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민과 스위스를 누볐다
영화 <플랜맨>의 크랭크인을 앞둔 한지민이 스위스로 잠시 휴가를 떠났다. 스위스 친선대사를 일컫는 ‘Swiss Friends’라는 이름으로 그뤼에르, 체르마트, 고르너그라트, 베른 등 스위스 곳곳을 여행하는 그녀를 따라갔다. 평온한 자연과 중세 시대를 그대로 간직한 도시를 찾아가는 길은 아름다웠고, 그보다 더 좋은 건 한지민은 함께 여행하기에 완벽한, 아주 좋은 친구였다는 것이다.
유럽의 많은 도시가 그렇긴 하지만, 베른은 절대적으로 ‘시간이 멈춘 도시’다. 이것은 스위스 사람 특유의 자부심과 정직함, 까다로움과 영리함이 만들어낸 결과다. 중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베른의 옛 마을은 트램을 제외한 차량은 거의 금지되어 있다. “스위스는 차가 다니지 않는 길이 많다는 게 가장 좋은 것 같아요.” 오래되어 반질반질해진 돌바닥을 걸으며 그녀가 말했다. “여기 교차로에 혼자 서라는 말이죠? 왜 여배우는 항상 혼자여야 할까요?”
숲과 들판, 눈 덮인 산을 떠나 도착한 베른. 에메랄드색 강이 도도하게 흐르는 베른은, 조금만 높은 곳에 오르면 붉은 갈색으로 바랜 지붕으로 덮인 도시를 볼 수 있다. 그 어떤 유럽보다 맑고 푸른 에메랄드 빛을 가진 아레(Aare) 강 위로는 크고 작은 다리가 이어지는 풍경. “정말 예뻐요.”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다. 이곳에서 잠시 자유로움을 누렸으면 했다. 거리의 악사의 기타 연주를 들으며 기타를 치는 흉내를 내고, 스위스가 자랑하는 맥주와 화이트와인을 곁들인 저녁을 먹고, 청춘들을 지켜봤다. 베른의 알레그로 호텔 로비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한지민은 유독 평화로워 보였다.
바다만큼 넓은 레만 호수의 풍경을 볼 수 있는 몽트뢰(Montreux)까지 드라이브를 즐긴 후, 알프스의 상징 중 하나인 체르마트(Zermatt)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체르마트의 상징은 그 유명한 봉우리, 4478m에 달하는 마터호른(Matterhorn)이다. 좁은 골목으로 이루어진 체르마트 마을은 골목마다 오래된 마을과 교회, 예쁜 카페와 레스토랑, 호텔을 찾을 수 있다. 성수기인 겨울 스키 시즌에는 이 골목에서 할리우드 스타들을 만날 수 있다. 스위스의 날씨는 이상 기온으로 계속 흐렸지만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날씨가 아주 좋아져 구름에 가려 있기 마련인 마터호른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스위스 사람들은 아름다운 여배우가 이곳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미소 짓곤 했다.
우여곡절 끝에 스위스의 작은 마을 그뤼에르(Gruyeres)에서 한지민을 따라잡았다. “안녕하세요! 짐 아직 못 찾았다면서요?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빌려드릴게요.” 하루 전 스위스에 도착한 그녀가 상냥하게 말했다. 스태프의 짐 몇 개가 공항에서 분실되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내 것이었던 것이다. 그러곤 함께 전통 방식으로 치즈를 만드는 공방으로 향했다. ‘그뤼에르 치즈’로 유명한 바로 그 그뤼에르는 촉촉한 산 안개에 젖어 있었다. 제페토 할아버지를 닮은 치즈 장인은 말릴 새도 없이 그녀에게 앞치마를 둘러줬고, 바로 치즈를 만드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여행을 하면서 수도 없이 본 모습이지만 여기서 알게 된 건 두 가지였다. 그녀는 소탈하고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라는 것. 적어도 여행할 때만큼은 그냥 지켜보는 것보다 해보는 걸 좋아하는 모험가이며 행동가였다. 그리고 매우 훌륭한 영어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 할아버지와 함께 ‘치즈 심층 대화’를 이어가며 커다란 솥에서 몽글몽글하게 응고되고 있는 치즈를 몇 번이나 건져냈다. 그녀가 건져 올린 치즈는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치즈의 나라에 왔으니 퐁듀를 먹지 않을 수 없다. 퐁듀와 라클레트로 유명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물론 치즈는 어마어마한 칼로리를 가지고 있기에 걱정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다이어트를 걱정하는 여배우는 거기 없었다. 우리는 함께 엄청난 양의 ‘진짜 스위스 치즈’를 먹고 그뤼에르 마을을 걸었다. 13세기에 지은 고성 속엔 작은 정원이 숨어 있고, 고성 밖으로는 뭉게구름 같은 언덕이 이어져 있는 작은 마을.
