훗카이도의 낮과 밤
덩치 큰 눈사람이 가로등이 되는 곳, 계절마다 온전히 다른 얼굴을 드러내는 곳, 온통 눈으로 뒤덮인 홋카이도 토마무에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겨울을 만끽하며 여름날 이곳에 다시 와야 하는 이유를 찾아냈다.
시작은 <설국>이었다. 지난해 다시 책을 꺼내 읽으며 겨울에는 홋카이도에 가야지, 폭설에 고립되어야지 하고 벼르던 참이었다. 책에서는 매일마다 눈이 쏟아졌다. 보이지 않고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곳이라 더 간절했다. 소설의 배경은 니가타였지만 홋카이도에 가리라 다짐한 건, 소설 속 주인공처럼 폭설에 고립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고요한 ‘물 의 교회’를 볼 수 있고, 이글루에서 따뜻한 사케를 마실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말하자면 홋카이도는 니가타의 풍경을 누리면서도 오랫동안 바랐던 것들을 보고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땅이었다.
일본 최북단에 위치한 섬, 홋카이도는 그야말로 풍요로운 대자연의 혜택을 받고 있다. 해빙과 함께 풀꽃이 일제히 싹트는 봄, 형형색색으로 만발하는 꽃들로 반짝이는 여름, 청명한 하늘을 드리우는 가을, 순백의 눈이 대지를 감싸는 눈부신 겨울.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감추고 있던 풍부한 표정을 드러내는 홋카이도는 일본인조차 평생에 꼭 한번 다녀와야 할 여행지로 손꼽는 곳이다. 홋카이도 신치토세 공항에 내려 버스를 타고 토마무로 가는 동안 창밖은 그야말로 설국이었다. 어떠한 경계나 지향점도 없이 그저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풍경을 지나쳤다.
그렇게 두 시간을 달렸을까. 드디어 최종 목적지인 호시노 리조트 토마무에 도착했다. 100여 년 전통의 일본 료칸 그룹인 호시노 리조트가 운영하는 이곳은 그야말로 하나의 거대한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상행선과 하행선으로 나누어져 마을을 통과하는 버스를 타고 홋카이도 최대 규모의 파도 수영장인 미나미나 비치, 노천탕 기린노유, 겨울이면 전 세계의 보더가 모여드는 스키장,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견고한 건축물인 물의 교회, 높이 솟아오른 더 타워 호텔을 지나 버스의 종점이자 여행의 숙소인 리조나레 타워에 도착했다.
오후 6시 남짓, 해는 벌써 기울었고 눈앞의 모든 것은 여전히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밑바닥은 물론이고 사방이 눈이 비추는 거울로 가득한 그곳에 가로등이란 장식물 같은 존재였다. 누군가 만들어놓은 덩치 큰 눈사람이 가로등이 될 수 있는 이 땅이 바로 홋카이도였다.
토마무라는 반전의 매력
리조나레의 객실에 들어서서 짐을 풀기도 전에 큰 창에 달라붙어 곧게 선 나무로 빼곡히 뒤덮인, 토마무의 맨 얼굴을 천천히 들여다봤다. 나지막한 건물 사이로 쌍둥이 빌딩인 더 타워 호텔만이 높이 솟아 있었다. 전체 객실을 스위트룸으로 꾸민 리조나레는 월풀 욕조와 사우나까지 갖추고 있어 객실 안에서 온천 코스까지 한 번에 끝낼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안쪽에 자리 잡은 리조나레가 조용한 여행자들이 찾는 객실이라면 더 타워 호텔은 활동적인 여행을 원하는 이들로 붐빈다. 아이스 빌리지, 노천탕, 수영장과 가까이 위치해 여기저기 다니기 편하고 무엇보다 스키장이 가까워 더 일찍 시작해 늦게까지 보드를 탈 수 있기 때문이다. 짐을 풀고 다시 버스에 올라탔다. 실내 파도 수영장인 미나미나 비치에 가기 위해서다. 전면과 천장이 유리로 되어 있어 실내에 있으면서도 실외에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미나미나 비치에 들어서니 두껍게 껴입은 옷이 민망할 만큼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 보았던 겨울의 설경은 그곳에 없었다. 파도 풀에 몸을 맡긴 이들은 마치 여름날의 피서를 만끽하는 것 같았다. 바로 옆에 위치한 노천탕 기린노유로 자리를 옮기니 마침 거짓말처럼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머리에는 눈이 쌓이고, 머리카락은 고드름처럼 딱딱하게 굳어가고, 몸은 점점 뜨거워졌다. 노천탕 앞에 그림처럼 펼쳐진 눈밭으로 라이언 맥긴리 사진의 주인공들처럼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바로 옆이 남탕이라 상상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눈은 탕에 닿기도 전에 녹아 없어졌다. 고개를 들면 어지러울 만큼 눈이 흩날리고, 고개를 숙이면 뜨거운 온천물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묘한 시간을 꽤 오래 즐겼다.
