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어쩌면 지금이 전성기

한두 해 전부터, 패션계에서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패션이라는 산업과 그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난 일련의 변화에 관한 보고서. 그리고 절망 속에서 발견한 희망에 관한 이야기.

치약과 접시, 잇백을 밀어내다
기분이 이상하다. 별다른 이유 없이 우울하기도 하고, 딱히 게으르게 살고 있지도 않은데 삶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것 같은 죄책감이 들기도 하는 상태. 마르지엘라나 드리스 반 노튼을 옆집 친구 이름처럼 입에 달고 살던 내 주변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 ‘유시몰’과 ‘마비스’를 거론하기 시작하던 때부터 이 심리적 이상 징후가 시작됐다.

“유시몰을 한국에서 바로 살 수 있는 사이트가 있다며?”

“유시몰보다 마비스가 낫지 않아? 쿠오토도 괜찮고…. ”
처음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패션계에서 나름대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여자들이 패션과 예술 서적이 가득한 도산 공원 앞 카페에 앉아, 1만2천원짜리 커피까지 홀짝이며 한다는 이야기가 고작 치약이라니! 그 무렵, 치약의 위치 격상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여기저기서 생겨났다.

첫째, 접시를 모으는 친구가 늘어났다. 그들이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이거나 살림이 취미인 귀부인이냐고? 아니! 전혀! 거의 매 끼니를 외식으로 해결하고, 잦은 해외 출장과 해외 여행으로 집에서 자는 날조차 많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접시를 사들이더라고. 둘째, ‘텃밭 가꾸기’나 ‘천연 염료를 이용한 옷감 염색’처럼 30년 이후에나 하게 될 거라 생각했던 취미 생활을 하느라 주말을 바치는 이들도 덩달아 늘어났다. 밥도 안 해 먹으면서 그 많은 상추를 다 어떻게 처리하고 천연 염료로 염색한 옷 같은 건 입지도 않으면서 그걸 왜 하나 모르겠지만. 셋째, 이전 같으면 ‘작품’으로 추앙되었을 패션 아이템들, 가령 조각 작품 못지않게 조형미를 뽐내는 굽이 달린 구두라든가 그로테스크한 뼈다귀 장식을 주렁주렁 매단 핸드백 등이 쇼윈도와 멀티숍의 중심 자리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그럼, 그 자리는 어떻게 됐느냐고? 패션 애호가로서 자존심이 상해 입에 담고 싶지 않지만, 이왕 말을 꺼냈으니 끝은 맺어야겠지? 안타깝게도 접시, 비누 차지가 됐다. 심지어는 변기 청소용 솔 차지가 됐다!

그래도 희망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그 희망이란 나와 내가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미 30대를 훌쩍 넘어 40대를 향해가고 있거나, 이미 40대의 중턱에 다다른 이들이라는 점이었다. 자고로, 패션이란 젊은이들이 가장 열정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변화를 이끌어가는 대상 아니겠나.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하자. 나는 내년이면 마흔이 되고, 내가 주로 만나는 사람들은 나와 비슷하거나 더 나이가 많다. 패션을 적극적으로 향유하고, 숨가쁘게 변하는 트렌드를 좇아가기엔 이제 늙었다는 말씀. 조금씩 나오던 뱃살은 이제 탄력을 잃고 서서히 흘러내리기 시작하고, 언제부터인가 허리나 무릎 관절에 나타나기 시작한 이상 징후로 인해 5센티미터가 넘는 신발을 신으려면 몇 날 며칠을 벼르고 별러야 하는 처지들인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멋 내기보다 집 꾸미기나 텃밭 가꾸기가 더 재미있게 느껴질 수밖에. 아니나 다를까, 한창 집 꾸미기에 빠져 있던 스타일리스트 선배는 이런 말로 나를 안심시켜주었다. “감각이라는 게 나이에 따라 더 집중하게 되는 분야가 있게 마련인 거야. 한곳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옮겨 다니기도 하고….”

이런 생각을 가슴속에 깔고 거리의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값에 상관없이 자기 나름대로 최대한 꾸미고 나온 10대와 20대들이 파도처럼 길거리를 휩쓸며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허옇게 드러난 허벅지, 아슬아슬한 시스루 원단 밑으로 드러난 통통한 옆구리…. 고급스럽거나 고상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옷차림에서는 ‘최대한 돋보이고 싶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땀도 흡수 못할 것 같은 폴리에스테르 소재 블라우스라 해도, 그런 의지만 있다면 나름대로의 가치와 정당성이 있지 않을까? 꼭 비싸고 고급스러운 것만 ‘패션’의 월계관을 쓸 자격이 있는 건 아니니까. 그 왜, 1960년대 후반, 메리 퀀트가 외치지 않았나. ‘고상한 것은 다 죽은 것이다. 천박하고 값싼 것이야말로 살아 있다.’

