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혁을 보았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그의 몸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어떤 질문에도 그는 온전히 자신을 보여주려고 했다. 더할 것도, 그럴 필요도 없다는 건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장혁을 보며 테이블에 놓인 게 커피가 아니라 맥주라면, 녹음기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깊은 여름밤이었다.
하루 종일 비가 오더니 이제야 멈췄네요. 이런 날씨 어때요?
비 오는 거 좋아해요. 정확하게 말하면 빗소리를 듣는 게 좋아요. 야외 촬 영이라 걱정했는데 다행히 비가 그쳤네요.
촬영할 때 보니 살이 많이 빠진 것 같더라고요.
몸무게는 그대로인데 얼굴 살이 많이 빠졌어요. 복싱을 하고 있는데 복싱장에 다녀오면 하루에 1킬로그램씩 빠져 있어요. 3분 뛰고, 30초 쉬는 걸 3시간 동안 하거든요. 격한 유산소 운동이라 할 수 있죠. 다녀오면 많이 먹고 다시 운동하고 그게 반복되니까 몸무게가 유지돼요.
운동을 꾸준히, 다양하게 하고 있죠?
자전거도 타고 승마도 하고 절권도도 하고 가끔 골프도 쳐요. 운동은 어릴 적부터 좋아했어요. 연기를 위해서 운동을 하는 건 아니지만 연관되는 지점이 있어요. 연기를 하려면 다른 사람을 관찰하고 같이 호흡해야 하는데 운동도 상대방을 보고 몸을 부딪쳐야 하잖아요. 서로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어요.
곧 영화 <감기>가 개봉해요. <영어 완전 정복> 이후 정확히 10년 만에 김성수 감독을 만났겠네요.
<영어 완전 정복>은 감독님한테 속아서 하게 된 작품이예요.< 비트>, <태양은 없다> 등 감독님의 전작을 좋아해서 시나리오도 안 보고 한다고 했어요. 제목을 듣고 영어권 나라에서 촬영하는 누아르 영화인 줄 알았는데 진짜 영어를 정복하는 이야기더라고요. ‘어? 어?’ 이러는데 이미 촬영이 시작된 거죠. 하하. 감독님이 속인 게 아니라 제가 감독님의 이미지에 속은 거죠. 덕분에 재미있는 작품을 하게 되었고요.
이번에는 확실히 시나리오를 읽고 결정한 거죠?
감독님의 복귀작이라는 점에서 아무래도 다른 시나리오보다 좀 더 관심이 갔죠. 재난영화이고, 캐릭터도 구조대원이고 해서 영웅을 만드는 이야기일 거라 예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영웅이 아닌, 재난 상황에 빠져 있는 인간 군상을 다루고 있더라고요. 그 부분에서 매력을 느꼈고 감독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죠. 긴 공백 기간이 있었던 만큼 굉장히 열정적이었어요. 배우가 뛰면 같이 뛰면서 호흡을 맞춰주셨어요.
감독과 당신이 생각하는 구조대원 ‘지구’의 모습은 어떤 게 같고 또 달랐나요?
어떤 캐릭터를 잡을지 이야기하다가 ‘원래의 너를 보여달라’고 말씀하시 더라고요. 작품에 들어가면 전체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캐릭터를 이해한 후에는 어떻게 설득력 있게 표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데, 대뜸 저를 보여달라고 하니까 좀 헷갈렸었죠. 나의 어떤 부분을 보여줘야 하냐고 물으니 긍정적이고 감성적인 부분, 아니다 싶은 건 그냥 못 지나가는 부 분을 지구의 캐릭터에 넣으라 하더라고요.
이번 영화를 위해 구조대원과 함께 생활하고 훈련을 받았다고 들었어요. 어떤 경험이었나요?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굉장히 인간적인 모습을 보게 되었어요. 직업에는 선입견이라는 게 있잖아요. 의사, 선생님, 구조대원 등 각 직업을 들었을 때 떠오르는 정형화된 이미지라는 게 있는데 같이 지내다 보니 구조대원이 아니라 사람이 보이더라고요. 그들의 이런저런 모습을 보면서 구조대원으로서 지구가 하는 대사가 좀 바뀌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감독님에게도 제안을 했죠.
