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진의 시간
배우 박해진이 말했다. 걸어온 지난 시간이 단단하기만 했으면 분명히 부러졌을 거라고. 이제는 부드러워질 수 있는 여유를 조금 찾았다고 말이다.
달리기의 출발점 앞에서 듣는 총성을 기억한다.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리는 그 순간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찰나로 기억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영원으로 느껴지는 그 시간. 배우 박해진의 시간은 저마다 기억하는 마디가 다르다. 2004년 드라마 <소문난 칠공주>의 연하남으로 데뷔해 주연작 <하늘만큼 땅만큼>, <에덴의 동쪽>, <열혈장사꾼>의 필모그래피를 쌓은 그는 중국으로 건너가 다시금 새로운 출발선에서 세 편의 드라마를 성공시켰다. ‘박해진 영화관’이 운영될 정도로 낯설고도 화려한 인기였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금 세 번째 출발선에 섰다<.내 딸 서영이>의 대학생 이상우가 보여준 그렁그렁한 눈망울의 처연함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고, 연이어 <별에서 온 그대>에서 사랑만 아는 남자 이휘경과<닥터 이방인>의 서늘한 악역 한재준, <나쁜 녀석들>의 소시오패스 이정문을 지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틈마다 중국에서 드라마를 성실하게 촬영하며 누구보다 촘촘한 시간을 걸었다.
드라마 <치즈인더트랩>의 시작을 앞두고 숨 고르기를 하고 있는 그에게 배우로서 가고픈 길을 물었다. 그는 배역에 대한 욕심은 있지만 하늘에서 빛나는 스타가 되고 싶진 않다고 답했다. 빛의 주변에서 맴돌다가, 허무함과 공허함 없이 원하는 시기에 내려왔으면 좋겠다는 말에서 무게가 짙게 느껴졌다. 이제 그는 네 번째 출발선에 선다. 약간의 여유와 기분 좋은 긴장의 설렘을 안고서.
동물털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몰랐어요. 말과 촬영하는 동안 마음을 졸였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이 정도는 괜찮아요. 심하지는 않지만 가끔 컨디션에 따라 피부가 뒤집어질 때가 있거든요. 대학 병원에서 검사를 했을 때, 50개의 항목 중 30개 이상 알레르기 반응이 나왔어요. 의사 선생님이 연구용으로 피를 뽑아가셨을 정도로 특이한 사례래요.
일상생활에 지장은 없나요?
남들보다 몸이 예민한 편이긴 해요. 식도가 알레르기에 반응하면 위험하니, 매사 스스로 조심하는 수밖에 없죠.
쉬운 일은 아니군요. 이제 곧 드라마 <치즈인더트랩(이하 치인트)>의 촬영을 시작한다고 들었어요.
본격적인 촬영은 9월부터예요. 그러고 보니 얼마 안 남았네요.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유정’이라는 캐릭터는 확실히 어렵거든요. 평범하지는 않아요. 이전의 드라마들처럼 제가 무얼 준비해야 하는지도 솔직히 감이 안 잡혀요.
확실히 장르가 묘하죠. 누가 봐도 완벽한 남자 유정의 캐릭터는 가끔 연인인지 악인인지 헷갈릴 때가 있어요. 원작인 웹툰 <치인트>는 ‘로맨스릴러’라 불리던걸요.
내면이 복잡한 친구에게 다가가는 건 쉽지 않아요. 그에 대한 이유를 단순하게 보여주면 공감대를 형성하기가 어렵죠. 피해의식으로만 보일 수도 있으니까요. 요즘은 계속 그에게 다가가는 방법만 고민하며 살아요.
원작의 인기가 워낙 높아요. 부담도 있겠죠?
그렇죠. 하지만 원작의 팬들이 대한민국의 전 국민은 아니라 생각해요. 우리는 불특정다수를 위한 드라마를 만들어요. 그 속에 팬들도 있는 거죠. 분명히 ‘이건 원작과 달라, 유정 같지 않아’라는 반응이 나올 거예요. 당연하죠. 상상 속 유정이 독자들마다 같을 수가 없어요. 누구나 관점의 차이가 있으니까요. 저마다 본인들이 상상한 인물로 남겨두었으면 좋겠어요. 물론 원작의 줄기를 따르겠지만, 드라마를 원작과 똑같이 만들면 그 틀에 갇힐 수밖에 없거든요. 분명 달라요.
배우와 제작사가 해석한 원작의 변주를 즐겼으면 좋겠네요. 원작의 드라마화가 결정되기도 전부터 당신은 가상 캐스팅 0순위로 화제를 얻었어요.
