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 고혹적인 여인의 향기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닿는 그 서늘한 감촉이 좋아요.” 그녀가 잠시 멈춰 서서 멜버른의 겨울을 느낀다. 순간 거리에는 그녀가 만들어내는 애틋하고 아름다운 공기가 흐른다. 지금 이곳에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배우 수지가 있다.
수지가 있는 곳에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빠듯한 경유 시간에 맞춰 멜버른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하이힐을 신은 채 뛰어야 할 때도, 촬영을 위해 관광객이 빼곡한 멜버른의 거리를 수없이 걸어야 할 때도 그녀 주변에서는 늘 웃음소리가 났다. 신기했다. 밝고 건강한 에너지가 그녀를 감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수지를 보면 드라마< 함부로 애틋하게> 속 씩씩한 노을이 스쳐 지나갔고, 드라마 <구가의 서> 속 담대하고 긍정적인 여울이 떠올랐다. 카메라 뷰 파인더를 통해 본 그녀의 온도는 또 달랐다. 영화 <도리화가>의 채선처럼 눈빛이 짙어지는가 하면, 준영과 마주 선 노을처럼 애틋하고 아름다웠다. 스물세 살 수지가 만들어내는 공기는 이토록 다채롭다.
드라마 <함부로 애틋하게>의 노을을 보면서 영화 <건축학개론>의 서연이 오버랩되었어요. 누구보다 말간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면모를 지닌 인물들이죠. 이런 역할에 끌리는 이유가 있겠죠?
배역을 고를 때는 마음이 가는 대로 본능에 충실해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하고 싶은 역할이 변하지만 저랑 닮은 캐릭터에 더 마음이 가는 것이 사실이죠. 노을도 그랬어요.
이전의 어떤 배역보다 노을과 가장 많이 닮았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어떤 역할을 하든 친구들은 그 속에서 제 모습을 찾아내곤 해요. 저와 작품 속 인물이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는 거죠. 노을은 정의감 넘치고 밝은 아이였는데, 삶의 굴곡들을 거치며 변해버려요. 삶이 버겁지만, 힘들지 않은 척 애써 밝고 씩씩하게 행동하는 모습이 전 더 슬펐어요. 그런 면들을 잘 보여주고 싶었죠. 노을이는 위악의 아이콘이에요. 실제로 악하지는 않은데 악해 보이려고 노력하죠. 그런 면들을 사랑스럽게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목소리 톤을 바꾸는 방법을 생각했어요. 괜히 버럭 화를 냈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순순히 인정하기도 하죠.
어떤 면을 연기하는 게 가장 힘들었나요?
특별히 어떤 면이 힘들었다기보다는 감정 변화의 폭이 넓어서 어려웠어요. 뻔뻔하다가도 귀여운 척 한껏 애교를 부리고 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곤 하는, 이 수많은 감정을 한번에 연기하는 것이 쉽지 않았어요. 맞아요. 동생에게 씩씩하게 전화하다가 울컥하는 마음을 가다듬느라 얼굴에서 전화기를 잠시 떼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찡했어요. 전 눈길에 준영과 노을이 마주 보고 서 있던 1회의 마지막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처음 대본을 읽을 때부터 그 장면이 소름 끼치게 좋았어요. 노을과 준영을 보며 제가 느낀 먹먹함, ‘함부로 애틋하게’라는 드라마 제목을 함축적으로 다 보여주는 느낌이었거든요.
드라마 <함부로 애틋하게>의 배우들 사이에 수지는 동생이지만 마음을 터놓고 의지하게 되는 언니 같은 존재라고 들었어요.
제가 좀 상담을 잘해주는 편이죠.(웃음) 전에는 힘들어도 혼자 삭이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그냥 다 얘기해요. 누군가에게 털어놓는다는 그 자체로 마음이 편해지니까요. 그 느낌을 잘 알기 때문에 그저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려고 해요.
배우란 늘 새로운 인물을 연기해야 하는 직업이죠. 배역에 온전히 흡수되기 위한 나름의 노하우가 있다면?
물론 연기 수업도 받지만, 사람들의 진짜 삶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를 많이 봐요. 모든 인생을 직접 체험할 수는 없으니, 다큐멘터리를 보며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는 거죠. 다큐에는 책이나 영화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진한 감정이 흐르는 것 같아요.
특히 인상 깊었던 다큐멘터리가 있나요?
