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쏟아지는 책 그리고 영화 <1>

첫눈을 기다리며 눈이 시릴 만큼 하얀 눈이 쏟아지는 책과 영화를 골랐다. 어쩌면 우리의 진짜 겨울은 이 책의 페이지에서부터, 이 영화의 한 장면에서부터 시작될지도 모르겠다.

1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소설의 고전. ‘허를 찌르는 트릭’의 원조. 하지만 이 세상 어딘가에는 여전히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었어?! 그걸 말하면 어떡해!”라며 울먹이는 사람들이 존재하므로 범인의 정체는 함구하기로 한다. 이 작품에서 눈은 살인사건을 좀 더 극적으로 포장하고, 독자의 주위를 흐트러뜨리며, 이 초호화 유럽횡단열차 속 시간을 바깥 세상과는 다른 속도로 흘러가게 만든다. 인간적인 연민과 호소와 용서가 소리 없이 이루어질 시간을 벌어주기도 한다. 무슨 소리냐고? 읽어보면 안다. – 신윤영(<젠틀맨> 피처 디렉터)

2 <눈길> 이청준 눈이 많이 내린 겨울날 가난 때문에 오랫동안 살던 집을 떠나야 하는 어머니와 아들의 하룻밤 동안의 이야기. 아들을 버스에 태우고 돌아가던  눈길에는 아들과 함께 걸어온 발자국이 선명하고, 눈이 부시어 마을로 바로 돌아갈 수 없었던 어머니의 사연을 뒤늦게 듣게 되면서 슬픔과 사랑이 뒤섞인다. – 짙은(뮤지션)

3 <바람이 분다 가라> 한강 겨울로 시작해서 겨울로 끝나는 소설. 희고 차가운 눈처럼 정결한 한강의 문장이 가슴에 내려와 녹아내린다. 친구의 죽음을 추적하는 나의 궤적은 눈 위에 고스란히 새겨졌다가 새로 내리는 눈으로 이내 덮이고 만다. 섬세하게 직조된 이야기와 풍경은 책을 덮고 난 뒤에도 쉽사리 잊히지 않으며, 오랫동안 잔상으로 남는다. 덧없이 녹아내리지만 황홀하게 아름다운 풍경을 일시적으로 만들어주는 눈처럼. – 한유주(소설가)

4 <눈 이야기> 김도연 어떤 주제에 관한 이야기는, 그것이 작자의 생(生)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때 거대한 힘을 지닌다. 그렇기에 산문집 <눈 이야기>를 읽으면 절로 흐뭇한 설득을 당하는 느낌이랄까. 겨울이, 폭설이 지니는 힘을 사랑하면서 자 연 속에서 호젓한 평화로움을 지향하며 살아가는 작가가 띄우는 79편의 엽서가 책 속에 소복이 쌓여 있다. 눈이 그리울 때마다 한 편씩 들춰보게 되는 매력을 지닌 이 책은, 눈의 계절이 도래한 지금,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하면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릴 책이다. – 유지수(뮤지션, 참깨와 솜사탕)

5 <마지막 한 해> 문숙 요즘 관객에게 문숙이라는 이름은 낯설 것이다. 그는 <삼각의 함정>, <태양 닮은 소녀> 등 이만희 감독의 작품에 출연하다가 이만희 감독이 세상을 떠나자 돌연 미국으로 떠난 여배우다. <마지막 한 해>는 이만희 감독과 함께한 시간들을 쓴 책이다. ‘그 남자’와 얼마나 사랑했으며, 1970년대 충무로에서 ‘그 남자’와 함께 어떻게 작업했는지 등 문숙의 고백은 정말 뜨겁고, 순수하며, 낭만적이다. <삼포 가는 길>을 감상한 뒤 책을 읽으면 되겠다. – 김성훈(<씨네21> 기자)

6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추리소설처럼 보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사랑, 스릴러, 문명에 대한 비판 등 형형색색의 눈송이들이 담겨 있다. 그것은 흡사 눈의 결정과도 같다. 여기서 볼 때와 저기서 볼 때가 다른. 아침에 볼 때와 저녁에 볼 때가 다른. 그사이 눈은 조금 녹았을 것이다. 우리의 감각도 조금은 달라졌을 것이다. 눈발이 마구 쏟아지는 책을 읽었는데,책을 덮으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차가운  것을 만졌을 때, “앗 뜨거워!”라고 외치는 순간처럼. – 오은(시인)

<러시아 통신> 요네하라 마리 요네하라 마리가 통역가로 일하며 경험한 러시아의 풍속을 풀어내는 이 책은 ‘보드카 통신’으로 제목을 바꿔도 무방하다. “시베리아에서 400km는 거리도 아니다. 섭씨 영하 40도는 추위도 아니다. 그리고 보드 카 4병은 술도 아니다.” 서늘한 구소련 시대, 혹독한 추위 속에 얼지 않는 독주와 뚝심 좋은 술꾼들에 얽힌 호쾌한 스케일의 유머는 맑은 술 한 잔과 함께 겨울밤을 덥히기에 좋다. – 황선우( 피처 디렉터)

