 강변을 걷다 보니, 조정을 즐기는 사람들이 활기차게 구호를 외치며 노를 젓고 있었고 어느새 짙은 녹음의 멜버른 공원(Melbourne Park)이 눈앞에 성큼 다가왔다. 강 너머를 바라보니, 물기를 머금은 듯 더욱 진해진 멜버른이 있었다. 연노란색의 플린더스 스트리트 기차역(Flinders Street Station)은 빈티지한 노랑으로, 세인트 폴 성당(St. Paul’s Cathedral) 지붕은 짙은 버건디 컬러로 바뀌어 그 자리에 서있었다. 여름과는 또 다른 색감의, 멜버른의 겨울과 다시 만났다.
야라 강변의 공기 처음 멜버른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제일 먼저 야라 강의 남쪽 강변에 서보라고 권하고 싶다. 좁다란 야라 강 너머로 고풍스러운 색채의 멜버른 시내 중심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저녁이 되면 도심의 불빛이 강물에 일렁이며 낭만적인 풍광을 자아내니 멜버른의 낮과 밤을 온전히 바라보기에 이보다 더 좋은 장소가 있을까. 강을 건너면 바로 노랑과 초록색이 어우러진 플린더스 스트리트 기차역을 마주하게 된다. 멜버른에서 가장 큰 역 중 하나이자, 이 도시의 상징이기도 한 이곳은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역과 비슷하다. 1954년 호주에서 최초로 기차가 출발한 유서 깊은 장소로 정문의 시계탑은 멜버른 사람들의 만남의 광장이기도 하다. 역을 등지고 서면 탁 트인 도로 너머로 세인트 폴 성당이 우뚝 서 있다. 노면 위를 덜컹거리며 달리는 나무 트램을 보았다면 마음 편하게 올라타볼 것. 작년 1월부터 이 빈티지한 빨강 트램뿐 아니라 멜버른 도심 안에서의 모든 트램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세인트 폴 성당 맞은 편의 페더레이션 광장(Federation Square) 지하에 있는 멜버른 여행객 센터(Melbourne Visitor Center)에 먼저 들러 각종 지도와 투어 프로그램 책자 등 여행 자료를 먼저 챙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골목의 매력 페더레이션 광장을 건너 스완스톤과 러셀 스트리트 사이의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니, 눈앞의 공기가 달라졌다. 높다란 전깃줄에 걸 쳐둔 헌 운동화들과 거리를 가득 메운 그래피티가 어우러져 마치 영화 세트장 속에 들어온 듯 비현실적일 지경이다. 이곳이 바로 드라마<미안 하다 사랑한다> 촬영지로 유명한 일명 미사 거리, 즉 호시어 레인(Hosier Lane)이다. 고풍스러운 건물들 사이로 난데없이 등장하는 이 힙한 신세계는 전통과 현재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멜버른의 속살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형형색색의 그래피티 덕에 어디에 서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도 다 그림이 된다. 거리의 끝에는 멜버른 사람들 사이에서도 입소문 자자한 맛집인 스페인 레스토랑 모비다(Movida)가 있으니, 한번쯤 들러 타파스와 함께 맛 좋기로 유명한 멜버른의 맥주를 마셔보기를 권한다. 빅토리아 주의 맥주인 VB는 라거 스타일이고 퓨어 블론드는 저칼로리 맥주다. 호시어 레인을 빠져나와 콜린스 스트리트를 걷다 보면 또다시 이색적인 광경에 맞닥뜨리게 된다.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노천 카페가 200m가량 빼곡히 늘어선 곳, 바로 디그레이브스 스트리트(Degraves Street)다. 멜버른을 여행한다고 했을 때, 커피를 좋아하는 지인은 카페 리스트만 빼곡히 정리해줬을 정도로 멜버른은 커피맛이 좋기로 유명하니, 이곳에서 커피 한잔은 필수다. 늘 마시던 라테나 카푸치노 대신 멜버른에서는 플랫 화이트를 마셔야 한다. 에스프레소에 거품을 낸 스팀밀크를 넣은 것으로 우유의 고소한 맛으로 시작해서 에스프레소의 진한 향기로 마무리된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롱블랙을 한잔 사들 것. 이 역시 호주에서 주로 마시는 커피로 에스프레소 샷에 뜨거운 물을 붓는 아메리카노와 달리, 뜨거운 물에 에스프레소 샷 두 잔을 더해서 만드는 커피다. 아메리카노보다 크레마가 많이 남고 커피의 풍미가 강하다. 그 외에도 멜버른에서 걸어봐야 할 골목은 셀 수 없이 많다. 갤러리가 늘어선 하위 플레이스(Hawey Pl)와 벽면에 온통 액자를 붙여 골목 전체가 갤러리 같은 프레스그레이브 플레이스(Presgrave Pl) 그리고 작은 이탈리아인 칼턴(Carlton)의 라이곤 스트리트(Lygon Street)와 스페인 스타일의 이국적인 레스토랑과 카페들로 빼곡한 피츠로이의 브런스위크 스트리트(Brunswick Street), 차이나 타운인 리틀 버크 스트리트(Little Bourke Street)까지 멜버른의 골목 골목은 저마다의 색채를 내뿜는다.
