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좌의 게임
라프 시몬스는 떠나고, 알버 엘바즈도 왕관을 내려놨다. 최고의 자리에서 영광을 누리던 디자이너들이 체스판 위의 말처럼 포지션을 이동하는 지금, 승자와 패자는 없고 말을 움직이는 큰 손만이 남았다.
1 베트멍의 뎀나 즈바살리아에게 발렌시아가의 수장 자리를 내어준 알렉산더 왕 2 디올을 떠나 자신의 브랜드에 집중할 계획을 드러낸 라프 시몬스 3 14년간 이끌어온 랑방을 떠나는 알버 엘바즈
패션계에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 1년간 유독 많은 인사이동과 포지션 승계를 겪으며 ‘세대 교체’라든지 ‘후계자’ 같은 단어가 호사가들의 입에 수시로 오르내렸고, 새로운 디자이너와 브랜드 또한 부상했다. 비즈니스가 활성화된 여느 업계와 마찬가지로 일정한 주기를 두고 찾아오는, 어떻게 보면 생리적으로 당연한 물갈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패션계의 흐름을 오랫동안 지켜본 이들의 눈에는 지금의 변화가 조금 특별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사람이 바뀌는 배경에 무엇보다 시대의 변화가 가장 크게 작용했다는 이유에서다.
왕국은 없다
두 달여 전, 미국의 가장 아이코닉한 디자이너 랄프 로렌이 자신의 거대한 패션 왕국을 이끌어갈 새로운 CEO를 임명했다. 총괄 회장직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의 역할은 유지하되, 회사 운영을 좀 더 전문적인 비즈니스맨에게 맡기겠다는 뜻이었다. 랄프 로렌의 아들 데이비드 로렌이 이미 오래전부터 부사장직에 임하며 경영을 도왔지만 뻔한 권력의 세습은 없었다. 로렌 왕국의 무겁고도 빛나는 왕관을 물려받게 된 주인공은 바로 스티븐 라슨. H&M과 올드 네이비 같은 대중적인 다운 마켓 브랜드의 총괄 사장을 지낸 그는 앞으로 랄프 로렌의 하이패션 DNA를 좀 더 어리고 폭넓은 다음 세대에게 전파하는 책임을 지게 되었다. 소비자 중심으로 급변한 패션계의 빠른 흐름에 잘 적응하는 것, 하이엔드부터 로우 엔드까지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해진 패션 시장을 포괄적으로 공략하는 것이 목표. 이는 지난 50년간 그 누구보다 확고하게 자신만의 세계관과 헤리티지를 완성해온 랄프 로렌이 미래를 준비하는 방식. 이 방식이 과연 성공할 것인지는 조금 더 두고 볼 일이다. 랄프 로렌과 마찬가지로 ‘패션 비즈니스’라는 단어를 안착시킨 자수성가 세대의 디자이너들이 하나 둘 사업에서 손을 떼고 있는 가운데, 도나 카란의 은퇴 소식도 들려왔다. 디자이너 개인의 영광보다 브랜드를 소유한 기업의 자본주의적 논리에 따른 결정이었다. 지난 2001년 일찌감치 브랜드의 소유권과 경영 관리를 LVMH에 넘겼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씁쓸함이 느껴졌다. 뉴요커들을 위한 우아하고 도시적인 룩과 세련된 저지 드레이핑 드레스 시리즈로 여자들의 옷차림을 한층 모던하게 만들었던 그녀, DKNY를 만들어 스포츠웨어를 일상복에 적용하고 성공적인 디퓨전 라인 브랜드의 시대를 연 그녀가 아니던가? 백발에 허리가 굽어도 계속 일할 것만 같았던 패션계 파워 비즈니스 우먼의 상징 같은 그녀인데, 갑작스러운 은퇴와 함께 모회사 LVMH가 발표한 ‘도나 카란의 컬렉션 생산은 당분간 유예된다’는 성명은 많은 이들을 서운하게 했다. 세대 교체라는 말이 머리를 맴돌았다. 이렇듯 혜성처럼 등장해 우리가 옷 입는 방식을 바꾸고, 향수를 만들고, 가구를 만들고, 삶의 방식을 제시하는 스타일 왕국을 건설한 디자이너들을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것일까? 패션계의 터줏대감들이 점점 모습을 감추는 가운데, 그 다음 세대의 디자이너들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새로운 직함으로 불리며 현존하는 다양한 브랜드의 틀에 맞춰 역량을 발휘하라는 새로운 임무를 떠맡게 되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들의 활동 주기는 더욱 짧아졌다.