스위스 여행의 키워드는 많지만, 그중에서 가장 절대적인 것을 말하라면 기차 그리고 하이킹이다. 스위스 열차(SBB)는 세계적 공업국가의 면모를 자랑하듯 스위스 전역을 철도로 섬세하게 이어주고, 알프스와 같은 자연은 자연대로, 중세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한 도시는 도시대로 걷는 재미가 있다. 한지민과 스태프들이 고도가 높은 체르마트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룻밤을 묵은 뒤, 다시 산악 기차를 타고 마터호른을 가까이에서볼 수 있는 고르너그라트(Gornergrat)에 올랐다. 이곳의 고도는 무려 3112m! 한지민이 말했다.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는지 정말 몰랐어요. 와, 공기가 정말 달아요!” 고도가 워낙 높은 이곳은 일주일 전에도 눈이 20cm나 내렸다. 아무도 밟지 않은 순결한 눈이 소복이 쌓인 절경. 하늘에서는 태양이 내리쬐고, 눈은 그 빛을 온통 반사했지만 그녀는 모자도 , 선글라스도 찾지 않은 채 마음껏 공기를 들이마시고, 수의사를 연기한 경험을 되살려 덩치 큰 세인트버나드를 쓰다듬기도 했다. 이곳에는 마터호른을 전망할 수 있는 마을이 산을 따라 이어져 있는데, 고르너그라트는 설경이 멋진 곳이고, 초원이 펼쳐져 있는 푸리(Furi)는 얼굴은 까맣고 몸은 하얀 털로 뒤덮인 이 지역의 양떼가 낮잠을 자는 평화로운 곳이다“정.말 걸어 내려가도 좋을 것 같은데요. 하이킹하기 좋은 길이에요.”
스위스에서도 엄격한 환경보호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체르마트. 마을에 존재하는 모든 차량은 전기차다. 작은 마을이라 걸어서 동네 한 바퀴를 도는 데도 오래 걸리지 않지만 전기차 택시를 타고 올드타운으로 향했다. 과거 곡식을 쌓아두던 창고와 오래된 목조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어릴 적에 <알프스의 소녀> 같은 동화를 보면서 그런 동화 같은 마을이나 삶을 꿈꿔보잖아요. 바로 이곳이 그래요. 조금 전에는 <플란다스의 개>에서 파트라슈가 끌던 것과 똑같은 나무 수레가 지나갔어요.”
베른(Bern)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제네바 또는 취리히가 스위스의 수도라고 착각하지만, 스위스의 수도는 바로 베른. 구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다. 또 구시가지는 비가 와도 우산이 필요 없을 정도로 아케이드가 잘 마련되어 있다. 가장 큰 아케이드는 무려 6km에 달하니까. 어쨌든 스위스에 도착해 처음으로 도시에 온 것이다. 베른 기차역의, 도시다운 인파를 보고 그녀는 크게 웃었다. “그 사이 자연 속에 동화되었나 봐요. 갑자기 많은 사람을 보니까 놀랐어요!”
