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차를 향해 달려라
<맨 오브 라만차>가 돌아왔다. 2005년 국내 초연 이후, 여섯 번째 <맨 오브 라만차>다. 새로운 공연과 해외 대작들이 끊이지 않는 한국 뮤지컬 시장에서 <맨 오브 라만차>는 나날이 관객수가 늘어나는 묘한 작품이다. 2012년에는 10월 7일까지였던 공연기간을 12월 31일까지 연장했을 정도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고는 하지만 원작 <돈키호테>가 국내에서 대중적인 소설이 아니라는 점, 최신 무대 기술이나 스타 음악감독이 부재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흥행은 한층 고무적이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는 감옥으로 끌려온 시인 세르반테스가 자신을 변론하기 위해 희곡 <돈키호테>를 공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갑옷을 입고, 하얗게 센 머리와 수염을 붙이는 순간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가 된다. 주인공 돈키호테와 세르반테스의 1인 2역을 맡은 두 배우는 다름아닌 정성화와 조승우다. 늘 신중한 행보를 보이면서도, 뮤지컬계의 중심부를 한 번도 떠나지 않은 톱 스타들이다. 게다가 2007년에 이미 돈키호테 역에 더블 캐스팅됐던 두 배우의 해후이기에 각기 다른 두 매력의 돈키호테 중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될 정도! 그런 의미에서 지난 11월 19일 열린 프레스콜 공연은 두 배우를 동시에 비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였다. 두 돈키호테가 한 무대에 번갈아 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까.
조승우는 <맨 오브 라만차>를 가리켜 ‘내 인생을 바꾼 뮤지컬’이라고 말한다. 불과 28세였던 2007년, 백발이 성성한 기사를 연기했던 그가 6년 만에 연기하는 돈키호테는 젊은 열정으로 가득한 순수한 노인 그 자체다. 타고난 부드러운 목소리에 덧입혀진 중후함은 드라마에 금세 몰입하게 하는 요소다. 고조된 감정을 노래로 터뜨리는 뮤지컬 연기는 일반 연극과 조금 다른데, 뮤지컬식 발성이 낯선 관객에게 조승우의 연기는 좀 더 편안하게 다가온다. 정성화에게도 <맨 오브 라만차>는 의미가 깊다. 2007년, 산초 역을 거절하고 오디션을 통해 직접 돈키호테 자리를 얻어낸 것은 뮤지컬계의 유명한 일화다. <레 미제라블>로 각종 국내 뮤지컬 시상식의 남우주연상을 휩쓴 직후, 그가 택한 것은 다시 <맨 오브 라만차>, 그에게는 네 번째 무대다. 풍부한 성량으로 대사와 노래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가는 정성화는 무대에서 큰 존재감을 남긴다. 충직한 하인, 산초 역할을 맡은 두 배우의 체구가 극단적으로 다르다는 점도 눈에 띈다. 정진훈은 작고, 이훈진은 크다. 누가 어떤 돈키호테 옆에 서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돈키호테-산초 콤비의 화학작용을 지켜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자신이 정의로운 기사라고 믿는 돈키호테. 그에게 풍차는 괴물이고, 낡은 여관은 성이며, 하녀 알돈자는 고귀한 레이디 돌시네아다. 충직한 산초조차 그가 ‘살짝 맛이 갔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결국 ‘주인님이 좋으니까’라고 노래하는 것처럼 무대 위의 돈키호테를 바라보는 관객도 결국에는 그의 무모함을 응원하게 된다. 사회적 피로감이 극에 달하고 무기력이 일상이 되는 시대. <맨 오브 라만차>는 ‘열정’이라는 말을 오랜만에 떠오르게 하는 뮤지컬이다. 여기에 안정감과 스타성을 담보한 두 배우가 무대에 오른다. 몇 번이고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공연은 2월 9일까지. 충무아트홀 대극장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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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처 에디터 / 이마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