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의 나날

혼자 먹는 밥, ‘혼밥’에 이어, 혼자 마시는 술, ‘혼술’, 나아가 혼자 놀이동산에 놀러 가는‘ 혼놀’의 해시태크가 SNS를 채우는 시대. 밖에서 혼자 술을 마셔본 적이 없는 에디터가‘ 혼술’에 도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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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어느 광고대행사에서 33만1467건의 소셜 데이터를 분석한 ‘직장인들의 나홀로 소비 트렌드’에는 당당히 ‘혼술 낭만족’이 자리하고 있었다. ‘직장인’, ‘혼자’, ‘한잔’이라는 키워드를 추출한 결과, ‘맛있다’, ‘저녁’, ‘좋아하다’, ‘맥주’, ‘퇴근’, ‘힘들다’, ‘즐겁다’, ‘분위기’ 등의 연관어가 자주 언급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정적인 감정보다 행복하고, 재미있으며, 편안하다는 긍정적인 연관어의 비중이 확연히 높았던 것. 혼자 사는 사람은 늘어나고, 혼자 노는 방법은 진화하며, 더불어 혼자를 위한 자리는 늘어난다. 이런 시대에 왜 난 밖에서 혼자 술을 마신 적이 없는 걸까?

도전에 앞서 문득 혼술 고수의 비법이 궁금해졌다. 보다 호기로운 혼술을 즐기기 위해 애주가의 혼술 예찬을 동냥해 들었다. 에디터 K는 자취생에게 혼술은 둘도 없는 벗이라 표현했다. 그녀가 혼술을 즐기는 이유는 오로지 쉬기 위해서였다. 업무를 보다가 사람에 치일 때, 집에서 술상을 보는 번거로움이 귀찮을 때마다 그녀는 혼술을 찾았다. 그녀가 주장하는 조건은 술집 주인이 수다스럽지 않을 것과 맛있는 안주와 술을 설명해줄 정도의 자부심만 가질 것. 집에 가는 길에 취기가 사라지는 건 곤란하므로 가까운 술집만 찾았다. 사진가 J에게 혼술은 새로운 사람을 엮어주는 적절한 도구였다. 주인과 말이 통하는 단골집만 찾는 J는 자신과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과 기꺼이 합석했다. 주당끼리는 통하는 법이고, 또 새로운 만남을 통해 인생의 시야가 넓어진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신입사원인 H는 매번 3차까지 이어지는 모임으로 파산하느니, 차라리 가끔 비싼 술 한두 잔을 마시는 편이 합리적이라는 견해를 털어놨다. 회식시간마저 긴장하는 신입사원인 탓에 선배들과 마시는 술자리 또한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미식가인 그녀는 혼자 먹기 좋은 양이 담긴 스몰 플레이트 안주 메뉴가 훌륭한 샴페인 바를 추천해주며 ‘쌍엄지’를 날렸다. 겨울의 방어와 봄의 주꾸미처럼 제철 해산물을 소주에 곁들일 줄 아는 회사원 P는 술을 마실 때마다 전용 ‘ 술복’을 챙겼다. ‘츄리닝’ 팬츠와 롱패딩의 조합처럼 몸매가 드러나지 않도록 후줄근하게 입었다. 그녀가 자주 찾는 선술집에선 젊은 여자가 혼자 술을 마시는 것 자체가 시선을 끌기 때문에 시선을 차단하기 위한 방패와도 같았다. 주변에 술을 즐기는 친구가 많지 않거니와, 때론 술 약속을 잡는 에너지 자체가 피곤하게 느껴졌다. 그녀에게 혼술은 인생의 맛을 아는 아저씨들의 대화를 라디오처럼 들으면서 즐기는 식도락 여행이나 다름없었다.

첫 번째 도전 – 싱글몰트 위스키
여러 사람의 조언을 숙지한 나의 첫 번째 혼술 도전은 청담동에 위치한 고급스러운 싱글몰트 위스키 바에서 이루어졌다. 친구들과 갔을 땐 대화를 나누느라 정작 테이스팅은 뒷전이었던 아쉬운 기억 때문이다. 홀로 들어가는 바 입구는 어쩐지 더 어두컴컴하게 느껴졌다. 위스키 추천을 부탁하자, 바텐더는 평소 좋아하는 위스키의 맛을 물었다. 전에 마신 위스키 브랜드와 맛을 머릿속에서 집합해 연상된 단어를 답했고, 추천받은 여섯 병의 위스키에 대한 상냥한 설명을 들은 후 글렌피딕과 글렌모렌지를 골랐다. 위스키는 달콤한 여운을 남기며 묵직하게 목을 타고 흘렀다. 그제야 어둡고 무겁게 느껴졌던 공간이 안락하고 따스하게 느껴졌다. 혼자 오는 여자 손님이 많이 있냐는 질문에 그는 “싱글몰트 위스키 바를 처음 찾는 분도 많아졌지만, 익숙한 위스키를 주문하는 분들도 늘었죠”라고 답했다. 최근 내린 폭설부터 위스키의 생산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의 대화를 나눴다. 낯설거나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내가 취재수첩을 꺼내 못다 한 일을 시작할 시점에 이르러 대화가 멈췄다. 대신 물잔이 빌 때마다 채워주거나, 조명 각도를 맞춰주는 등 섬세한 서비스가 이어졌다. 처음 들렀지만 마음에 드는 아지트가 생겼다는 생각과 적당히 오른 취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다음에 마실 위스키까지 정해놓은 후에야 엉덩이를 뗄 수 있었던 만큼 도전은 성공적이었지만, 에디터 K의 조언처럼 집에 가는동안 술기운이 증발해버리고 말았다. 흥을 잇기 위해 집에서 맥주 한 캔을 더 마셨다. 어쩐지 좀 아쉬웠다.

