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몸'에 중심을 둔 문장들
수많은 소설가와 시인들이 여성의 곡선에 대해 써 내려갔다. 때로는 사춘기 소년의 달뜬 마음으로, 때로는 욕망에 가득 찬 시선으로. 또는 여성의 시선에서 담담하게 여자의 몸을 훑기도 한다. 찬미와 경배, 동시에 경멸의 대상이 되는 ‘몸’을 중심에 둔 문장들.
한스는 유난히 고운 노을을 보면서 정원을 거닐었다. 그는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은 채 엠마의 모습을 떠올렸다. 압착기 옆에 서 있던 모습, 과일즙이 담긴 잔을 건네주던 모습, 통 속으로 허리를 굽히고 있느라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머리카락과 옷깃 사이로 보이던 목덜미 등이 그의 마음을 떨리게 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만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 한스는 저녁 식사 시간에 자신이 완전히 변해버렸음을 깨달았다. –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당신은 목둘레가 둥글게 파인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고, 당신의 목 아래로 당신의 빗장뼈 한 쌍이 드러났습니다. 결재서류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던 나는 내 자리에서 일어서서 칸막이 너머로 당신을 바라보았습니다. 당신의 가슴의 융기가 시작되려는 그곳에서 당신의 빗장뼈는 당신의 가슴뼈에서 당신의 어깨뼈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빗장뼈 위로 드러난 당신의 푸른 정맥은 희미했고, 그리고 선명했습니다. 내 자리 칸막이 너머로 당신의 빗장뼈를 바라보면서 저는 저의 손으로 저의 빗장뼈를 더듬었지요. 그때, 당신의 몸을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몸속의 깊은 오지까지도 저의 눈에 보이는 듯했습니다. 여자인 당신, 당신의 깊은 몸속의 나라, 그 나라의 새벽 무렵에 당신의 체액에 젖는 노을빛 살들, 그 살들이 빚어내는 풋것의 시간들을 저는 생각했고, 그 나라의 경계 안으로 제 생각의 끄트머리를 들이밀 수 없었습니다. – <화장>, 김훈
걸음 앞으로 나가자 그녀는 훤한 창문을 통해 폴린느의 아름다운 옆 모습이 보여주는 눈부신 선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늘 한결같이 평온한 모습, 꿈을 꾸는 듯한 몽롱하고 큰 눈, 높이 솟았다기보다는 훤히 드러내진 것 같은 순결하고 반듯한 이마, 웃음을 잃은 것처럼 까칠해 보이는 입술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너무나 아름답고 예뻤다. 하지만 그녀는 마르고 모든 것이 창백해 보였다. 마치 긴 병을 앓고 난 사람 같았다. 처음에 이 오랜 친구는 그녀를 동정할 뻔했다. 그러나 열심히 뭔가에 몰두하고 있는 멜랑콜리한 이마가 풍기는 깊은 고요는 동정심보다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 – <폴린느>, 조르주 상드
나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한쪽 팔을 목덜미 뒤로 돌려 두 손을 맞잡고 팔꿈치를 벌린 채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었다. (…) 풀어헤친 노란 머리카락이 암사자의 갈기처럼 그녀의 등을 덮고 있다. 그녀는 몸을 구부리고 옆구리를 팽팽하게 한 채, 새틴처럼 부드러운 살갗 밑에 단단한 근육을 가진 여자 군인 같은 탄탄한 젖가슴과 탄력 있는 허리를 보여주었다. 섬세한 곡선이 어깨와 허리에서 가볍게 물결치고 팔꿈치에서 발끝까지 흘러내렸다. 뮈파는 너무나 부드러운 그 옆모습과 노란 불빛 속에 잠겨 있는 황금빛 육체, 촛불이 반사하는 실크 같은 굴곡을 바라보았다. – <나나>, 에밀 졸라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내맡길 때, 너는 세계와 같다. 내 거칠고 농부 같은 몸은 너를 파 들어가고 땅 밑에서 아들 하나 뛰어오르게 한다. (…) 그러나 이제 복수의 시간이 왔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벗은 몸, 이끼의, 갈망하는 단단한 밀크의 육체!그리고 네 젖가슴 잔들! 또 방심으로 가득 찬 네 눈!그리고 네 치골의 장미들! 또 느리고 슬픈 네 목소리! – <한 여자의 육체>, 파블로 네루다