움직이는 체스판
랑방의 알버 엘바즈, 디올의 라프 시몬스, 발렌시아가의 알렉산더 왕까지 지난 한두 달간 패션계는 스타 디자이너들의 해임 소식으로 시끌벅적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 지 3년 만에 발렌시아가를 떠나게 된 알렉산더 왕은 마지막으로 한결 가볍고 자유로운 감성을 담은 2016년 봄/여름 컬렉션을 선보이며 지금까지 그가 발렌시아가에서 내놓은 컬렉션 중 최고라는 찬사를 이끌어냈다. 어린 나이와 경력, 니콜라 제스키에르의 후임에서 비롯된 사람들의 기대치 등 그간 그가 느껴왔을 부담의 무게를 다들 알고 있었기에 더없이 아름다운 스완 송이었다. 라프 시몬스가 돌연 디올을 떠난다는 소식은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그 누구보다 성공적으로, 안정적인 활동을 선보였고, 디올의 이미지를 보다 미래 지향적이고 현대적으로 다듬는 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이런 새로운 디올에 열광한 팬들은 그의 결정에 아직도 충격을 받은 모양새다. 그리고 딱 일주일 뒤, 알버 엘바즈가 랑방을 떠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특히 그의 이동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패션 하우스의 수장으로서, 잊혀져가던 파리의 쿠튀르 하우스를 모던하고 우아한 레디투웨어 브랜드로 탈바꿈시켰고, 컬래버레이션이라는 단어가 낯설던 시절 하이 패션 브랜드로서는 처음으로 H&M과의 협업 컬렉션을 선보이며 패션 소비 시장의 큰 트렌드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이후 지금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협업이 탄생하는 것을 목격했던가? 발상의 전환과 혁신적인 비전, 타고난 미적 감각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디자이너가 14년간 이끌던 브랜드를 떠난다는 소식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디자이너들이 비워둔 왕좌는 누구의 차지가 되는 걸까? 대부분의 하우스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발표한다. 새로운 인물을 하우스에 매치해 화제성을 이어가고, 홍보 효과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피터 던다스가 떠난 지 하루 만에 후임으로 MSGM의 마시모 지오레티를 발표한 푸치가 그랬고, 매출 부진을 이유로 디자이너 프리다 지아니니와 사장 파트리치오 디 마르코를 동시에 해고한 구찌는 지아니니의 어시스턴트였던 알레산드로 미켈레를 최대한 빨리, 새로운 스타 디자이너로 만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것처럼 보였다. 알렉산더 왕의 해임을 공식 발표한 지 며칠 만에 베트멍의 뎀나 즈바살리아를 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한 발렌시아가 또한 마찬가지. 현재 가장 힙한 디자이너들끼리의 세대 교체라 그 자체만으로도 화제성은 충분했다. 갑작스러운 사직으로 인해 아직 후임이 결정 나지 않은 디올과 랑방의 빈자리 또한 초미의 관심사다. 현재로서는 알버 엘바즈가 디올로 간다는 루머가 돌고 있는데, 이 루머는 몇 해 전 존 갈리아노가 디올에서 쫓겨났을 때에도 똑같이 돌았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알버 엘바즈 같은 베테랑 디자이너도 하우스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그의 다음 활동보다는 다음 ‘행선지’를 짐작하고 기대하는 게 너무 당연한 수순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세린느를 떠나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한 피비 파일로 역시 ‘그녀가 앞으로 무엇을 할까?’보다는 ‘그녀가 어디로 갈까?’ 혹은 ‘그녀의 뒤를 이를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섣부른 추측에 시달리고 있다. 그녀의 거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확정된 것이 없는데도 말이다.