스웨트 셔츠, 프린지 재킷을 밀어내다
뭐, 내 삶에도 변화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사려는 마음은 있는데 백화점을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살 게 없는가 하면, 어쩌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찾아내 사도 잘 꺼내 입지 않게 되었다. 일례로, 지난 2월에 산 1970년대 풍 레트로 프린트 팬츠는 딱 두 번 입고 말았고 거금을 투자해 장만한 프린지 스웨이드 재킷은 아예 개시조차 못했다. 결국, 유니클로 스웨트 셔츠, 아크네 스웨트 셔츠, 키츠네 옥스퍼드 셔츠, 세인트 제임스 보더 셔츠를 번갈아 입는 날들이 이어졌다. 언젠가는 이태원의 한 테라스 카페에서, 친구 부부를 앞에 놓고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다.
“내 옷장이 왜 이렇게 단조로워졌는지 모르겠어.”
잘나가는 패션 디자이너인 친구 부부 역시 맞장구를 쳤다.
“그치? 요새는 튀는 옷 입고 나오면 괜히 민망하고 그렇더라. 멋 안 부리는 게 트렌드인 시대인 것 같아. 솔직히 디자인할 맛도 잘 안 난다.”
“컬렉션 한번 할 때마다 보통 40~50벌을 만드는데 그래봤자 팔리는 건 스웨트 셔츠뿐이야.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국내 디자이너들도 다 그래. 아무리 고민하고 창의력을 쏟아서 컬렉션을 완성해도 사람들이 관심 갖는 건 쇼 때뿐이고, 결국 관심은 다 스웨트 셔츠에 쏠려. 매출도 그렇고. 스웨트 셔츠 디자인이라고 해봤자, 결국은 프린트 싸움인데…. 스웨트 셔츠 디자인하느라 고민할 때면 한편으로 좀 허무하지.”

사실, 서두에서 말한 나의 심리적 이상 징후의 가장 중요한 원인 역시 친구의 이 말과 맞닿아 있다. 5~6년 전까지만 해도 마치 무언가에 취한 것처럼 쉴 새 없이 새로운 컬렉션을 쏟아내던, 매년 적게는 두 번, 많게는 열 번이 넘는 컬렉션을 선보이면서도 ‘패션 사랑 열매’를 따먹은 듯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던 디자이너들이 언제부터인가 피곤한 기색을 드러내더니 급기야는 작년 가을, 인류 역사에 가장 크리에이티브한 패션 디자이너 중 한 명으로 기억될 ‘앙팡 테리블’ 장 폴 고티에가 레디투웨어의 세계를 떠났다. ‘경제적 한계와 숨돌릴 틈 없이 돌아가는 스케줄로 인해 크리에이티브한 아이디어를 낼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대신 그는 여전히 아이디어를 내고, 구현할 수 있는 오트 쿠튀르에만 전념하겠다고 밝혔다. 최근 몇 년간 그의 레디투웨어 컬렉션이 다소 실망스러웠고, 그에 대해 적지 않은 비판이 쏟아졌으며, 그 결과 매출마저 떨어져 고티에가 레디투웨어를 중단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게 전부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 가장 밑바닥에는 내 디자이너 친구의 말처럼 적어도 기성복에 관한 한 크리에이티브를 그다지 존중하지도, 원하지도 않는 세태가 자리 잡고 있다고 나는 확신하니까. 왜 그렇게 확신하냐고? 나름 근거가 있다. 첫째, 장 폴 고티에가 레디투웨어 중단을 선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빅터앤롤프도 똑같은 선언을 했다. 유명 디자이너 중에서도 크리에이티브로 평가받던 두 팀이 연이어 레디투웨어 중단을 선언했다. 이걸 단지 개인의 문제로 생각한다면, 그거야말로 너무 안일한 자세 아닐까?

