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프와 미식가가 말하는 여름의 맛 <2>

더운 여름, 모든 음식에 싫증이 나고 삼시세끼를 챙기는 것도 마냥 귀찮아질 때가 있다. 바로 그때 떠오른 당신의 음식은? 셰프와 미식가가 말하는 그 여름 음식의 맛.

1 익힌 복숭아의 맛
페슈 멜바(Peche Melba)라는 디저트를 알게 된 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첫해 여름이었다. 호기심으로 여러 디저트를 경험하던 만난 가장 생소한 것이 과일을 익혀 먹는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디저트로 주로 생과일을 먹는데, 프랑스에서는 더운 여름에도 계절과일로 조리한 다양한 디저트를 먹는다. 그중 페슈 멜바는 여름 과일인 복숭아를 산딸기 리큐어를 넣은 시럽에 익힌 후에 머랭과 바닐라아이스크림, 산딸기 소스, 바닐라 휘핑크림과 함께 먹는 클래식한 디저트이다. 새콤달콤한 복숭아와 차가운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동시에 한입 맛보면 입안 가득 부드러움, 바삭함 , 달콤함에 매료된다. 프랑스에서는 여름이면 비스트로부터 미슐랭 별을 단 레스토랑까지 프랑스 전역에서 페슈 멜바를 맛볼 수 있다. 내가 여름을 기다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 이국진(메종 드 라 카테고리 페이스트리 셰프)

2 판메밀을 끊다
더워지면 꼭 판메밀을 먹는다. 마른 메밀이라고도 불리는 이 음식은 그야말로 적당한 판에 메밀 면을 돌돌 말아 올려놓고 먹는 음식이다. 면이 물속에 있지 않으니, 마른 메일이라는 말도 합당하겠다. 대체로 따뜻하거나 찬 국물 속에 들어간 면을 먹거나, 그것도 아니면 적당한 소스에 면을 비벼서 먹는 식습관이 대부분인지라, 판메밀은 면 음식 중에서도 독특한 지위를 이미 누리고 있는 셈이다. 판메밀은 일반적인 메밀국수와는 달리, 면의 상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잘하는 집과 못하는 집의 차이가 눈에 확연하다. 게다가 메밀은 밀국수와 다르게 그 삶기의 정도를 맞추기가 꽤나 까다롭다. 너무 익혀 면이 퍼지거나 덜 삶아 면이 딱딱하면 소스에 아무리 담가 살려보려고 해도 그 맛이 살아나지 않는다. 면이 합격하면 다음은 쯔유 소스다. 양파와 대파, 설탕과 간장 그리고 가쓰오부시를 끓여 만드는 쯔유는 만들기도 그리 어렵진 않고, 완성된 소스째로 시중에 있기도 하다. 그러나 ‘제대로 된’ 쯔유 소스를 맛보기란 어려운 일이다. 사실 섭섭해할 것도 없는 것이, 비싸지도 않은 음식이 조미료의 도움 없이 천연재료의 풍미만 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가끔 불가능을 이겨내고, 안성맞춤인 된 면과 제대로 된 쯔유 소스가 만나면 3판 먹다 4판 추가시켜도 모를 판모밀에 완성되는 것. 광주 구도심 충장로에는 1960년부터 메밀국수를 전문으로 하던 ‘청원’이라는 작은 식당이 있다. 고베 대지진이 났을 때였다. 아버지는 어린 나를 데리고 그곳에 갔다. 아직 와사비 맛을 모르던 내게는 유부초밥을 시켜주고 당신은 판모밀을 드셨다. 소스에 적당히 담근 면을 내 접시에 덜어주고 가위로 뚝 면을 자른다. 여태 찰기가 탱탱한 면은 가위에 튕기며 접시 바깥으로 조금 나아갔다. 나는 그것을 손으로 얼른 먹었다. 어머니가 봤으면 기함을 했겠지만 아버지는 그저 웃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이웃나라의 재난이 방영되고 있었다. 원래 메밀은 일본음식이다. 12월 31일, 그해 안 좋은 일을 끊어버리고 새해를 맞는다는 의미에서 먹는다고 하니, 엄밀히 말해 여름 음식은 아니다. 청원에서의 첫 판메밀 이후로 일본에서는 몇 차례의 지진이 더 있었고, 우리 또한 여러 재난과 재해가 지나가고 또한 진행 중이다. 올해 여름은 그런 일들을 정말이지 싹둑 끊어버리고 싶다. 판메밀로 가능하다면 100판도 먹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4판은 기본으로 먹으니까. 판메밀을 끊으며 올여름, 조금은 힘을 낼 수도 있을 것 같다. – 서효인(시인)