<그것이 알고 싶다>도 즐겨 보긴 하지만.(웃음) 쇼트트랙 선수 안현수의 삶을 담은 <휴먼 다큐멘터리: 사랑 2016>이라는 다큐가 특히 마음에 남아요. 몇 번이고 반복해서 봤을 만큼 진짜 좋았어요.
책도 많이 읽나 봐요. 멜버른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책 한 권을 다 읽었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긴 비행을 할 때면 꼭 공항에서 책을 몇 권씩 사요. 이번엔 <반응하지 않는 연습>이라는 책을 샀어요. 마음을 다스리고 싶어서요.(웃음)
십대에 데뷔해서 20대를 연예인으로 보내고 있으니, 또래보다 마음을 다스려야 할 일이 많을 것 같아요.
경험이 쌓일수록 사고방식,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자꾸 달라져요.
스스로 자신의 성격을 정의해본다면?
밝은 면도 있고 어두운 면도 있어요. 혼자만의 시간에 갇혀 있을 때는 오롯이 한 가지 생각에만 빠져 있기도 해요. 단순하고 잘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섬세하고 고집스럽기도 하고요. 한마디로 피곤한 성격이죠.(웃음)
요즘 새로운 별명이 추가되었어요. 바로 무모공녀!
하하, 그런 별명도 있어요? 관리를 한다고 하기에는 민망한 수준인데. 예민해서 피부과도 잘 못 가요. 굳이 노하우를 생각해본다면 찬물로 마지막에 세안하는 거? 매일 찬물로 피부가 얼얼할 때까지 세안해요. 화장품도 무조건 냉장고에 넣어 차갑게 사용하고요. 계절에 상관없이요!
이번에도 드라마 OST를 불렀죠. 노래를 들을 때마다 놀라요. 미모 때문에 노래 실력이 오히려 평가 절하되는 느낌이에요.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앞으로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 더 많다는 의미니까, 배우로서도 가수로서도 더 좋은 거죠. 하지만 만약 연예인이 안 되었더라도 전 아마 어디선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을 거예요.
연기와 가수 활동 중 어느 한쪽에 무게중심을 둬야 한다면?
정말 두 가지가 똑같은 무게예요. 연기를 할 때는 무대에 서서 노래하고 싶고, 가수 활동을 할 때는 이런 작품을 해보고 싶다 생각하죠. 짜장면과 짬뽕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처럼 어려워요. 둘 다 너무 좋으니까요!
멜버른에서 머무는 내내, 차 속 음악 선곡은 수지가 담당했어요.
한 노래에 꽂히면 그것만 계속 들어요. 권진아와 샘김의 ‘여기까지’가 이 곳의 찬 공기와 잘 어울리네요. 요즘 매일 듣는 노래는 에즈원 선배님의 새 앨범. 그중에서도 ‘아픈 건 좀 어때’와 ‘시들지 마’는 마음을 울려요.
멜버른에서의 여정은 어땠어요? 이곳은 지금 한겨울이죠.
제가 정말 좋아하는 날씨예요!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닿는 감촉이 그리웠거든요. 자유롭게 거리를 돌아다녔는데, 그래피티로 가득했던 호시어레인이 기억에 남아요. 아, 딱 한 곳을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다 좋았어요.
이곳에서 하고 싶을 것을 물을 때마다 동물을 보러 가고 싶다고 했죠. 평소 스케줄이 없는 날에는 주로 뭘 하나요?
혼자 드라이브를 하기도 해요. 음악을 들으며 운전해서 팔당댐까지 간 적도 있어요. 운전이 일종의 안식처인 셈이죠.
외로움을 많이 타나 봐요.
어떨 때는 힘들고 외로운 감정을 그저 마음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고 싶어질 때도 있고, 또 가끔은 극복하려고 무던히 노력할 때도 있어요. 정답을 모르겠어요. 언젠가 그런 감정들에도 담담해지는 순간이 오겠죠.
배우로서, 여자로서 수지가 꿈꾸는 미래는 무엇인가요?
진정성 있는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아, 저 사람이 진짜구나’라고 느끼게 만드는 거요. 개인적으로는, 제 자신이 정말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요. 미친 듯이 일에 집중하는 것일 수도 있고, 또 결혼을 하는 것일 수도 있겠죠. 아직 그게 뭔지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주변 상황에 휩쓸려가는 삶이 아니라, 순간순간 제가 진심으로 원하는 삶을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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