둘째, 기성 디자이너들이 이렇게 살인적인 스케줄과 경제적 문제로 고통받고 급기야 떠난다는 선언까지 하는 동안, 패션계에서 가장 핫한 레이블로 떠오른 디자이너(라기보단 디자인 팀이라 불러야겠지만)의 이름이 ‘옷’이다. 베트멍(Vestments). 프랑스어로 ‘옷’이라는 뜻의 이 단어를 레이블 이름으로 선택하다니, 일견 시크해 보이기도 하지만 조금만 각을 바꿔 생각하면 지금은 ‘옷을 그저 옷으로’ 생각하는 이들의 시대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들은 이름뿐 아니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지금 이 시대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꿰뚫었다. 세세한 커팅이나 디테일에 심혈을 기울여 완성도를 높이되, 전혀 특이하지 않고 심플하고 깔끔한 디자인, 매 시즌 컬렉션 전체를 바꾸는 대신 시즌에 무관하게 시그니처 아이템을 조금씩 업데이트해 계속 내놓는 시스템, 한두 명이 아니라 일곱 명의 디자이너가 모인 팀이라는 점. 이런 콘셉트, 이런 구조라면 기존 디자이너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살인적인 스케줄’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을 것이고, 창의적인 컬렉션을 내놓았다가 사람들에게 외면받는 일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요즘 사람들은 크리에이티브를 원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한때는 닿을 수 없다 해도 끝없이 꿈을 원하고 추구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손에 잡히지 않는 꿈보다 당장 맛볼 수 있는 한 끼의 음식을 좇느라 시간과 열정을 쏟는 것과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자연히, 5~6년 전처럼 패션쇼를 보며 흥분과 감동을 맛볼 기회는 줄어들었고, 내가 입을 수 있든 없든 “끝내준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옷을 쇼윈도 너머로 구경하는 일도 당분간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태양은 뜬다
어떻게든 사람은 살게 되어 있고, 산업 또한 어떻게든 굴러가게 되어 있다. 지금은 모든 것이 급변하는 과도기일 뿐, 디자이너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이 최상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 다시 생기를 되찾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점점 기억에서 잊힐 것이며, 그 자리는 새로운 얼굴이 채울 것이다. 또, 세상은 쉼 없이 변하고, 유행은 돌고 도는 법. 패션산업의 변화 양상과 맞물려 무던한 옷이 판 치는 시기가 지나고 나면 또 다시 깜짝 놀랄 만큼 독특한 옷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날도 올 것이다.

그나저나 나는 요즘 런웨이나 쇼윈도 대신 인스타그램을 보면서 한동안 잃었던 활력을 되찾고 있다. 셀프 포트레이트, 조나단 심카이, 만수르 가브리엘, 아쿠아추라, 키트앤앨리스 등 아직 장 폴 고티에나 빅터앤롤프만큼 널리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꽤 괜찮은 디자인의 옷과 액세서리를 열정적으로 내놓는 신진 레이블의 열정을 보면 예전만큼 떠들썩하진 않다 해도 패션은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숨쉰다는 사실이 느껴지는 덕이다. 많은 것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패션은 아직 생명을 잃지 않았다. 아니, 곳곳에서 부지런히 새로운 디자인을 고민하고, 뚝딱뚝딱 만들어 내놓는 젊은 레이블 덕에 오히려 더 강인한 생명력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직 충분한 생산 능력과 자본력을 갖추지 못한 덕에 인기 있는 신진 레이블의 제품들은 늘 ‘품절’과 ‘재입고’ 사이를 왔다 갔다 하지만, 이런 ‘품절’과 ‘재입고’를 반복하는 시기야말로 레이블로 치면 가장 순수하고 벌떡이는 생명력을 지닌 시기가 아닐까. 그토록 생명력으로 충만한 젊은 레이블들이 어느 때보다 희망차게 자기 길을 걷고 있다는 건, 패션 산업이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하게 성장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증거일 테다.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지금이야말로 패션을 제대로 향유하고 자부심을 느끼기에 최적의 시간들일지도 모른다. 트렌드를 우르르 좇는 대신 응원하고 싶은 신인 디자이너의 옷을 사 입음으로써 그의 성장에 일조할 수 있다는 점도(그것도 빅 하우스의 비슷한 아이템에 비하면 훨씬 저렴한 가격에!) 멋지지만, 그 옷을 입고 외출한 날 누군가 “예쁘다. 이 옷 어디 거야?”라고 물을 때, “아, 이거? OOOO잖아. OOOO, 아직 안 입어봤어?” 하면서 남다른 자부심을 느끼는 그 순간만큼 근사한 순간은 그다지 많지 않을 테니까.

    심정희(패션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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