그게 벌써 5년 전이에요. 그때 드라마로 만들었으면 더 좋았겠죠. 여전히 극중 유정은 스물다섯 대학생으로 남아 있지만, 지금 전 이미 서른셋이에요. 그사이 피해갈 수 없는 노화가 얼굴에 묻었잖아요. 친구로 나오는 다른 배우들(김고은, 서강준, 남주혁)은 90년대에 태어났어요. 그 나이의 간극이 혹여 화면에서 튀어 보이진 않을까, 난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 여긴 어디, 난 누구인가를 고민했어요. 하하.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사이에서 고민하며 사는 캐릭터가 바로 유정이거든요.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게 섞여 있어서 튀는 친구죠. 그래서 오히려 이런 점이 장점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해요.
많은 사람이 주시하는 이 드라마를 택한 이유가 궁금했어요.
사실 그 부담감 때문에 수차례 거절했던 작품이에요. 잘해야 본전이라는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아요. 그러니까 무조건 잘해야 해요.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대학생 역할을 맡아볼 것이며, 이만큼 뜨거운 러브콜을 받아보겠어요? 더 이상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어요.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부담감만큼 잘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고요.
원작은 친근한 척 잔혹한 인간관계를 섬세하게 끄집어냈어요. 사실 유정의 캐릭터는 연인으로서 그다지 매력적이지는 않죠.
제 애인이라면 싫을 것 같아요. 겉과 속이 다른 건 답답하고 피곤한 일이잖아요. 선의의 거짓말일지언정, 거짓말이 아닌 진심을 듣고 싶어요.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상대가 나를 떠날 거야, 그러니까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못 담그는 사람들처럼 정말 해보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며 살아요. 그건 슬픈 일이에요.
당신의 연애관과는 정반대인가요?
살짝 비슷한 부분은 있어요. 싸울 것 같으면 피해버리는 부분이요. 전 그냥 맞춰줘요. 여자들은 ‘빵’ 싸우고 ‘확’ 풀면서 더 끈끈해진다고 여길 때가 있지만, 전 크게 감정이 부딪치는 걸 별로 안 좋아해요. 모든 일에 있어 평화주의자죠. 감정만 우선시해버리면 ‘팩트’를 놓칠 수 있으니까 문제에 대한 감정을 한 템포 식힌 뒤에 대화를 하는 편이에요. 하지만 상대는 이 순간을 답답해하죠. 때론 당장 해결책을 원해요. 하지만 내가 당장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면 서로 힘든 감정만 쌓이지 않나요?
상대방이 지금 흥분해서 제대로 듣기 어려운 타이밍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죠. 남녀의 차이라기보단 개인의 성격차가 아닌가 싶어요.
음, 맞아요. 전 확실히 그런 타입인가 봐요.
주인공 유정은 겉으로는 적당히 미소 지으며 세상에 맞춰가면서 살아가요. 누구나 그럴 때가 있긴 하지만, 연예인에겐 특히 더 공감 가는 부분 아닌가요?
싫은 소리하느니 내가 조금 더 손해를 보는 게 마음 편해요. 싫은 소리를 되로 주고 말로 받을 수 있는 조심스러운 직업을 가졌죠. 그런 면에서 유정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요. 제 물건을 누군가 갖고 싶다고 한다면 주고 말아요. 그것이 없어도 상관없으니까요.
그건 확실히 수집가의 자세가 아닌데요? 당신의 집 안을 가득 채운 나이키 컬렉션과 피규어는 유명하잖아요.
요즘은 예전처럼 수집에 집착하진 않아요. 예전에는 수집이 제 삶의 일부분일 정도로 모든 일의 우선순위를 다퉜다면, 지금은 그냥 고이 접어놓은 추억 정도예요. 물욕은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없어져요. 요즘은 더더욱 그래요.
여러 인터뷰를 통해 완벽주의자인 모습을 보였죠.
완벽함과는 조금 다른 반듯함을 좋아해요. 자로 잰 듯한 느낌이요. 결벽증은 아니지만 편집증은 있어요. 사물이 제자리에 딱딱 열 맞춰 있는 게 좋아요.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신뢰요. 조금 구식 마인드예요. 사람 사이는 일단 정부터 나눠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요즘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는 것도 알죠. 나이가 들면서 깨닫는 게 많아요.
또 요즘 무엇을 깨달았어요?
돈은 벌고 싶다고 해서 벌리는 것도 아니고, 갖고 싶다고 해서 모든 걸 가질 순 없죠. 무엇이든 내가 열심히 몰입할 때 따라와요. 돈이든 일이든 사람이든요. 그게 순리인가 봐요. 티끌 모아 태산이라지만 악착같이 매달리며 살고 싶진 않아요. 억지로 친해지고 싶다고 해서 친해지는 것도 별로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럼 인간관계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요?