예를 들면 어떤 대사가 있을까요?
지구가 쉬는 날 사건이 터졌어요. 힘들게 일했고 쉬어야 하는 날인데 하필 사고가 생긴 거죠. 지구가 사고 현장으로 가서 “저는 남들이 나올 때 들어가야해요. 저는 구조대원이니까요”라고 말하 는 대사가 있었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네요”라는 대사로 바뀌었어요. 옆에 있던 ‘인해’라는 의사가 “지구 씨가 구조대원인 거 아무도 몰라요”라고하면 지구가 “나는 알잖아요”라고 말하는 거죠. 좀 더 현실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대사로 바뀌게 된 거죠.
<감기>는 쏟아지는 재난 영화들과 어떤 게 좀 다를까요?
편집본을 보니까 많이 차갑더라고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호흡기에 의한 감염을 다루거든요. 이기적인 사람이 대부분이고 극소수의 이타적인 사람들이 그 차가움 속에 인간미를 조금씩 불어 넣게 되요. <감기>는 괴물이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공포가 아니에요. 어느 날 평범한 일상이 무너지는 걸 보여줘야 했고,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우리는 과연 준비가 되어 있나를 보여주려 했죠. 허황된 공포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에게 벌어 질 수 있는 일을 현실적으로 다뤄요.< 딥임팩트>, <아마겟돈>이 아닌 <컨테이전>의 느낌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죠.
영화를 위해 엄청난 규모의 수용캠프가 만들어졌죠. 그 안에 200~300명의 보조출연자가 들어가 있었으니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을 것 같아요.
영화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실제로 촬영장에도 만들어졌어요. 바람 하나 통하지 않는 수용캠프 안에 수백 명이 갇혀 있었어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땀이 뻘뻘 날 정도였어요. 게다가 마스크를 끼고 대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 어려움이 있었어요.
감독이 한 번 더 촬영하고 싶을 때는 당신에게 다가가 슬며시 어깨에 손을 올렸다죠?
감독은 배우의 연기를 보는 첫 번째 관객이에요.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면 그를 설득시켰다는 뜻이죠. 한 번 더 찍고 싶을 때는 어깨동무를 하고 ‘한 번 더 가자’고 말씀하셨어요. 감독님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뜻이니 그 때부터 또 고민을 하게 되는 거죠. 폭염보다 그게 더 무서웠어요. 하하.
함께한 유해진, 마동석이 워낙 주당으로 유명한 분들이라 회식도 잦았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촬영장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많다 보니 속에 있는 이야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많이 친해졌어요. 술자리도 많았는데 거의 근처 편의점 테라스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는 식이었죠.
위험한 장면이 많아 긴장과 집중이 특히 필요했을 것 같아요.
구조하는 장면을 위해 소방학교로 가서 예비소방대원들과 일주일 정도 교육을 받았어요. 맨홀 안으로 들어가면 빛이 조금씩 사라지면서 어느 순간부터 한 치 앞에 있는 것도 보이지 않아요. 소리와 사인으로만 앞으로 나아가는 게 굉장한 경험이었죠. 넓은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정말 좁은 공간이더라고요.
심지어 전봇대 위에도 올라갔다고요?
전봇대를 타고 20m 올라가면 전봇대가 흔들려요. 그 좁은 면적 위에서 점프를 해서 2m 앞에 있는 그네를 잡아야 하는 훈련도 있었죠. 그 외에도 암벽 등반, 레펠과 같은 훈련으로 실제로 벌어질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한 교육을 받았어요.
영화 개봉을 앞두고 있어요. 연기 15년 차가 되면 긴장의 강도가 덜해지나요?
