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너 상실의 시대
2015년의 시작은‘ 진상 고객’과‘ 갑질’ 논란으로 온통 시끄러웠다. 혹시 나도 그 진상 고객은 아닐까?
지난 연말연시는 유독 소란했다. 그 중심에는 ‘갑질모녀', ‘마카다미아 회항’이 있었고, 이 두 사건을 다룬 <그것이 알고 싶다>는 대중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서비스업 노동자는, 나아가 우리 모두는 자신의 과오와 상관없이 언제든 이 사회에서 ‘을’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공포에 가까웠다. 백화점의 VIP를 주장한 모녀는 사소한 오해로 대학생 아르바이트생들의 무릎을 꿇렸다. ‘누가 누구의 무릎을 꿇려도 되는가’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었다. “7백만원이나 쓰고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데!” 라고 절규하는 모녀의 목소리는 컸지만 누구도 그들의 말에 공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7만원이든, 7백만원이든 이들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지갑을 열었을 뿐이다. 그 사실이 다른 사람의 존엄을 해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런데 이 당연한 사실은 종종 길을 잃는다.
이후 패션, 호텔, 레스토랑 등 서비스 업계의 사람들을 만나며 ‘진상의 사례’를 수집해봤다. 세상은 넓고 진상은 많았다. 한 세계적 체인 호텔의 호텔리어는 ’진상’의 행태가 점점 교묘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마음에 안 들면 소리치고 면박을 주는 데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은 달라졌죠. 더 잔인하고 교묘하게 원하는 것을 얻어냅니다." 가장 낮은 등급의 객실을 예약한 뒤 기념일 등을 내세워 업그레이드를 요구하는 것은 흔하다. “객실 업그레이드는 상황에 맞춰 제공되는 것인데도 블로그에서 봤다며 왜 기념일인데 업그레이드를 해주지 않냐고 항의합니다. 어떤 고객은 일년에 몇 번이나 결혼기념일이죠.” 특히 호텔은 다른 손님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에 민감하기 때문에 손님의 요구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진상 고객들은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해친다. 아찔한 뷰를 자랑하는 수영장을 가진 싱가포르의 한 호텔. 이 수영장은 투숙객만 이용할 수 있는데 여행 카페 등에서 이 수영장 이용권을 몇 시간 단위로 판매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 호텔은 그 후 숙객 확인 과정을 강화했다. 사용하지도 않는 선베드와 카바나 등을 하루 종일 맡아두는 사람들 때문에 유료로 전환한 사례도 있다. “보통 호텔의 비즈니스 라운지는 연령 제한이 있습니다. 술도 있을뿐더러 휴식을 위한 공간이기 때문이죠. 분명히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 입장이 왜 안 되느냐고 화를 내는 고객도 있습니다." 하지만 호텔도 나름의 복수전을 준비하고 있다. 까다로운 요구, 객실 용품을 무단으로 가져가는 일들은 모두 투숙객 정보에 기입된다. 심한 경우 ‘블랙리스트’에 올라 투숙을 제한받는다. 즉, 호텔은 당신이 진상이라는 걸 알고 있다.
'백화점 진상 고객’은 더욱 빈번하다. “<개그콘서트>의 ‘정여사’ 코너를 보면서 웃을 수 있는 직원들은 없었을걸요? 개그니까 과장되었을 거라고요?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미 실컷 입고 사용한 물건을 바꿔달라고, 환불해달라고 하죠. 백화점에서는 고객 불만을 받기 싫으니, 빨리 해결하라고만 합니다. 그 손해는 결국 직원이 몫이 되죠.” 온라인 창구가 많아지고, 사람들이 불만을 쏟아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면서 고객의 힘이 더 강해졌다. 자신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불만을 쏟아내면 기업으로서는 대처하기가 힘들고, 이 모든 것은 직원 당사자의 스트레스로 남는다.
대한상공회의소가 2007년과 2011년 국내 300개 기업을 대상으로 진상 고객, 즉 ‘블랙 컨슈머’를 조사했을 때, 소비자들의 악성 불평과 행동을 경험했다고 응답한 비율은 39%에서 83%로 늘었다. 아르바이트 전문 구인구직 포털 업체인 알바몬이 알바생 9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알바생의 90%가 손님의 비매너에 상처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이 감정노동자들의 스트레스는 꽤 심해서, 일반 근로자보다 우울감을 느끼는 확률이 3배나 높다. 현재 서비스업은, 노동자들의 ‘감정’을 갈아 넣는 것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 매너 고객이 될 수 있을까? 잘못된 것에 날카로움을 보이는 것만큼, 잘하는 부분을 인정하는 고객이 되는 건 어떤가. 항의 편지는 넘쳐나지만, 잘한 것을 칭찬하는 칭송 편지에는 인색한 우리다. 칭찬까지는 무리더라도 자신이 이용하는 서비스의 형식과 규칙을 지키는 것 만으로도 진상이 될 확률은 낮아진다. 대부분의 진상은 안 되는 것을 되게하고, 상대방은 줄 생각도 없는 호의를 권리처럼 요구하는 데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또한 각자 자신이 가진 ‘상식’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상식’인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내게는 상식적이고, 이유가 있는 행동이 다른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아이의 기저귀를 가는 일은 인터넷 게시판 등에서 종종 공방이 벌어지는 주제 중 하나다. 부모 된 입장에서는 기저귀를 갈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없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공공장소 특히 식당에서 기저귀를 가는 행위로 자신의 식사 시간을 침해받았다고 여긴다. 식당 주인들은 기저귀를 버리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한탄한다. 카페에서 손톱을 깎거나 매니큐어를 바르는 건 어떤가? 모두 주변에서 쉽게 일어나는 일이다. <매너 사전>이라는 책이 인기를 끈 시절이 있었다. 사람들은 교양인이 되기 위해 매너를 공부했다.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지만, 점점 사회구성원을 위한 존중과 예의는 잃고 있다.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 유치원에서 배운 이 사회의 규칙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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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허윤선
- 포토그래퍼
- 정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