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 속 그녀들에게 옷을 입혔다
문학 작품을 읽으며 작가가 묘사한 주인공의 모습을 그려본 적이 있는지? 특히나 의상은 인물들의 캐릭터를 설명할 때 중요한 장치가 된다. 베스트셀러 소설 속 문장이 이야기하고 있는 그녀들의 모습에 가을/겨울 의상을 대입해보았다.
| 무라카미 하루키
긴급 대피 공간에 다다른 아오마메는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며 비상계단을 찾았다. 계단은 금세 눈에 띄었다. 운전기사의 말대로 계단 입구에는 허리보다 조금 높은 철책이 있고 문에는 자물쇠가 채워졌다. 타이트한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그 철책을 뛰어넘는다는 건 적잖이 번거로운 일이지만 남의 눈만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하이힐을 벗어 숄더백에 찔러 넣었다. 맨발로 걸으면 스타킹은 엉망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아무 가게에서나 새로 사면 된다. 사람들은 그녀가 하이힐을 벗고 코트를 벗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바로 앞에 서 있던 검은 도요타 셀리카의 열린 창문으로 마이클 잭슨의 새된 목소리가 배경음악처럼 흘러나왔다.
1984년, 꽉 막힌 고가도로에 갇혀버린 아오마메는 누군가를 죽이러 가는 길이었다. 도통 앞으로 나아갈 기미를 안 보이자 그녀는 택시에서 내려 비상계단을 타고 지상으로 탈출한다. 소설 속에 꽤 구체적으로 묘사된 아오마메의 옷차림(준코 시마다의 녹색 정장, 찰스 주르당 구두)을 참고해 2012년의 그녀에게 추천하는 건 바로 스텔라 맥카트니의 슈트. 간결한 재단이 그녀의 강단 있는 캐릭터와 어울린다. 또 재킷을 생략하고 블라우스에 바로 트렌치코트를 걸치는 것도 추천한다. 트렌치코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멋스러운 데다 옷을 겹겹이 입지 않아 편안하기 때문이다.
| 넬레 노이하우스
수사반 막내 카트린 파싱거는 복도 커피 자판기 앞에서 니콜라 엥겔 과장의 비서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녀가 주름 블라우스와 체크무늬 바지를 입고 돌아다니던 시절은 막을 내린 것 같다. 올빼미 눈 모양의 둥근 안경테도 모던한 각진 스타일로 바뀌었고, 딱 붙는 바지에 굽 높은 부츠, 체형을 드러내는 스웨터는 부러울 정도로 늘씬한 그녀의 몸매를 부각했다. 카트린의 대변신에 어떤 내막이 있는지 피아는 알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함께 일을 하면서도 동료들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수사11반의 병아리 형사는 처음에 비하면 상당히 자신감 있는 모습이었다.
어수룩한 초보와 프로를 결정짓는 한 가지가 바로 자신감이다. 그리고 여자에게만큼은, 늘씬한 몸매야말로 자신감을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 다리의 실루엣을 그대로 드러내는, 적당히 물 빠진 청바지나 가죽 바지라면 제 역할을 해낸다. 여기에 적당한 두께의 니트 톱을 매치하면 입은 사람도 저절로 어깨를 펴고 배를 집어넣게 하는, 프로페셔널한 옷차림이 완성된다. 티비와 발맹에서 선보인 심플한 스웨터 룩은 병아리에서 노련한 형사로 거듭나는 카트린을 위한 스타일이다. 사연 많고 어두운 사람들로 가득한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밝고 단순한 캐릭터인 카트린은 잠깐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멋진 스타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 기욤 뮈소
“히치하이크를 해야겠어요.” 빌리가 내 말을 싹 무시한 채 자기 생각을 말했다. “우리처럼 짐이 많은 사람을 누가 태워주겠어요.” “당신이야 태워줄 사람이 없겠죠. 하지만 나는….” 빌리가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가방을 뒤지더니 갈아입을 옷을 꺼냈다. 그녀는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단추를 풀고 청바지를 벗더니 초미니 팬츠로 갈아입었다. 상의로는 어깨가 넓은 청색 쇼트 재킷을 걸쳤다. “십분 안에 우리 두 사람이 차에 타고 있을 테니 두고 봐요.” 빌리가 선글라스를 고쳐 쓰고 걸음걸이 까지 건들건들하며 자신 있게 말했다.
베스트셀러 작가 톰과 그가 탄생시킨 소설 속 캐릭터 빌리는 캘리포니아의 한 고속도로에 서 있었다. 황량한 도로변에서 히치하이킹을 위해 빌리가 선택한 절대적 아이템은 바로 쇼츠. 짧은 반바지는 다리를 돋보이게 해주는 데다 상의에 뭘 걸치느냐에 따라 다양한 분위기를 낸다. 데스켄스 띠어리의 모던한 무드의 울 재킷을 입을지, 블루 마린의 섹시한 웨스턴 스타일의 골드 재킷을 걸칠지는 당신의 선택이다.
| 은희경
아주 오래전 어느 봄날 류의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공중전화부스의 유리에 기댄 채 통화를 하고 있었다. 가냘픈 몸매에 물방울 무늬가 들어간 연녹색 원피스와 흰 스웨터 차림이었다. 한 손으로 전화기를 귀에 대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그녀의 얼굴은 희고 투명했다. 옆구리에는 책과 노트를 끼고 있었다. 속눈썹이 긴 그녀의 눈은 꿈꾸듯 먼 허공을 보았고 입술은 장미꽃잎처럼 윤기가 흘렀다. 상아로 깎은 듯한 턱이 살짝 위로 들려서 목선을 한층 우아하게 만들어주었다. 두 뺨은 복숭앗빛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말을 할 때마다 그 위로 검은 단발머리가 조금씩 출렁거렸다. 류의 아버지는 그 눈빛과 뺨과 입술의 움직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상대의 말을 들을 때 그녀는 밤색 구두의 앞부리를 들고 굽으로 바닥을 가볍게 톡톡 쳤다.
주인공 류의 어머니는 일상의 권태로움과 가정의 위기로 인해 시니컬한 삶의 태도를 가진 지 오래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그녀에게도 순수하고 아름다운 순간이 있었다. 류의 아버지가 한눈에 반할 정도로 청초하던 어머니는 당시 간결한 원피스와 스웨터를 입고 있었는데 이번 시즌 마가렛 하웰이 제안하는 녹색 실크 셔츠 드레스라면 그 싱그러운 매력을 잘 드러내줄 것이다. 여기에 베이식한 흰색 카디건과 물방울 무늬가 들어간 케이트 스페이드의 토트백을 더한다면 원작의 복고 무드까지 제대로 반영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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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박정하
- 포토그래퍼
- 정민우, KIM WESTON ARNOLD
- 스탭
- 어시스턴트 | 노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