몸을 녹이고 찾은 곳은 아이스 빌리지다.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눈의 왕국을 옮겨놓은 듯한 아이스 빌리지로 들어가는 길에서 천천히 떠오르는 열기구를 목격했다. 은은한 오렌지빛을 뿜으며 솟아오르는 열기구에 올라탄 이들이 열심히 손을 흔들어댔다. 컵과 장식품을 만들 수 있는 아이스 공방과 치즈와 초콜릿 퐁듀를 비롯한 요리를 즐기는 아이스 레스토랑, 아이스 링크 그리고 아이스 채플을 둘러보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파란 조명과 하얀 얼음만으로 이뤄진 아이스 채플은 몽환적이면서도 로맨틱했다. 아이스 공방에서 만든 컵을 들고 아이스 바에 가니 시원한 맥주를 부어줘 한숨에 들이켰다. 다음 순서는 따뜻한 사케였다. 야마자케라 불리는, 막걸리처럼 걸쭉하면서도 달콤쌉싸래하고 톡 쏘는 맛이 있는 기특한 술이었다. 마지막 한 잔이라는 게, 또 한 잔으로 이어졌다. 홋카이도의 겨울밤에는 예상한 만큼의 서늘한 칼바람이 불어댔지만 야마자케가 몸을 데워준 덕분에 거뜬히 견뎌낼 수 있었다.
설원 위를 달리다
토마무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훅 불면 휘리릭 날아가는 샴페인 파우더 스노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마치 처음 눈을 구경하는 사람처럼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을 찾아 그 눈을 밟으려 애쓰게 된다. 호시노 리조트 토마무의 17개의 스키 코스는 토마무 산을 전면으로 활용한다. 오랜만에 타는 보드라 긴장이 되었지만 걱정을 하지 않았던 건 상주하는 한국인 강사에게 레슨을 받을 수 있어서였다. 보드 장비는 물론 옷과 모자, 장갑까지 대여해주는 점도 맘에 들었다. 아니라면 여행가방이 보드복만으로 가득했을 테니 말이다. 보드복을 풀세트로 입고 장비를 갖추니 긴장이 자신감으로 바뀌는 기분이었다. 폭신하고 부드러운 눈 덕분에 몇 번이나 넘어져도 오뚝이처럼 일어날 수
있었다. 스키와 보드를 제법 타는 이들은 특유의 고른 설질 때문에 한국에서는 엄두도 못낼 만큼의 속도를 낼 수 있어 좋다고 입을 모았다 .
30분 남짓 급속 보드 레슨을 끝내고 리프트를 타고 올라갔다. 객실에서 넋을 놓고 보았던 풍경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동안 또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쌓여 있는 눈은 모든 풍경을 더 선명하게 했지만 흩날리며 내리는 눈은 시야를 뿌옇게 흐려놓았다. 선명할 때와는 또 다른 차원의 절경이었다.
초급코스라 하지만 꽤 경사가 있었다. 캐릭터 가면을 뒤집어쓴 스태프가 “간바레(힘내)” 하고 외쳐주며 옆으로 쌩하고 지나다녔다. 넘어진 사람이 있으면 일으켜주고, 어린 아이들과는 한참을 어울려 놀아주기도 했다. 사람들이 많지 않아 맘놓고 속도를 내고 맘놓고 넘어졌다. 몇 번이나 다시 올라가고 내려오는 동안 한 번도 같은 길로 내려온 적이 없을 만큼 하나의 코스 안에 수십 개의 작은 코스를 가지고 있었다. 오전 내내 보드를 타고 점심을 먹은 후에는 스노 모빌을 타기 위해 이동했다. 평지의 하얀 눈밭에서 타는 스노 모빌과 바나나 보트라니. 놀이동산에서 카트라이더도 타보고 물 위에서 바나나 보트도 타보았지만 설원에서의 그것은 처음이었다. 날씨만 덜 추웠다면 저녁을 먹기 전까지 계속 스노 모빌을 타겠다고 고집을 부렸을지도 모른다. 몸을 녹이기 위해 오두막처럼 만들어놓은 카페에 들어가, 이 카페에서 가장 맛있다는 마시멜로가 들어간 코코아를 주문했다. 창밖으로 스노 모빌을타고 설원을 달리는 드라이버를 바라보며 달콤하고 따뜻한 코코아를 남김없이 마셨다.