좀 냉정한 편인 거요.
주변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나요?
많은 사람이 맺고 끊는 게 칼 같다고들 해요. 일도 그렇지만, 연애할 때도 그런 성향이 작용하죠. 상대방이 헤어지자고 하면, ‘그래’라고 답하는 것처럼요.
그럼 새벽 두 시, ‘구 남친’ 입장으로 ‘자니?’라는 문자를 보내본 적이 없겠네요?
없어요. 한번 헤어진 사이를 붙이는 건 무의미해요. 그렇게 한 적이 딱 한 번 있었어요. 한번 떠나간 사람이 두 번 떠나지 않으리란 법 없죠. 그 다음 더 깊어진 상처는 어떻게 보듬을 수 있겠어요. 서른이 넘어 그 감정을 감당할 만큼의 여유도 없어졌나 봐요.
당신과 친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겠죠?
대화가 핑퐁처럼 이어지듯 마음도 그래요. 보통 코드가 맞는다고들 표현하죠. 성격으로 보면 솔직한 사람을 좋아해요. 진실을 말하고 뒤돌아서서 달라지지 않는 사람이요.
당신이 타인에게 가장 조심스러워하는 점은 무엇이죠?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사람을 대하는 모든 상황이 조심스러워요.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일들이 많으니까요. 의도와는 달리 과장되고, 확대 해석될 때가 제일 어렵죠. 상황의 사실만 가지고 바라봤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내 마음 같지는 않죠. 그걸 신경 쓰게 되면 본인의 솔직한 성격이 드러나긴 어렵겠는데요?
그래서 제 인간관계가 점점 더 좁아지고 깊어지는 거죠.
최근 청와대 ‘나눔과 하나 되는 행복 대한민국’ 행사에 초청받았다고 들었어요.
국내 어린이보호단체를 통해 만난 친구들과 중국의 심장병 어린이들을 후원하고 있어요. 겨울에는 연탄 봉사를 하고요. 재난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내가 도울 것은 없을까 찾게 되죠. 구호 단체에서 ‘이 돈이면 한 달에 몇 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잖아요. 진짜예요. 참여하면 아프리카의 아이로부터 고맙다는 진심 어린 편지가 날아와요. 제가 밥 한 끼 안 먹는다고 문제 될 게 없지만, 그 밥 한 끼로 인해 생계를 위협받던 친구들이 미래를 꿈꾸게 되죠. 그 편지를 받으면 기분이 정말 묘해요. 제가 주는 것보다 받는 감동이 훨씬 커요.
나눔의 즐거움을 언제 알게 되었어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어린 시절 제 사진 속에는 그랜드 피아노와 계단, 벽화와 정원이 있을 정도로 잘살았대요. 정작 저는 모르는 집이죠. 제가 기억하는 우리 집은 방 한 칸을 디귿 자로 나눠 네 가족이 자는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거든요. 사춘기 시절 부모님의 이혼을 겪을 때도 그리 좋진 않았겠죠. 시간이 흘러 안정되었을 때, 가볍게 ‘한번 해볼까?’라는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소속사 대표님이 돕고 있던 친구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봉사를 접했고요. 해보고 나니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어느덧 내가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다는 사실이 뿌듯했고, 가진 것을 나눠줄수록 더 행복해졌죠. 이 정도로만 계속 도움을 줄 수 있는 형편이 되었음 좋겠네요.
대단해요. 꾸준히 실천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또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에요. 운동하는 것과 똑같아요. ‘난 운동할 시간도 없이 바빠’라고 생각하면 평생 운동을 못해요. 없어서 못하는 게 아니라 시간을 만들어서 운동하러 가잖아요. 나눔과 봉사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다른 걸 할 시간을 조금만 줄이면 되죠.
내년이면 배우 생활 10년 차가 되요. 그 돌아온 시간은 단단해지는 시간이었나요? 부드러워지는 시간이었나요?
남들처럼 차곡차곡 밟아온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돌아서 10년이 된 거죠. 데뷔 이후 공백기가 길었잖아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창창히 움직여야 해요. 그 시간이 단단하기만 했으면 분명히 부러졌을 거예요. 나이가 들면 확실히 부드러워지는 여유가 생겨요. 예전처럼 그 무언가에 쫓기지 않죠. 굉장히 힘들어했던 시간들도 내 인생에 녹아 있어요. 지옥처럼 아픈 일이 또 생길 수 있죠. 분명한 건 모두 지나간다는 거예요. 이젠 그건 확실히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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