왜 다들 떠나는가?
패션계는 냉혹하다. 이는 그저 하나의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사실이 그렇다. 여러 브랜드를 소유한 거대 기업에 의해 탄생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직함은 그 어느 때보다 패션 디자이너의 일을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었다. 한두 시즌 매출에 의해 생존이 결정되기도 하고 기존 고객과 까다로운 패션 팬들, 혁신을 바라는 미디어의 구미를 고루 맞추기도 어렵다. 아무리 아름다운 옷을 그려낼 줄 알아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으면 생산되지 않기에 자기 자신과도 끊임없이 타협해야 한다. 또 그렇다고 옷만 잘 만든다고 될 일도 아니다. 옷에 비해 판매 가능성이 높은 가방과 액세서리 또한 잘 만들어 매출 향상에 기여해야 한다. 디자이너들이 트렌드와 라이프스타일을 혁신하고 제시하던 과거와 달리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 포화상태의 패션 시장에서 수많은 디자이너의 옷을 소비자가 직접 선택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선택에 포함되지 않으면, 확률의 법칙으로 인해, 도태되고 만다. 그리고 이것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브랜드 운영의 전권을 쥐고 있지 않은 디자이너는 비슷한 사정의 또 다른 디자이너로 대체될 수 있는 위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또 반대로, 기업의 힘에 휘둘려 업계의 생리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디자이너는 금세 의욕을 잃고 지치게 된다. 정치와 자본주의로 인해 이뤄지는 패션계 왕좌의 게임은 결국 디자이너와 기업 간의 권한 분쟁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디자인의 방향성과 목표 지점을 결정할 권한이 디자이너에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패션 뉴스 매체 <비즈니스 오브 패션>과의 인터뷰에서 라프 시몬스는 거대 하우스의 디자이너로 살아가는 삶의 힘겨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디올앤아이>에서 그가 느끼는 어마어마한 압박감을 엿볼 수 있었듯, 1년에 여섯 번(각각 두 번의 레디투웨어, 쿠튀르, 리조트)의 컬렉션을 선보이며 판매율을 생각하고, 매번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블록버스터급 쇼를 기획해야 한다는 사실은 침착하고 체계적이기로 소문난 그조차 지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얼마 전 ‘패션 그룹 인터내셔널 어워드’를 수상한 알버 엘바즈 또한 소감을 말하며 비슷한 피로감을 드러냈다. “패션계 사람들은 다들 조금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어요.” 그러고는 말이 끝나자마자 이어지는 사람들의 갈채를 저지했다.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랑방에 머무른 14년 동안 패션계의 변화는 그에게 얼마나 직접적으로 다가왔을까?
이렇게 하우스를 둘러싼 디자이너들의 인사이동이 잦은 가운데, 새삼 다시 주목받고 있는 건 바로 프라다나 드리스 반 노튼 같은, 거대 기업의 인수 유혹을 뿌리치고 디자이너들이 직접 사업 운영의 전권을 유지하고 있는 브랜드들이다. 라프 시몬스도, 알렉산더 왕도, 도나 카란도 다들 자신의 브랜드(도나 카란의 경우 ‘어번 젠’이라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를 론칭했다)에 집중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지금, 어쩌면 그들은 과거 디자이너들이 혼자 힘으로 패션 왕국을 일으킨 시절로의 회귀를 꿈꾸는 것인지도 모른다. 랄프 로렌, 도나 카란, 지아니 베르사체와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이끌던 패션계는 얼마나 흥미로웠던가? 브랜드 ‘컬렉터’들에 의해 돌아가는 빠른 속도의 게임은 이제 지루해졌다. 디자이너들이 보다 다양하고 새로운 스타일을 제안할 수 있도록, 그래서 소비자들이 즐기는 패션의 판을 뒤집을 수 있도록, 디자이너들이 직접 시계를 거꾸로 돌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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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랜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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