그녀가 애인을 얻었나? 혹은 루블린 땅과 과일이 그녀의 내부 체액을 새롭게 만들어 혈기가 올라오도록 만들었나? 그녀는 머리 모양을 바꾸었다. 그녀의 머리는 매혹시킬 듯한 둥근 말꼬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또한 처음으로 화장하는 것을 배워 세련되면서도 절제된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과감하게 목이 파인 봄 드레스를 샀고, 그 속에는 전에는 입지 않았던 스타일의 속옷을 가끔 입기도 했다. 때때로 그들이 저녁 늦게, 식탁에 앉아 있을 때, 그녀가 복숭아 껍질을 벗겨 한 조각을 입으로 가져가서 씹기 전에 입술로 조심스럽게 음미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볼 때면, 요엘은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여자를 안다는 것>, 아모스 오즈
엄청나게 비만한 여인의 석상이었다. 허리를 빙 둘러 붙어 있는 늘어진 살덩이는 마치 두꺼운 솜포데기를 친친 감아 아기를 업고 있는 것 같았다. 돌확만한 젖가슴을 지탱하기 위해 몸은 앞으로 쏠렸는데 그것을 항아리처럼 보이는 뱃살과 대들보 굵기의 짧은 종아리가 안정되게 받쳐주고 있었다. 팔다리나 목과 허리 등은 구별이 있을 수 없었고 얼굴에는 물론 생김새라고 할 것이 없었다. 울퉁불퉁 제멋대로 굴려 만든 눈사람에 코끼리의 다리를 붙였다고나 할까. 그 여인의 이름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였다. –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은희경
날개 달린 신사 여러분! 내가 저세상에 가게 되더라도 그때의 그 모습, 스노와 엘핀스톤 사이의 콜로라도 휴양지에서 그녀가 보여준 그 모습을 그대로 되살리지 못하는 곳이라면 결단코 거부하겠습니다. 희고 헐렁한 남자용 반바지, 날씬한 허리, 살구빛 배, 가슴에 두른 하얀 스카프, 거기서 목으로 이어진 리본, 목덜미에서 살랑살랑 흔들리는 매듭, 훤히 드러난 숨막히게 어리고 귀여운 살구빛 어깨, 거기 돋아난 솜털,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어깨뼈, 아래로 내려갈수록 가늘어지는 매끄러운 등. (…) 바보, 바보, 바보! 그녀를 영화 필름에 담아둘 수도 있었는데!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내 고통과 고뇌의 영사실에 그녀를 불러낼 수 있으련만. – <롤리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나오코는 가운 속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 붙어 있는 것은 나비 모양의 머리핀뿐이었다. 가운을 벗은 그녀는 마루에 무릎을 댄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부드러운 달빛에 비친 그녀의 나체는, 갓 태어난 아기의 새로운 육체처럼 윤기 있게 빛나면서도 애처로웠다. 나오코가 몸을 조금 움직이면 – 그것이 그야말로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는데도 – 달빛을 받은 부분이 미묘하게 이동해, 몸을 물들이는 그림자의 형태가 달라졌다. 동글게 솟아 오른 젖가슴과 작은 유두, 움푹한 배꼽과 허리선, 그리고 음모가 빚어내는 거친 입자의 그림자가 마치 조용한 호수의 수면을 움직이는 파문처럼 그 모양을 바꿔가고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완전한 육체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 나오코의 육체는 너무도 아름답게 완성되어 있어서 성적인 흥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목욕을 마친 처녀가 가파른 계단을 천천히 내려온다. 날씬한 다리가 훤히 다 보인다. 세이지는 너무 눈이 부신 나머지 무심코 고개를 숙인다. 그녀는 움직일 때마다 달콤한 향기를 흩뿌린다. 물에 젖어 반지르르한 머리카락이 한창 흡인력을 더한다. 피부가 빛난다. 바로 조금 전까지 있었던 경계심이 조금씩 사라진다. 전연 딴 사람이다. 이 모든 것이 목욕을 한 때문이리라. – <언젠가 바다 깊은 곳으로>, 마루야마 겐지
내 몸 한가운데 불멸의 아귀, 그곳에 홍어가 산다. 극렬한 쾌락의 절정. 여체의 정점에 드리운 죽음의 냄새. 오랜 세월 미식가들은 탐닉해왔다. 홍어의 삭은 살점에서 피어나는 오묘한 냄새. 온 우주를 빨아들일 듯한 여인의 둔덕에 코를 박고 취하고 싶은 날. 홍어를 찾는 것은 아닐까. – <홍어>, 문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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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처 에디터 / 이마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