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시절

식물과 꽃을 모티프로 한 곡선 장식이 대칭을 이루며 퍼져 나가고, 색색의 실이 봉황과 용, 학을 그리며 날아다니는 이곳, 2012년 가을/겨울 시즌 런웨이에 동서양의 화려한 시절이 부활했다.

어쩌면 패션은 침체되고 가라앉은 사회 분위기에 드라마틱한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심리가 상대적이어서 어려울 때일수록 그 순간을 극복하고자 풍요로웠던 시절을 떠올리는데, 패션은 가장 눈에 드러나는 단계에서 그 풍요로움을 추구할 수 있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황일수록 여자들의 립스틱 색깔은 밝아지고 옷에는 화려한 장식이 더해지며 저가의 액세서리는 평소보다 더 많이 팔린다.

이번 시즌 컬렉션들도 그 현상의 연장선에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지속되며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경기 불황 탓인지 많은 디자이너가 저마다 금사와 자수, 시퀸, 진주, 비즈 등 옷에 입체적인 장식을 더하는 요소와 동식물에서 영감을 받은 복잡한 프린트가 주를 이루는 컬렉션을 선보였다. 한 가지 재미있는 건,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이번 시즌 컬렉션이 크게 두 가지 무드로 나뉜다는 것. 장식적인 바로크와 섬세한 오리엔탈리즘이 바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키워드다.

화려한 시절의 시작, 바로크와 오리엔탈리즘
‘바로크’라 뭉뚱그려 부르긴 했지만 사실 유럽의 화려한 시절을 재현한 컬렉션들을 보면 대체로 어떠한 특정 시대를 좇거나, 혹은 특정 테마에 대한 일방적인 해석을 시도한 브랜드는 없었다. 다만 바로크, 로코코, 르네상스, 고딕 등 다양한 스타일의 모티프와 시대별 영감이 한데 어우러져 서로 충돌하고, 믹스앤매치되는 식. 벨벳과 실크, 가죽 등 질감이 풍부한 소재에 오래된 벽지, 나선형 계단, 샹들리에와 스테인드글라스를 연상시키는 복잡한 패턴이 새겨졌고, 퍼프 소매, 페플럼 등 풍만한 실루엣을 이루는 장식이 더해지며, 유럽의 화려한 시대에 대한 오마주는 ‘더 크게, 더 풍부하게’를 외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돌체앤가바나는 그 화려한 트렌드의 선두에 서 있다. 이번 시즌 도메니코 돌체와 스테파노 가바나는 벨벳으로 만든 망토와 종 모양의 스커트, 레이스로 만든 퍼프 소매 원피스 위로 정교한 문양을 따라 금빛 비즈와 시퀸을 촘촘히 수놓았고, 하얀 미니드레스를 오래된 저택의 태피스트리를 연상시키는 꽃무늬 자수로 뒤덮었다. 또 여기에 오닉스와 골드 소재 귀고리, 마치 왕관처럼 빛나는 골드 플라워 헤어 피스를 매치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함으로 무장했다. 지난 시즌 세컨드 라인인 D&G의 문을 닫은 뒤로 이탈리아의 쿠튀르적 장인 정신에 더 집중하겠다던 두 디자이너의 의지는 불황일수록 화려해진다는 패션계의 속설과 묘하게 맞아떨어지며 이번 바로크 트렌드를 이끄는 주요 컬렉션으로 자리 잡았다.

또 다른 근사한 해석은 스텔라 맥카트니에게서 나왔다. 바로크를 지극히 모던한 시각으로 풀어낸 그녀는 네이비와 블루로 이루어진 톤온 톤 앙상블에 명확한 대비를 이루는 화이트 컬러의 바로크 문양을 더했다. 복잡한 무늬를 폭발 시키듯 한꺼번에 내던지는 것보다 잘 정돈된 바로크 문양이 이루어내는 시각적 효과를 노린 결과였다. 곡선 문양과 대칭 구조, 그리고 드라마틱한 색상 대비라는, 바로크 패턴의 기본 특성도 잘 드러났다. 좀 더 실용적이고 군더더기 없는 해석을 찾는다면 20대 중반의 젊은 디자이너 올리비에 루스텡이 선보인 발맹의 두 번째 컬렉션도 좋은 예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 궁정의 인테리어 건축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발맹의 DNA에 내재된 록 스피릿에 충실해 박시한 재킷과 타이트한 미니드레스, 스키니 팬츠 등 요즘 여자들이 즐겨 입는 아이템에 진주와 자수를 이용한 화려한 패턴을 더했다. 구찌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를 풀어냈다. 짙은 초록, 와인, 블랙 등 깊은 컬러의 벨벳 소재에 자카드 공법으로 화려한 무늬를 새겨 넣은 블라우스와 드레스로 어두운 고딕 스타일을 선보인 것이다. 이렇게 유럽의 화려한 시절은 시대를 아우르는 패턴과 문양이 총집합하며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고 다채롭게 나타났다.

반면, 오리엔탈리즘의 진영에서는 무엇보다도 디자이너들의 진화가 가장 두드러지는 성과로 꼽힌다. 사실 그동안 서양 디자이너들의 동양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해석을 보는 게 그리 편하지만은 않았다. 몇 십 년이 지나도록 기모노와 치파오, 만다린 칼라의 범위에서만 머무르며 동양인 코스프레에서 그치는 컬렉션을 선보여 왔으니까. 하지만 이번 시즌 디자이너들은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접근을 시도한 것 같다. 오로지 ‘이국적인 것’에만 집중해 머리에 서양 난을 꽂고 나온다거나 아무 데서나 오비 벨트를차는 등 1차원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실제로 동양의 전통의상을 입고, 뜯고, 탐구하며 현재 여자들이 정말로 입는 옷에 어떤 식으로 적용할수 있을지 고민한 흔적이 드러난다.