두 번째 도전 – 하이볼과 닭꼬치
지난 도전을 반면교사 삼아 이번에는 집 근처를 타깃으로 삼았다. 이번에도 혹시 모를 심심함을 대비해 휴대폰 외장 배터리까지 단단히 챙겼다. 바 위주로 이루어진 작은 술집에 들어서자 꼬치구이 냄새가 진동했다. 하이볼을 주문하고 난 뒤, 메뉴판을 읽고 나서야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여럿이 왔을 땐 이것저것 고를 수 있었지만 혼자인 탓에 다양한 메뉴를 시도할 수 없다는 건 확실히 안타까운 일이었다. 혼자 술집을 운영하는 주인장은 다른 손님을 상대하기도 벅차 보여서 메뉴를 추천받긴 무리였다. 메뉴판을 외우다시피 정독한 후에야 무난한 닭다리살 꼬치를 주문할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저마다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홀로 소외되었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술과 안주, 분위기를 즐기느라 바빠서 휴대폰만 뚫어져라 바라볼 거라는 예상 역시 무너졌다. 혼자 술 마시는 여자를 사연 있는 사람처럼 이상하게 쳐다보지도, 말을 걸지도 않았다. 단지 세상에 나와 하이볼, 닭꼬치, 양배추, 단 넷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아삭한 양배추 한입, 하이볼 한 모금, 닭꼬치를 번갈아 맛보다가 갑자기 행복감이 밀려왔다. 연거푸 하이볼 세 잔을 마셨지만 다음 날 숙취는 없었다.

세 번째 도전 – 맥주와 양꼬치
이번에는 과감히 혼술과 혼밥이 결합된 세 번째 미션을 위해 동네 양꼬치 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난번처럼 복잡한 금요일 밤보다는 평화로운 평일 늦은 저녁을 택했다. 유일하게 양꼬치 가게에서만 ‘몇 분이세요?’라고 물었지만, ‘한 명이요’라고 답하는 것이 어색하진 않았다. 양꼬치 10개(1인분)와 칭타오를 시켰다.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 고로가 된 기분으로 내 오감은 오로지 양꼬치 굽는 데 집중했다. 쫀득쫀득한 양꼬치는 맛있었고, 칭타오는 입안의 느끼함을 게워냈다. 뻥 뚫린 시야 너머 다른 테이블을 흥미롭게 구경하면서 짬짬이 주인 아저씨와 함께 TV 뉴스를 봤다. 꿔바로우도 몇 점 서비스로 받았다. 공간에 앉아 있는 저마다의 시간은 교집합 없이 흘러갔다. 홀로 여행 온 이방인이 된 것처럼 홀가분했다. 여유로운 시간 부자가 된 것 같았다. 당나라 시인 이백이 읊은 혼자 석 잔의 술을 마시면 도에 통하고 한 말의 술을 마시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구절이 떠올랐다. 세상에 맛있는 술과 안주는 많고, 애주가의 밤은 길다. 홀로 술을 즐길 줄 아는 풍류를 길렀으니, 이제 즐길 일만 남았다. 어쩐지 흐뭇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애주가가 추천한 혼자 마시기 좋은 술집
버블앤코클스 영국식 해산물 요리를 선보이는 시푸드 바. 다양한 스몰 플레이트와 하우스 와인, 크래프트 맥주가 준비되어 있어 혼자 들르기 좋다. 주소 서울 강남구 언주로 170길 27 문의 070-7776-8877
독일주택 ‘홀로 한 잔의 술을 마시네’라는 뜻의 1인 술집. 새로운 크래프트 맥주를 끊임없이 소개한다. 고즈넉한 한옥의 분위기에 취하고픈 애주가들이 월요일 낮부터 출몰한다. 주소 서울 종로구 대명 1길, 16-4 문의 02-742-1933
달파란 세 명 이상 들를 때는 예약을 해야 할 만큼 1인 손님 위주로 운영되는 스몰펍. 안주 가격을 8천원으로 유지해 누구나 편하게 들를 수 있도록 배려했다. 주소 서울 송파구 가락로 42길 13 문의 02-413-0507

    에디터
    박소현
    포토그래퍼
    정성원
    장소협찬
    글렌피딕 더 오리지널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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