3 해산물 세비체
나의 여름은 그대들의 여름보다 훨씬 뜨겁고 강렬하다. 여름이 오면 나의 주방 안에서는 더위와 싸우는 전사 같은 10명의조리사는 벌컥벌컥 얼음물을 마시며 ‘오더’를 친다. 건조한 주방 안에서 “냉면 먹고 싶다. 우리 땀 너무 흘리니 몸보신으로 장어를 먹자, 아니 초계국수가 최고지. 아니, 무슨 소리야. 물회에 소주가 최고지” 하면서 더위와 싸우는 우리를 위로한다. 그런 대화 속에서 내 머리를 번뜩이게 하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오늘 저녁, 아뮤즈 부슈로 세비체(Ceviche) 할까?” 하면서 재료를 체크하러 워크인으로 향한다. 워크인 안은 나에게 잠시의 시원함을 주는 곳이요, 재료를 보며 영감을 주는 곳이며, 지난날 일하던 직장을 기억나게 해주는 훌륭한 추억의 저장고이기도 하다. 내가 요리를 시작한 샌프란시스코의 주방에는 다양한 인종의 요리사들이 있었는데, 스태프 밀(Staff Meal)로 각자 본인 나라의 음식을 만들어 나누어 먹기도 하고, 휴무가 맞으면 함께 레스토랑 투어를 자주 했다. 먹는 게 남는 것이요, 오늘의 포식은 훗날 나의 레시피가 될 것이라 외치며 말이다. 내가 일하던 레스토랑은 샌프란시스코 만이 한눈에 보이는 페리빌딩 옆에 위치해 있었는데, 근처 페루비안 레스토랑에 삼삼오오 모인 우리는 파란 파라솔이 청량감을 주는 테라스에 앉아, 피스코 사워(Pisco Sour)를 한 잔씩 시킨다. 페루 브랜디와 라임, 시럽, 계란 흰자로 만들어낸 칵테일은 담겨 나오는 비주얼부터가 무척 시원해 보인다. 차가운 잔에 밀키스 같은 컬러의 음료를 들이켜며, 우리의 세비체를 기다린다. 여름에는 꼭 이걸 먹어야 입맛이 살아난다는 친구의 설명에 한껏 기대에 부푼 나와 세비체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태평양 연안에 있어, 해산물이 풍부한 페루에서는 문어, 도미, 연어, 새우, 관자, 조개 등의 해산물을 잘게 자른 뒤 라임주스를 듬뿍 부어 30분 정도 절여두었다가, 얇게 썬 적양파를 넣어서 먹는다. 만드는 이에 따라서 셀러리, 상추, 고추를 넣기도 하고, 매콤한 소스를 가미하기도 한다. 이렇게 초간단 요리가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것은 첫째는 차가운 온도 덕분이요, 새콤한 산에 조리된 회의 하얀 색감 때문이고, 입에 들어가는 순간 느껴지는 식감, 절인 해산물 주스와 어우러진 라임주스의 맛은 입안에 침이 고이게 한다. 우리가 새콤한 초장으로 버무린 물회를 먹듯, 이러한 새콤함은 여름의 더위를 잠시라도 잊게 하는 맛임이 분명하다. 회의 식감은 부드러운 고기처럼 느껴지고, 라임과 그리 친분이 두텁지 않은 우리네 과거의 정서에는 신선한 라임주스 맛이 신세계처럼 느껴진다고나 할까? 어쩌면 초장에 찍어 먹는 회 맛을 이길 기세이다. 여기에 차가운 맥주나 화이트 와인 한 잔이면 잠시 바닷가를 바라보며 바캉스를 온 기분마저 들겠다. 한국에 돌아와 세비체를 먹겠노라며 찾아 다녔지만 그 맛을 느낄 수 없었다. 맛은 음식만이 아니라 함께 먹은 사람에 대한 기억까지 포함하니까. – 크리스틴 리(세컨드키친 총괄 셰프)

4 태국에도 냉면이 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나기 시작하는 여름이 찾아왔다. 이맘때면 나는 늘 태국여행을 준비하고 하루가 멀다하고 태국식 냉면을 먹는다. 태국식 냉면이라니. 대부분의 사람에겐 매우 생소한 음식일 것이다. 기본적인 한국 냉면 육수에 태국식 향신료와 토마토, 민트, 소고기 편육을 곁들인 시원한 쌀국수라고 보면 된다. 여기에서 나만의 비밀 레시피는 얼음 동동 띄운 육수대신 빙수처럼 곱게 간 빙수 스타일 육수라는 거다! 알싸한 태국 향신료의 맛과 머리가 쭈삣 서는 시원한 얼음육수의 환상적인 조합은 뜨거운 열과 땀을 한방에 싹 날려버릴 맛이다. 더위에 지치고 바쁜 일상으로부터 태국 휴양지의 시원한 그늘 밑으로의 순간이동이 필요하다면 태국식 냉면빙수를 맛보시길! – 송용성(스파이시바이트 오너셰프)