그 고민을 가장 성공적으로 풀어낸 건 단연 프로엔자 슐러였다. ‘보호(Protection)’를 주제로 한 컬렉션에서 그들은 사무라이의 딱딱한 갑옷을 분해해 여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의 모던한 미니스커트와 스웨터 시리즈로 재조립했고, 실크 소재로 스펙테이터 재킷을 만들어 누빈 다음, 전통 자수를 더해 이번 시즌 패션 피플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재킷을 만들어냈다.꽃무늬가 빽빽이 들어선 실크 소재 자카드 원피스도 수많은 패션 블로그에 ‘갖고 싶은 드레스’로 스크랩되었다고. 특정 문화권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옷이 대중적 인기를 얻는다는 건 디자인이 현시대를 잘 반영하면서도 이국적인 요소가 적절히 가미되어 매력적이라는 얘기. 프로엔자 슐러의 사무라이 걸 룩이 딱 그랬다. 드리스 반 노튼 또한 십장생도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프린트를 다양한 룩에 적용하며 오리엔탈 프린트의 응용 가능성을 시험했다. 그중에서 눈에 띈 건 벨티드 재킷과 팬츠, 혹은 오버사이즈의 더블브레스티드 코트 안에 오리엔탈 프린트의 톱을 입는 등 밀리터리 룩과 오리엔탈 무드의 조합을 시도한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을 위해 존재하는 오리엔탈리즘이 아닌, 현존하는 다른 스타일과 자연스럽게 융화될 수 있는 오리엔탈리즘의 예를 보여준 셈이라 의미가 남다르다. 또 , 시종일관 날카로운 재단의 옷들을 선보이며곡선보다는 직선을, 대칭보다는 비대칭에 중점을 두는 오리엔탈리즘의 본질도 지켜냈다.

화려한 시절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자세
화려하기 그지없어 보이지만, 바로크와 오리엔탈 트렌드를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다. 먼저, 액세서리를 적극 활용하는것부터 시작해보자. 바로크 트렌드는 옷뿐만 아니라 가방, 신발, 스카프, 주얼리 등 다양한 액세서리에 고루 적용되었다.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을 프린트로 옮겨놓은 지방시의 가방이라든가 담쟁이 넝쿨이 구불구불 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 같은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롱 부츠를 퍼프 소매의 검은색 원피스에 매치하기만 해도 충분히 매력적이다(물론, 앞에서 제안한 것 보다 훨씬 저렴한 버전의 제품을 활용해도 상관 없다).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크 패턴은 무늬가 복잡하기 때문에 함께 매치하는 아이템을 최대한 간결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슬림한 실루엣보다는 볼륨감 있는 풍만한 실루엣이 더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헤어 스타일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화장은 한 듯, 안 한 듯 눈을 맑게 연출하는 데 집중하는 게 좋다. 너무 진한 화장은 자칫 어둡고 무서운 인상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패턴과 장식에 대한 두려움과 부담이 어느 정도 사라지면 바로크와 로코코, 고딕과 르네상스 등 패턴 레이어링에 도전해보길 권한다. 비슷한 색감(혹은 아예 블랙&화이트로 가는 것도 안전하다) 안에서 패턴의 크기에 약간의 차이를 두어 레이어링하면 충분히 멋스럽고 세련된 룩을 만들어낼 수 있다. 스텔라 맥카트니의 바로크 팬츠 슈트 룩을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오리엔탈 트렌드 또한 액세서리부터 시작하는게 현명하다. 동양 복식은 원래 직선 재단에 디테일이 미니멀하기 때문에 태슬 귀고리나 모피 소재 클러치백, 혹은 화려한 프린트의 숄을 두를 때 최대한 간결한 디자인의 옷을 고른다. 헤어 스타일도 간결하게 빗어 넘기거나 곱게 묶는 것이 우아해 보이고, 화장은 눈매와 눈썹을 또렷하게 다듬어주기만 해도 오리엔탈 룩의 모던한 느낌은 살리고, 젊고 신선한 느낌의 얼굴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단 한 가지, 붉은 립스틱은 피하는 게 좋겠다. 기껏 잘 차려입은 오리엔탈 룩이 입술 하나로 다시 클리셰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리엔탈 프린트가 들어간 옷을 입어보고 싶다면 드리스 반 노튼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평소에 입고 다니는 아이템과 최대한 매치하려 노력해보길 바란다. 예를 들어 기모노를 연상시키는 랩 스타일의 톱이 있다면 티셔츠와 어두운 컬러의 스키니 진을 매치하고 앞섶을 열어 카디건처럼 연출하는 등 생활에 자연스럽게 융화되도록 신경을 쓰는 게 훨씬 멋스럽기 때문이다. 기모노 톱을 기모노처럼 입는 순간, 코스프레가 될 수 있다는 걸 기억하자.

이번 시즌을 계기로 각각 새로운 방향과 가능성을 열게 된 바로크와 오리엔탈 트렌드. 부담스러운 트렌드라 처음엔 꺼릴지 모르지만 결국 세상에 못 입을 옷은 없는 법, 어쩌면 우리의 일상에 약간의 드라마를 더해줄 유일한 트렌드일지도 모르니 주저 말고 다가가보자.

    에디터
    박정하
    포토그래퍼
    KIM WESTON ARN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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