맛있고 특별한 시간들
홋카이도에 간다고 하니 주위에서는 하나같이 게를 먹고 오라 했다. 게의 어획량이 일본의 다른 지역보다 탁월하고 맛있어, 겨울이면일본 전역에서 게를 먹으러 이곳으로 모여든다. 토마무에 게 전문 레스토랑이 없어 고민하고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게를 만났다.바로 조식을 먹기 위해 찾은 리조나레의 32층에 위치한 키타쿠니 레스토랑에서였다. 많은 메뉴가 필요 없었다. 통통한 속살이 가득 찬 게가 통째로 들어간 미소국, 밥과 계란말이, 과일과 함께 매일 아침 건강한 아침 식사를 끝냈다.
리조트 토마무에는 키타쿠니를 포함해 무려 16곳의 레스토랑이 마련되어 있었다. 때문에 토마무에서는 끼니 때마다 다른 레스토랑을 찾는 미식 탐험가가 되어야 옳다. 해산물이 풍부한 곳인 만큼 많은 레스토랑에서 신선한 해산물과 소고기, 양고기를 이용한 특제 요리를 선보였다. 그중에서도 덮밥, 소바를 비롯해 튀김, 사시미, 회를 원 없이 먹을 수 있는 전통 일식 뷔페 ‘미카쿠’, 스테이크와 계절특식이 주 종목인 ‘하루’ 레스토랑은 특히 훌륭했다. 육질이 부드러운 스테이크는 입에 넣자마자 스스륵 녹아내렸다. 삿포로 맥주와의 궁합도 훌륭했다. 한 켠에 마련된 해산물 코너는 매달 그달에 가장 맛있고 신선한 해산물을 선정한 ‘메뉴 달력’을 만들어 서비스하고 있었고, 운 좋게도 막 잡아 올린 가리비를 맛볼 수 있었다 .
모든 식사가 만족스러웠지만 가장 훌륭한 곳은 ‘니니누푸리’였다. 워낙 유명한 곳이라 이곳을 오기 전부터 가장 기대했던 곳이기도 하다. 레스토랑에 들어서자마자 통유리창 밖으로 펼쳐지는 비현실적인 풍경에 압도되었다. 깜깜한 밤, 가지마다 눈을 얹은 전나무는 특유의 푸른 빛을 여유롭게 뿜어내고 있었다. 양식과 중식, 일식까지 다양하게 마련된 요리는 매번 접시에 어떤 요리를 담아야 할지 즐거운 고민에 빠지게 했다. 도저히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을 수 없는 니니누푸리의 야경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시선을 돌리니 흰 눈 위로 야생 동물의 발자국으로 보이는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을 떠날 때까지 결국 한 녀석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식사를 하는 내내 눈에 넣어둔 창밖의 풍경이 있으니 아쉬울 게 없었다.
고요한 물의 교회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1001’에 선정된 안도 타다오의 물의 교회는 토마무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물 위에 떠 있는 이 건축물이지니는 특별함은 안도 타다오의 다른 작품들이 그러하듯 단순하고도 기하학적인 형태로부터 나온다. 건물 뒤를 둘러싼 벽을 돌아서 걷다 보면 입구에 닫는다. 그 벽을 돌아오는 동안 연못은 보이지 않고, 오직 물소리만 들을 수 있다. 절로 눈이 감기는 순간이다. 한참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걸어 올라가니 마침내 물에 떠 있는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곧 교회 건축물, 그 위의 작은 유리 상자와 그너머의 산까지 하나의 시선에 담겼다. 십자가는 눈으로 덮인 물 위에 더욱 깊이 심지를 내리고 서 있었다. 뒤로 보이는 커다란 유리벽으로는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물의 교회로 들어서는 길도, 내부도 고요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 바람과 새들의 소리, 바람에 부대끼는 나뭇가지 소리만이 조용한 물의 교회를 미약하게 움직일 뿐이다. 예배를 위한 교회가 아닌 결혼식을 위한 웨딩 채플로 쓰이는 만큼 제단이나 파이프 오르간, 성경책은 보이지 않았다. 가지런히 놓인 의자와 두 개의 테이블, 방금 이곳에서 결혼식을 마친 커플이 두고 간 꽃, 글라디올라스가 공간을 더욱 환히 비추고 있었다.
최신기사
- 에디터
- 조소영
- 포토그래퍼
- Courtesy of Hoshino Resort Tomamu
- 기타
- 취재협조 | 호시노 리조트 토마무 한국 사무소 www.tomamuresor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