8 <러브레터> 이와이 슌지 영화로 더욱 유명한 이와이 슌지의 작품으로 그가 월간지에 연재하던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있을 첫사랑을 추억하게 되는 그런 소설이며 주 배경이 겨울인 탓에 눈 쌓일 때면 가끔 생각나곤 한다. 영화와 소설이 원작자가 같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두 매체 사이의 특별한 괴리감이 느껴지진 않는다. 오히려 소설은 이야기로, 영화는 영상으로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어 같이 보면 더 좋을 것 같은 작품이다. – 센티멘탈 시너리(뮤지션)

9 <서울, 1964년 겨울> 김승옥 어떤 사람에게 겨울 밤은 차디찬 죽음과 같다. 겨울이 삶을 얼마나 잔인하게 발가벗기는지에 관한 가장 지독한 소설을 고르라면, 김승옥의 단편 <서울, 1964년 겨울>일 것이다. 서울, 1964년, 겨울, 세 사내가 거리의 선술집에서 우연히 만난다. 스물다섯 먹은 나와 대학원생 안 씨, 가난뱅이가 분명한 서른 대여섯 먹은 남자. 그 세 명이 보낸 가장  끔찍하고도 무심한 밤이 20페이지 안에 밀도 높게 펼쳐진다. 마지막 문장까지 다 읽고 나면 우유 사러 거리에 나가기조차 싫어진다. – 나지언(프리랜스 에디터)

10 <구관조 씻기기> 황인찬 이 시집엔 하나하나 꺼내어볼 수 있을 만큼 수많은 계절이 고여 있지만 어쩐지 모두 겨울로 모인다고 느낀다. 모여서는 사라지려 한다고 또한 느낀다. 남은 것은 수백 가지의 흰색. 눈이기도, 백자이기도, 햇볕이 닿는 벽이기도 한 것들. 그래서 끝내 어둠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것들. ‘겨울은 낮에도 어두웠다’, ‘낮에도 겨울은 어두웠다’ 시인은 말을 앞뒤로 바꿔놓으며 두 번 반복해서 쓴다. 두고두고 마음에 비치는, 희디흰 겨울의 두 문장이다. – 장우철( 피처 디렉터)

11 <너 혼자 올 수 있니> 이석주 스물여덟이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사진작가고 이석주의 유고집이다.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홀로 겨울 홋카이도, 아키타로 떠나 겨울을 담았고 이 책을 완성했다. 삶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계절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의 건강을 기원했었다. 지금은 그의 안식을 기원해본다. – 홍재목(뮤지션, 파니핑크)

12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이제하 3년 전에 죽은 아내의 뼈를 뿌리러 속초행 버스를 탄 ‘그’를 눈은 마치 그림자처럼 따라 다닌다. 어느 때에는 회오리처럼, 어느 때에는 강풍과 함께 그의 몸과 마음을 ‘옴짝없이’ 가둬버린다. 책을 보는 내내 눈이 닿는 한 온통 그것뿐인 듯한 산과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고, 덕분에 책을 펼치면 그 어떤 계절이라도 나는 그와 함께 눈길을 걸을 수 있었다. 그 길은 늘 뭔가에 가려진 듯 아득하고 고요했고 아무리 걸어도 제자리걸음인 양 저만치 물러나 있었다. 표지에 올린 길을 걷는 나그네 그림은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화가인 이제하가 직접 그린 것이다. – 조소영(<얼루어> 피처 에디터)

13 <탐정은 어디에> 오수완 네 편의 중편을 묶은 옴니버스식 소설이다. 각각의 편은 ‘탐정은 어디에’라는 책을 찾는 내용이다. 추리소설이라면 범인이 누구인지를 찾아야 할 텐데, 소설은 ‘탐정이 어디 있는지’를 찾는다. 추리소설에 대한 추리소설이라는 소재는 오수완 작가의 전 작품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에서부터 반복되어왔다. 소설은 복잡한 구조를 천천히 드러내다가 마지막 챕터의 마지막 순간에 도착하면서 전체를 내놓는다. 마지막 독자를 압도할 이미지로 눈 덮인 시골 마을을
택한다. 주인공은 세상이 온통 새하얀 그곳에서 소설의 구조를 파악하려 애쓴다. – 김이환(소설가)

14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박정대 박정대의 시는 낭만적이다. 시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박정대는 잘생겼다. 이 시집에 이르러서는 박정대가 시를 그만 써도 될 거 같다는 생각까지 했다. 눈처럼 녹아서 사라져도 괜찮다고.시인으로서, 한 명의 작가로서 이 정도의 시를 써냈다면 더 시를 쓰는 게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모국어로 쓰인 시 중에, 눈과 청춘에 관해 이보다 아름다운 시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 어떤 시도 이 시의 흐릿한 풍경을 대변하지 못한다. 게다가 나는 내 추운 시절을 이 시를 통해 위로받기까지 했다. – 이우성(<아레나옴므플러스> 피처 에디터)

    에디터
    피처 에디터 / 조소영
    포토그래퍼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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