저는 늘 긴장해요. 영화를 찍기 전에도, 선택하고 촬영장에 들어갈 때도요. 영화나 드라마의 경험이쌓여가다 보니 시스템에 대해서는 익숙해지는 부분이 있는데 결코 익숙 해지지 않는 게 있어요. 바로 작품 전체의 이야기와 구성, 나의 캐릭터를 어떻게 이해하고, 표현해야 하느냐에 대한 문제예요. 작품도 캐릭터도 매번 완전히 바뀌니까요. 저의 캐릭터를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건 온전히 저의 몫이잖아요.
연기의 의미가 예전에는 하나였어요. 나의 시간을 기록하는‘ 기록성’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죠. 이제는 ‘타인에 대한 이해’라는 영역이 생겼어요.
<진짜 사나이> 출연이 화제가 되었죠? 특별출연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라서 좀 의외였어요.
나이 서른에 갑작스럽게 군대에 가게 되었잖아요. 50명 이상의 중대원들과 생활하고 자유 시간은 고작 2~3시간 정도이다 보니 제 자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집도 없고 보이는 건 죄다 산뿐이었어요. 그 안에서 적응해가면서 동료들과 유대관계도 쌓고, 밖에 있는 사람들을 그리워하기도 했죠. 예전에는 두 손으로 툭툭 치면서 앞으로 갔다면 군대를 다녀온 후로 꽉 잡고 가는 접지력이 생겼어요. 나이가 들면서는 그 접지력이 좀 더 추상적인 느낌으로 바뀌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요? 군대에 대한 느낌이 남다른 편인데 <진짜 사나이>를 하면서 그때 생각이 많이 났어요. 다시 그 시간과 상황을 만들어본다면 또 새로운 방식의 접지력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고요.
유격왕이 되어 빨간 모자도 쓰고, 투입되자마자 선전하더군요.
프로그램 특성상 한곳에서 훈련을 받고 또 다른 곳으로 옮기잖아요. 새로운 곳에 갈 때마다 항상 제가 있어요. 군 시절과 겹치는 그림과 상황들이요. 그때의 저를 떠올릴 수 있어서 좋아요. 나이가 들수록 이성적으로 행동하게 되잖아요. 낯선 것, 낯선 사람에 대해 거리를 두고 마음이 닫히기 쉬운데 그곳은 활짝 열려 있더라고요. 힘든 시간을 함께한 만큼 사람들과도 더 돈독해지고요. 친해졌다 싶을 때는 또 떠나야 하니 뭉클하게 올라오는 감정들이 있죠.
<화신>, <진짜 사나이> 등 예능에서도 그렇고 <감기> 기자회견에서도 그렇고 원래 그렇게 재미있었나요, 아님 근래에 유머가 는 건가요?
원래 없지는 않았는데, 나이가 들고 여유가 생기면서 많이 는 것 같아요 . 예전에는 더 진지했어요. 그랬던 시기이니까요. 그 시기에 맞는 정서가 있는 것 같아요. 진지할 땐 진지하지만 놀 때는 제대로 놀아요. 어디서든 그 분위기를 잘 타자는 생각이 있어요.
여유가 생겼다는 거, 당신이 좀 바뀌었다는 걸 특히 실감하게 될 때 는 언제인가요?
예전에는 현장에서 정말 전투적이었어요. 지금은 그 안에서의 즐거움을 찾아요. 일하면서도 즐길 수 있는 부분을 찾는 거죠. 예전에는 혼자 생각하고 분석하는 게 좋았다면 요즘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아요. 말하는 걸 좋아했다면 점점 더 듣는 게 재미있어지고 있어요. 그래도 말하는 건 여전히 좋고요.
꾸준히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차태현, 홍경민, 홍경인, 김종국 같은 동갑 친구들도 있고, 선배로는 유해진, 손현주, 성동일, 정우성 형을 자주 봐요. 만나서 그냥 어떻게 지내는지, 서로 사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형들은 저보다 앞서서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아, 저 시기에는 저런 생각을 하는구나, 하면서 이야기를 듣고 친구들과는 같이 공유하는 것들을 나누죠.
당신만의 영역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어요.