5 엄마의 고추장볶음
고추장볶음은 서울토박이인 엄마가 황해도 봉산이 고향인 시어머니에게 배운 이북음식 중 하나다. 재료는 고추장과 꽈리고추, 돼지고기로 간단하다. 만드는 법도 재료만큼 단순하다. 작은 냄비에 물을 조금 붓고 돼지고기를 볶듯 삶는다. 돼지고기가 대충 익으면 꽈리고추와 고추장을 넣고 바글바글 끓이면 끝이다. 매콤한 고추장과 아삭아삭 씹히는 꽈리고추, 돼지고기의 기름기가 만나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어떻게 무엇과 먹어도 맛나지만, 갓 지은 뜨거운 흰 쌀밥과 궁극의 궁합이다. 맛난 반찬은 맛난 술안주이기 마련. 고추장볶음도 마찬가지여서 특히 소주 안주로 그만이다. 고추장과 꽈리고추, 돼지고기는 연중 내내 구할 수 있는 흔한 재료인데, 왜 하필 여름이면 떠오르는 음식이냐 묻는 이도 있겠다. 꽈리고추 때문이다. 꽈리고추는 여름이 지나면 너무 매워서 고추장볶음용으로 적당하지 않다. 여름에 나오는, 생으로 먹어도 좋을 만큼 달고 여린 꽈리고추라야 우리 집 고추장볶음 특유의 맛이 난다. 게다가 들어가는 재료가 많지 않기 때문에 각각의 재료가 좋아야 한다. 고추장은 아무래도 집에서 담근 것이라야 한다. 너무 달고 경박한 매운맛의 시판 고추장을 쓰면 내가 기억하는 우리 집 고추장볶음 특유의 맛이 나지 않는다. 집고추장이 지닌 점잖게 맵고 구수한 맛이 고추장볶음의 핵심이라 하겠다. 고추장볶음을 어릴 때부터 아주 좋아했기에 여름이면 엄마에게 자주 해달라고 졸랐다. 차갑게 먹어도 맛있어서 도시락 반찬으로도 자주 싸갔다. 평생 식욕을 잃어본 적이 없는지라 특별히 입맛을 되찾기 위해 무언가를 먹어본 일은 없다. 하지만 여름이면 언제나 떠오르는 음식, 그리고 해외출장 갔다가 돌아올 때 엄마가 “뭐 해줄까?” 물어보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음식이 바로 고추장볶음이다. – 김성윤(<조선일보> 음식 담당 기자)

6 말아 먹다
날씨가 더워지면 찬밥에 보리차물을 말아 먹던 어린 시절의 한 끼가 문득 생각난다. 엄마도 사람인지라, 주방이 찔 듯이 더운 여름날엔 찬밥에 물을 말고 밑반찬 한두 개만 올린 밥상을 자주 차려주셨다. 그땐 입술이 코보다 더 나온 채로 마지못해 한 끼를 비웠지만, 이젠 그 시원하고 간편한 맛의 매력을 안다. 이젠 아이스크림보다도, 살얼음을 띄운 식혜보다도, 보리차물에 만 찬밥 한 숟가락이 내겐 더 여름의 맛이다. 몇 해 전부터는 여름만 되면 물에 만 찬밥과 함께 묵밥과 김치말이밥이 간절하게 떠오른다. 묵밥은 고향 경남에선 거의 타국의 맛이다. 파는 곳도 드물고, 엄마도 묵밥은 해준 적이 없다. 그래서 묵밥은 서울로 올라오고 나서부터 빠지게 된 음식이다. 구수하면서 새콤한 육수에 묵과 밥이 한데 뒤섞인 차가운 묵밥은 몸과 마음이 더위에 눌려 찐득할 때 자주 먹는다. 땀을 쫙 빼는 뜨거운 국물도 아니고 이가 시리게 차가운 국물도 아니지만 매끄러운 묵이 입안으로 들어오면 여름이 가시는 기분이다. 뒤이어 찬밥 한 숟가락이 입안으로 알알이 밀려들어오면 속까지 든든하게 찬다. 더위와 잡지 마감이 겹쳤을 땐 회사 근처에 있는 국시집 청담동 ‘두루’에서 파는 묵밥을 주로 찾는다. 따뜻한 안동식 국시까지 한 그릇 같이 시켜 냉탕과 온탕을 드나드는 기분으로 식사를 한다. 시원한 국물에 말아 먹는 찬밥을 향한 사랑은 점점 더 커져서, 요즘은 평양냉면의 명가 우래옥을 가도 김치말이냉면을 시킨다. 우래옥의 이 메뉴는 냉면보다 육수가 고기국물 맛이 더 강하고 김치의 새콤한 맛과 참기름의 고소한 맛이 놀라운 균형을 이룬다. 국물 위로 보이는 메밀면 아래에는 이북식으로 찬밥을 깔아뒀다. 냉면이자 김치말이밥인 셈인데, 젓가락으로 먼저 면을 반쯤 건져 먹다가 숟가락으로 무기를 바꿔 밥과 면을 함께 떠 먹으면 된다. 폭포수 아래에 등을 대고 있다고 한들, 이보다 더 시원하고 개운할까? 차가운 육수에 말아 먹는 묵밥과 김치말이밥이 있어 올해 여름도 견딜 만할 것이다. – 손기은(<지큐 코리아> 피처 에디터)

    에디터
    피처 에디터 / 허윤선
    Illustration
    Kwak Myeong 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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