스위스로 떠나기 전까지, 한지민의 일상은 영화 <플랜맨>을 위한 기타 수업과 보컬 수업으로 가득 차 있었다.“영 화 촬영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 휴가를 온 셈이죠.” 하지만 스위스에서도 틈틈이 연습을 하기 위해 하얀색 기타를 가져왔다. “기타도 어렵지만, 노래는 더 어려워요. 제 목소리를 내야 하니까 마음대로 안 되는 거예요. 또 기타는 피아노처럼 막 연습을 못해요. 손에 물집이 잡히면 안 되니까요. 그래도 기타가 아주 마음에 들어요. 제 이름도 새기고, 기타 이름도 지어줄까 봐요”. 수업을 시작하면서 직접 고른 기타는 그녀의 흰 피부와 하얀 손과 아주 잘 어울렸고, 여러 짐 중에서도 특별 대우를 받았다. 가장 먼저 픽업해서, 가장 안전하게 놓아두곤 했으니까. “제 손이 작은 편이거든요. 처음 기타 선생님을 만났을 때 제가 그랬어요. 제 손이 작아서 잘 배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요. 선생님께서 바로 꼬마 아이들이 기타를 연주하는 영상을 보여주셨죠. 바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랬어요.” 무엇이든 정해진 시간표대로 살아야 하는 강박증에 걸린 남자. 그리고 편의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자신의 시간을 자유롭게 유영하며 노래를 부르는 여자. 한지민이 연기하는 여자는 그 남자의 쳇바퀴 같은 인생을 조금씩 바꿔나갈 것이지만, 그녀 역시 새로운 캐릭터를 통해 자신의 삶을 변화하는 중이다.“제 캐릭터는 조금 엉뚱해요. 아주 특이한 가사를 쓰고 곡을 붙여서 노래를 해요. 그게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이 영화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예요. 제가 되고 싶은 성격을 한번 연기해보고 싶었거든요.”
배우들이 여행을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은둔의 삶을 선택 할 것이 아니라면, ‘보는 눈’과 ‘듣는 귀’로 가득한 삶 속에서 유일하게 익명의 삶을 되찾게 되는 길은 여행뿐이니까. “어제처럼요?” 한지민이 웃었다. 어제 우리는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오래된 지하 창고를 개조한 근사한 레스토랑과 노천 바에서 스위스 와인과 칵테일을 마셨던 것이다. “저는 그래도 하고 싶은 걸 참는 성격은 아니에요. 하고 싶은 건 하려고 해요. 작품이 끝나면 꼭 여행을 떠나려고 해요. 작년엔 언니 그리고 조카와 함께 샌디에이고를 여행했고, 이번에는 좋은 인연으로 스위스를 여행하고 있고요. 제가 혼자 왔다면 이렇게 이곳저곳을 다니진 못했을 것 같아요. 베른, 이곳은 도시인데도 여전히 자연이 느껴져요! 스위스는 온 나라가 그런 것 같아요. 기차에서는 어디에서나 눈 덮인 산이 보이고요. 벌써 며칠째인데도 여전히 신기해요.” 이쯤 되니 궁금해졌다. 자연 그리고 도시 중에서 한지민의 마음을 끄는 건 어느 쪽일까? “음… 정말 어려운 질문인데요. 자연은 자연대로, 도시는 도시대로 매력이 있으니까요. 그래도 굳이 고른다면, 자연이 아름다운 곳에 마음이 더 가요. 더 편안해져요.”
친한 친구와 떠나는 여행은 위험하다. 사이 좋은 친구가 함께 떠나서, 겨우 물 한 병이나 저녁 메뉴를 두고 옥신각신하다 서로 말 한마디 안하고 며칠을 보내기도 하는 것이 여행이니까. 그렇다면 여배우와 여행을 떠난다는 건 어떨까? 피곤하다고 화를 내진 않을까? 햇볕이 강해서 피부가 그을린다고 얼굴을 찡그리진 않을까? 에디터들은 언제나 촬영 짐만큼이나 걱정과 스트레스를 한아름 이고 지고 떠난다. 하지만 그녀와의 여행은 달랐다. 열 명이 넘는 스태프 중에서 가장 잘 걸었고, 잘 먹었고, 잘 웃었으며 모두를 웃기는 농담을 할 줄 아는 사람. 그 어떤 까다로움이나 슬픔도 그 길 위에는 없었다. 스위스와 나는 최고의 여행 친구를 만난 것이다. 다음에는 어디로 떠날까, 바로 그것을 기대하게 되는 친구처럼. 여행에 관한 테오 앙겔로풀르스의 철학적인 영화 <영원과 하루>의 메시지처럼 좋은 사람들과 보낸 시간은 그 어떤 시어보다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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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허윤선
- 포토그래퍼
- Son Ik Chung
- 스탭
- 스타일리스트/한혜연, 헤어 / 소린(제니하우스 청담점), 메이크업/성희(제니하우스 청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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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촬영협조 / 스위스정부관광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