배우 중에 에단 호크를 좋아해요. 그는 도시에 사는 시인 같아요. 담백하면서도 비뚤어진 시선이 있어요. 계획적이지 않은 느낌이요. 많은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자유로운 걸 좋아하고 저 역시 계획하고 움직이는 편이 아니에요. 배우이기 때문에 대중이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상업적인 어떤 부분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지만 나만의 어떤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고 싶어요. 앞으로 그 균형을 맞춰나가는 게 중요하겠죠.
배우로 사는 것에 만족하나요? 시작하던 때와 달라진 것도 있겠죠?
예전에는 연기를 하는 이유가 하나였어요. 나의 시간을 기록하는 ‘기록성’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죠. 그 시간, 그 순간의 내가 이랬구나, 이런 걸 좋아했구나, 하고 나를 다시 들여다보고 나의 시간을 축적하는 기록적인 의미가 컸어요. 이제는 ‘타인에 대한 이해’라는 영역이 생겼어요 .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을 궁금해하고 이해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커졌어요. 어느 순간부터 사람을 만나면 내가 아닌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돼요.
요즘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지는 않죠?
제가 부산에서 자랐는데 어릴 때는 부산에서 김해공항까지 걸어갔어요. 서너 시간 정도 걸리는데 낙동강을 따라 그냥 걷는 거예요. 그러고는 김해공항에 가서 콜라와 햄버거를 먹으며 비행기가 날아가는 걸 보는 거예요. 그 느낌이 괜히 좋더라고요.
도시의 시인은 에단 호크가 아니라 당신인 것 같은데요?
한창 감수성이 풍부한 시절이었죠. 부산이 참 좋았던 게 부전역에서 비둘기호를 타면 남해로 가서 돌아오는 해변 열차길이 있었어요. 혼자 그 기차를 타고 가서, 남해에 내려서 둘러보기도 하고 그랬죠. 예전에 비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이 줄긴 했어요. 그래도 한 달에 한두 번 근처 가게에 DVD를 사러 가는데 그때 유난히 발걸음이 빨라져요. 신작의 경우는 시놉시스를 보고 좋았던 작품을 사기도 하고, 살까 말까 고민하던 건 좀 싸게 나왔다 싶을 때 사요. 그러고는 맥주 한두 캔 마시며 영화 보는 거죠.
그게 무엇이든 욕심을 내는 것들에는 어떤 게 있나요?
아직 해보고 싶은 역할이 많아요.< 여명의 눈동자>가 다시 만들어진다면 최대치 역할을 하고 싶어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져서 어쩔 수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 시간이 멈춰 있는 사람, 자신은 멈춰 있는데 시간이 흐르니 떠밀리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죠. 마지막에 사랑하는 여자의 시신을 안고 죽어요. 이제 쉬고 싶다면서요.< 추노>의 이대길의 캐릭터도 최대치와 비슷한 부분이 있어서 매력을 느꼈어요.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장애를 가진 사람이나 지독한 악역도 해보고 싶어요.
결혼이 많은 것을 바꾸었겠죠?
다른 시선이 생겼어요.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게 되니 부모님을 바라 보는 시선도 바뀌고, 아이들을 보는 시선도 바뀌었어요. 무엇보다 착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얼마 전에 아들 재현이와 자전거를 타러 한강에 갔는데 정말 좋더라고요. 한강은 항상 혼자서 자전거를 타는 공간이었는데 그 안에 아들이 들어와 있으니 신기하기도 하고요. 자전거를 타고 제 뒤를 따라오는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웠어요.
당신에게 어떤 걸 기대해도 좋을까요?
이성적으로 연기하고 싶지 않아요. 오래 하다 보면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부분이 어쩔 수 없이 생길 수도 있지만, 작은 것 하나도 고민하고 진심으로 대하는 건 끝까지 가져가고 싶어요. 촬영 현장을 좋아하고 그곳에 오래 있을 것 같아요. 절대 건조해지는 일은 없을 거예요.
작은 것 하나도 고민하고 진심으로 대하는 건 끝까지 가져가고 싶어요. 촬영 현장을 좋아하고 그곳에 오래 있을 것 같아요. 절대 건조해지는 일은 없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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