쇼핑 산책 이 도시에서는 쇼핑도 산책하듯 여유로워야 한다. 골목 골목을 거닐다 보면 마법처럼 아름다운 가게들이 눈앞에 펼쳐지니까. 리틀 콜린스 스트리트 입구에 들어서면, 로열 아케이드(Royal Arcade)를 마주하
게 된다. 1869년 오픈해서 옛 스타일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아케이드 중 하나다. 타로카드 점을 봐주는 카페부터 러시아 인형 숍까지 아기자기한 매장으로 가득해서, 쇼윈도를 들여다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1800년대에 지어진 또 다른 쇼핑 지구인 블록 아케이드(Block Arcade)는 호화로운 타일 장식이 유난히 아름답다. 스프링 스트리트 쪽으로 가면 보석 상점이 즐비한 파리스 엔드(Paris End)에 다다르는데, 호주에서 전 세계 물량의 대부분을 생산한다는 오팔, 핑크 다이아몬드로 만든 주얼리가 마음을 설레게 한다. 패션 쇼핑도 빼먹지 말아야 할 코스다. 과거 섬유 산업을 기반으로 성장한 도시답게, 멜버른은 매년 멜버른 패션 위크가 열리는 패션 도시이기도 하다. 명품 쇼핑을 원한다면 파리스 엔드나 야라 강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크라운 카지노(Crown Casino)로, 힙한 쇼핑 플레이스를 원한다면 채플 스트리트(Chapel Street)나 호주 디자이너들의 부티크가 모여 있는 투락 로드(Toorak Road)로 향할 것.
Outside Melbourne
멜버른이 더욱 매력적인 이유는 차로 몇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근사한 자연이 있기 때문이다. 장대한 해안선인 그레이트 오션 로드(Great Ocean Road), 포토밭이 아늑하게 펼쳐진 야라밸리 (Yarravalley) 그리고 펭귄들의 집, 필립 아일랜드(Phiillip Island)가 모두 2~3시간 거리다.
위대한 그레이트 오션 로드 멜버른의 남서쪽 토키(Torquay)에서 포트 캠벨(Port Campbell)까지 이어지는 243km의 해안선. 바로 그레이트 오션 로드다. 이 길을 따라 차를 달리다 보면 깎아 내린 듯한 절벽 옆으로 푸르른 바다가 끝없이 이어진다. 그리고 이 장대한 아름다움이 익숙해질 즈음 마치 바다에서 솟아난 듯 우뚝 선 기둥들을 마주하게 된다. 12사도상(Twelve Apostles)이다. 포트캠벨 국립공원에 차를 세우고 12사도상에 더 가까이 가보면, 수만 년에 걸친 해식 작용이 만들어낸 이 절경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된다. 파도를 온몸으로 맞으며 단단하게 서 있는 기둥들을 보면 엄숙함이 느껴질 정도. 헬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거친 파도가 만들어내는 해무가 해안선에 아스라이 드리워져 더욱 드라마틱한 광경을 선사한다. 근처 작은 어촌 마을인 아폴로 베이(Apollo Bay)에서 12사도상까지 약 104km의 해안 트레일 코스를 걷는 그레이트 오션 워크라는 프로그램도 있는데, 광활한 호주의 자연을 오롯이 만끽할 수 있는 방법이다. 완주에는 꼬박 7일이 걸리지만 1일이나 반나절 코스도 있으니 한번쯤 도전해봐도 좋겠다.
자연을 달리는 기차 멜버른 동쪽으로 가면 청량한 푸르름이 이어진다. 바로 멜버른 교외 지역인 단데농(Dandenong) 산맥이다. 이곳을 여행하는 가장 유쾌한 방법은 바로 증기 기차 퍼핑빌리(Puffing Billy)를 타는 것이 아닐까. 낡은 초록 기차의 난간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며, 시원스레 뻗은 관목림 사이를 달리다 보면 산이 주는 맑고 청량함을 한껏 느낄 수 있다.0 10년이 넘은 증기 열차로 옛날 방식 그대로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는데, 칙칙폭폭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벨그레이브 역에서 단데농 산맥을 통해 에메랄드 호수까지 약 51km를 달린다. 근처에는 야생 보호 구역으로 유명한 힐즈빌(Healsville)이 있으니, 일일 여행 코스로 제격이다. 캥거루와 코알라뿐 아니라 딩고와 오리너구리, 태즈매니아데블 등 200여 종이 넘는 호주의 야생 동물을 만날 수 있다.
와인의 도시 멜버른이 속한 호주 빅토리아 주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와인 생산지 중 하나로 850개가 넘는 와이너리가 있다. 멜버른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 거리로 피노 누아나 샤도네, 카베르네 쇼비뇽 등으로 특히 유명하다. 모엣 샹동의 주조지 중 하나인 도메인 샹동(Domain Chandon), 1838년 야라밸리에 처음 자리 잡은 와이너리인 예링 스테이션(Y ering Station) 등이 꼭 들러봐야 할 곳. 예링 스테이션에는 내셔널 트러스트가 문화재로 지정할 정도로 아름다운 느릅나무길이 있으며 도메인 샹동은 야라밸리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까지 푸르름이 남아 있어 ‘그린 포인트’라고도 불린다. 각종 스파클링 와인을 3~5만원에 구입할 수 있다.
펭귄이 사는 곳 필립 아일랜드에서의 감동은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면서 절정에 달한다. 바다를 힘차게 건너온 작은 펭귄들이 뒤뚱거리며 줄지어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장관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30cm의 작은 몸으로 하루 종일 물속에서 고군분투한 리틀 펭귄들을 바라보는 것은 예상치 못한 감동을 준다. 아쉽게도 이곳에서는 사진 촬영을 금지한다. 카메라 플래시로부터 펭귄의 시력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펭귄의 귀가가 시작되기 전, 노비스 센터(Nobbies Centre)를 방문해 물개 서식지를 둘러보는 것도 추천한다. 코알라 보존센터에서는 보호구역인 유칼립투스 숲의 나무 사이에 매달려 있는 코알라 가족들을 만날 수 있다. 멜버른에서 겨우1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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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이미현
- 포토그래퍼
- Park Ji Hyuk, Courtesy of Visit Vict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