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인을 낳은 드라마
바쁜 일상에 지쳐 TV 앞에 있을 틈도 없었다면? 이번 여름휴가에는 그동안 미뤄두었던 드라마를 ‘정주행’하는 것부터 시작해보길. 수많은 폐인을 양산한 국내 드라마 10편을 엄선했다.
1 킬미, 힐미(MBC, 20부작, 2015) 재벌 3세 차도현(지성 역)은 일곱 개의 인격을 지닌 다중인격 장애를 앓고 있다. 젠틀한 차도현, 나쁜 남자 신세기, 여수 사투리를 쓰는 40대 남성 페리박, 자살지원자 안요섭, 아이돌 사생팬인 여고생 안요나, 어린이 나나, 마지막으로 의미심장한 미스터 엑스까지. 일곱 가지 캐릭터를 맡은 지성은 신들린 연기를 소화한다. 그의 비밀 주치의가 된 레지던트 1년 차 정신과 의사 오리진을 맡은 황정음도 마찬가지! 마음에 숨겨진 비밀을 푸는 과정은 경쾌하고 또 긴박하게 그려진다.
2 연애의 발견(KBS, 16부작, 2014) 가구 디자이너 한여름(정유미 역)은 성형외과 의사인 남자친구 남하진(성준 역)과 연애 2년 차에 접어들었다. 안정된 사랑을 나누던 그녀 앞에 강태하(에릭 역)가 나타난다. 그는 5년이나 사귀던 ‘구 남친’! 심지어 잘못을 반성하며 다가오는 옛사랑을 막아내긴 쉽지 않다. 많은 명대사 중 하나만 소개하면 이거다. “연애가 끝나봐야 누가 강자이고 약자인지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때는 더 많이 좋아했던 쪽이 강자예요. 미련이 없으니까. 나처럼 사랑을 받기만 했던 사람은 후회와 미련이 남잖아요. 그렇게 되면 평생 그 사람을 잊을 수 없게 되거든요.”
3 시그널(tvN, 16부작, 2016) 과거로부터 걸려온 무전이 사건의 발단이 된다. 무전으로 연결된 과거의 형사 이재한(조진웅 역)과 현재의 박해영(이제훈 역)은 광역수사대와 함께 공소시효가 끝난 미제 사건의 퍼즐을 맞춘다. 실제 사건을 연상시키는 치밀한 구성과 빈틈을 찾아볼 수 없는 디테일이 승리의 요인. 케이블 채널에서는 드문 시청률 12.5%를 기록했고, 종영 후에도 결말에 대한 다양한 추리가 오갈 만큼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수사물의 대가, 작가 김은희의 이름에는 ‘갓은희’라는 별명이 붙었다.
4 로맨스가 필요해 2012(tvN, 16부작, 2012) 주열매(정유미 역)와 윤석현(이진욱 역)은 12년 동안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 사이다. 결혼을 생각한 열매와 이유 없이 회피하는 석현은 결국 헤어지고 만다. 열매의 곁으로 심지훈(김지훈 역)이 다가온다. 사랑은 사랑으로 잊혀질까? <로맨스가 필요해>의 3부작에서 가장 멀리 홈런을 날린 2부. 케이블 드라마의 가능성을 열었고, 정유미와 이진욱은 이 드라마 한 편으로 각각 로코의 왕관을 썼다. 핵심은 다음과 같다. “내가 원하는 건 뜨거움이 아니라 애틋함이다. 나에게 필요한 건 로맨스였다.”
5 송곳(JTBC, 12부작, 2015) 대형 마트 회사에 판매사원을 전부 해고하라는 지시가 내려온다. 이수인 과장(지현우 역)은 이를 거부하고, 그간 존재조차 희미했던 노동조합에 가입한다. 조직에 맞서 싸우는 현실은 힘겹다. 드라마는 2006년 철수한 까르푸의 실화에서 가져왔다. “분명히 하나쯤은 뚫고 나온다. 다음 한 발이 절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기어이 한 발 내딛고 마는, 그런 송곳 같은 인간이.”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6 미생(tvN, 20부작, 2014) 바둑에서 미생이란 집이나 대마가 살아 있지 않은 상태를 뜻한다. 완전히 죽은 돌이 아니라 ‘완생’의 여지가 있는 상태. 윤태호 작가의 웹툰 <미생>은 사회생활을 바둑에 대입하고, 드라마 <미생>은 그 웹툰을 토대 삼는다. 바둑이 인생의 전부였던 장그래(임시완 역)는 프로입단에 실패한 뒤, 대기업 인턴으로 낙하산 입사를 한다. 스펙이 없는 그에게 동기와 상사의 눈초리는 고될 수밖에 없다. 장그래가 샐러리맨으로 성장하는 과정마다 인생에 대한 통찰이 숨쉰다.
7 그들이 사는 세상(KBS, 16부작, 2008)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움직인다. <그들이 사는 세상>의 무대는 드라마 제작국이다. 대학교 선후배 사이인 정지오(현빈 역)와 주준영(송혜교 역)은 나란히 드라마 PD 동기가 된다. 짝사랑하는 지오가 연인과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준영은 그에게 다가간다. 이들은 사랑하고 갈등하고, 화해하며 조금씩 성숙해진다. 평범한 우리네 삶도 드라마처럼 멋진 반전이 존재할 수 있다고, 그래서 인생은 아름다운 거라고. 노희경 작가와 표민수 PD가 외치는 성장동화는 담담해서 더 아름답다.
8 어셈블리(KBS, 20부작, 2015) 경남 해안가 가상의 소도시, 용접공 출신 진상필(정재영 역)이 정리해고를 당한 이후 3년간 복직 투쟁을 벌이다 야당이 아닌 여당인 국민당의 재보선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벌어지는 정치 드라마다. 그를 영입하려던 야당의원들과 복직 투쟁을 함께했던 동료의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그는 초선 의원으로서 이름대로 각종 진상을 떨며 대한민국 국회를 흔든다. 국회의 속살을 드러내고, 지난 2월 있었던 필리버스터와 맞물려 화제를 모았지만 안타깝게도 시청률로 큰 주목을 받진 못했다. 반면 시청자들은 시즌제 드라마를 강력히 원하는 중이다.
9 나인 : 아홉 번의 시간여행(tvN, 20부작, 2013) CBM 앵커 박성우(이진욱 역)는 히말라야에서 형이 동사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유품은 수첩과 향이 전부다. 형의 시신 곁에서 향을 피우고 잠이 든 그는 과거로 타임슬립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신비의 향 아홉 개를 발견한 성우는 아홉 번의 기회 동안, 자신의 과거를 바꾸기 위해 행동에 나선다. 그는 형을 살리고,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 흔치 않은 시간여행 소재가 흥미롭고, 멜로를 중심으로 스릴러와 호러적인 요소를 가미한 짜임새가 꽤 단단하다.
10 별에서 온 그대(SBS, 21부작, 2014) 400년 전,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 도민준(김수현 역)이 있다. 그는 의사로, 변호사로, 교수로 신분을 위조해 살면서 고향에 돌아갈 날을 꿈꾼다. 사과 두 쪽으로 몸매 관리를 해야 하지만 스트레스를 받으면 ‘치맥’을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한류 여신 천송이(전지현 역)와 만나기 전까지, 그의 삶은 평화로웠다. 황당무계한 상황 설정에 로맨스와 스릴러가 엮인 드라마는 한국을 너머 아시아에서 흥행 골든벨을 울렸다.
- 에디터
- 박소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